계약직 워킹맘의 사치스러운 새해 소망 아이가자란다어른도자란다

3년간의 전업 맘, 프리랜서 작가 노릇을 잠시 접고 계약직 노동자가 되어 배정된 책상에 앉는 순간, 지금부터는 일로 승부를 봐야겠다, 미친 듯이 일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출판사를 해보겠다고 패물이고 뭐고 더이상 팔 게 없을 만큼 한계를 깨닫고 조직생활로 돌아온 것인데 막상 그 세계에 들어서자 묘한 승부 근성이 치솟았던 것이다.


근면성실, 근검절약이 삼시 세끼처럼 당연하던 산골에서 자란 나는 어려서부터 생활력이 강했다. 연관성이 있는지 모르겠는데 눈치도 빨라서 주변 사람들의 비위를 잘 맞추고 내가 해야 하는 일을 기가 막히게 잘 찾아냈다.


일곱 살 어린 남동생 기저귀를 갈고 뜨거운 물과 찬 물을 적당히 섞어 분유를 탔다. 아침저녁으로 동네 야산에서 염소에게 풀을 먹이던 나는 커다란 소를 모는 같은 반 남자아이를 부러워했다.
밭에서 돌아온 할머니가 수돗가로 들어서면 수건을 들고 서 있었고, 할아버지가 장작을 패면 처마 밑으로 부지런히 날랐다. 엄마가 수제비를 뜨면 내 팔뚝만큼 기다란 국자로 냄비 바닥을 더걱더걱 긁어 주방장의 신임을 얻었다. 얼마나 시치미를 잘 뗐던지 할아버지가 주무시는 작은방 장판 바닥에 숨겨져 있던 천지갑에서 몰래 돈을 꺼내 과자를 사먹고도 전혀 의심을 안 샀다.


끔 읍내에 장을 보러 가면 엄마는 차가 출발하기 직전까지 물건을 사러 뛰어다녔다. 엄마가 사라져간 골목을 눈도 안 깜빡이고 바라보면서 여동생과 식료품 더미를 지키고 서 있을 때, 술 취한 할아버지가 엄마에게 욕지거리를 퍼부을 때, 아빠가 허리를 구부려 말없이 마당을 쓸고, 노을을 등지고 집을 향해 달려가는 염소들을 쫒아갈 때.
무서워도 울음을 참고 괜찮은 표정을 짓는 법, 인생의 희로애락을 체득했다.


대학생이 된 뒤로는 본격적으로 근면성실하게 일의 세계에 뛰어들었다.
기자가 되고 싶어 들어간 학보사에서 장학금을 받았고 매주 신문을 만들 때마다 취재비 명목으로 돈을 벌었다. 무릎을 구부려 앉아 주문을 받는 호프집에서 술과 안주를 나르고, 방학 때 고향에 내려가 미리 섭외해둔 아이들에게 3인칭 단수니 하는 것을 가르쳤다. 미용실에서 손님 머리를 감겨주는 아르바이트는 시급이 대단했는데 그 일을 해야겠다고 말하자마자 엄마가 눈물을 뚝뚝 흘릴 것 같은 얼굴로 무섭게 화를 내는 바람에 직접 해보지는 못했다.

석사 졸업식 세 달 전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2년 간 오스트레일리아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지 두 달이 되어갈 무렵 다시 서울의 직장인이 되었다.


첫 아이 임신 5개월 때, 자의반 타의반 일을 그만두고 출판사를 차린 나는 사무실에서 근무할 때보다 더 오랜 시간을 컴퓨터 앞에 앉아 타타타닥 자판을 두드렸다. <호주와 나 때때로 남편>, <아기와 나 때때로 남편>이라고 이름 붙인 시리즈의 초고를 마치고 ‘일이 끝났으니 이제 너에게만 집중할게’ 하고 다짐하고 난 며칠 뒤 아이가 태어났다.


