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집 알림장 연애편지 아이가자란다어른도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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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겨울 알림장에 붙어 있던 사진.

어린이집에서 찍은 사진은 “자, 준영아 여기 봐라 하나둘셋!” 하는 것이니만큼 대개는 경직된 표정이기 마련인데, 이 사진만큼은 무척 편안해 보여서 기뻤던 기억이 난다.

 


‘형식’의 측면에서 보면, 사는 동안 가장 많이 쓴 것은 편지였다.

태동기는 여중, 여고시절. 그 땐 누구나 썼다. 마치 무언가를 쓰지 않고는 도저히 못 배기게 하는 호르몬이라도 흘렀던 것처럼.

나는 그 중에서도 좀 더 유난한 편이었다. 첫 문장이 “나에게”로 시작하는, 지금 떠올려도 마구 오글거리는 ‘나에게 쓰는 편지’ 같은 일기는 기본이었고, 글짓기 대회에서도 곧잘 편지를 썼다. 예를 들면 북한에 사는 친구에게 같은 것.

하여튼 수업 시간에 머리를 푹 숙이고 있으면 둘 중 하나였다. 졸고 있거나, 편지를 쓰거나.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고 싶다는 건, 그립다는 말이었다. 그리워할 만큼 좋아한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눈 감아도 떠오르는 건 반듯하게 생기고 공부도, 운동도 잘 하는 이웃학교 오빠이거나, 학원의 같은 반 남자아이, 잘만 하면 어떻게 해볼 수 있을 것 같은 총각 선생님, 혹은 고운 남자 같은 외모의 선배 언니였을 텐데. 앙큼한 동시에 현실적이기도 했던 우리는 제일 가까운 친구에게 편지를 쓰는 길을 택하곤 했다.

 

가끔 한 사람을 두고 ‘진성’ 논란이 휘말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 경우만 제외하면 단짝들은 친절하고 배려가 깊고 안전했다.

세심한 그녀들은 여러 색의 볼펜을 적절하게 골라 쓸 줄 알았다. 시나 시 같은 노래가사도 즐겨