아이는 금방 포동포동 살이 올랐다.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고 알아서 노는 아이는 정말로 천사였다. 내가 겪어왔던 것처럼, 이 사랑스러운 아이가 경험하게 될 삶이란 것이 늘 행복한 것만은 아니라는 게 괴로워 울었다.

그때는 블로그에 주기적으로 아이의 성장과정을 기록했는데 이토록 아름다운 피조물을 대놓고 자랑하지 못하는 게 고통스러울 정도로 ‘엄마’란 것이 황홀한 시간이었다.


그런데도 아이가 백일 쯤 되니 슬슬 일이 하고 싶어졌다. 세 시간 마다 일어나던 아이가 밤새 푹 자는데 그 시간에 ‘일’ 말고 다른 걸 한다는 건 아예 생각도 못했다. 그렇게 낮에는 아기를 보고 아기가 잠든 밤에 원고를 고쳐서 첫 책을 출간한 뒤 또다른 할 거리를 찾는 심정으로 둘째를 임신했다. 그리고 둘째가 돌을 지날 즈음 지금 일하는 직장에 들어오게 되었다.


생활에서 체득한 빠른 눈치와 제 할 일 찾기 본능, 승부 근성으로 포장된 생활력 좋은 여자는 “일 잘 한다”는 말만 신뢰하며 달렸다. 그러나 쏟은 열정과 시간, 성과에 비해 대가는 늘 불공정했다.

7급 비서 월급을 받으며 5급 비서관 명함을 쥐고 일 했고, 동일 노동에 대하여 동일 임금을 지급하지 않기 위하여 탄생한 계약직 노동자의 억울함은 생각만 해도 열불이 나서 차라리 잊으려 애썼다.


부당한 건 세상이지만 나는 가장 부당한 건 이 상황을 어쩌지 못하는 내 자신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멍하니 하늘을 보며 신세를 한탄한 다음 성취와 만족감, 자아실현 따위의 의미를 부여해가며 부지런히 일거리를 찾아 나서는 내가 구제불능 같았다.


착취당하고 버려지는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이 고리를 끊을 수 있는 건 나 뿐이다.

그래서 그만두기로 결심했다. 2년 계약이 종료되기까지 이제 다섯 달 남았다.


“끝나면 뭐 할 겁니까?”
“여행을 갈 겁니다. 미뤄두었던 책을 완성할거에요. 제주도에서 살까볼까도 싶고...”


그러나 일을 멈춰본 적이 없는 몸은 본능적으로 구직사이트를 뒤진다. 상반기 정규직 채용에 응시해 보라는 상사와 동료의 진심어린 제안에 고마워하며 풍족하고 안정적인 삶을 상상한다.  이런 내가 싫다.
아냐아냐, 흔들리지마. 출판사에 몰두해 보겠다고 마음 먹었잖아. 그런데 먹고 살 걱정하면서 과연 즐겁게 글만 쓸 수 있겠어? 이런 질문을 던지는 내가 정말 싫다.


허리가 ㄱ처럼 구부려지도록 한평생을 논밭에서 구르고도 손녀가 좋아하는 고들빼기 씨를 받아두는 농사꾼 할머니를 둔 내가,

자식들에게 폐 안 끼치려고 1톤 화물에 이삿짐을 실어 나르는 일흔 살 시아버지의 자식인 내가,
이번에야 말로 남 눈치 안 보고, 세상에 이용당하지 않고 하고 싶은 일에 몰두하는 것이 새해 소망이라고 결론을 맺는 사치스러운 글을 쓰고 있는 것이 참말로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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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2012년 첫째 아이 임신, 출산과 함께 경력단절녀-프리랜서-계약직 워킹맘-전업주부라는 다양한 정체성을 경험 중이다. 남편과 1인 출판사를 꾸리고 서울을 떠나 화순에 거주했던 2년 간 한겨레 베이비트리에 ‘화순댁의 산골마을 육아 일기’를 연재했다. ‘아이가 자란다 어른도 자란다’를 통해 아이와 부모가 함께 성장하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2017년 겨울, 세 아이 엄마가 된다. 저서로는 <호주와 나 때때로 남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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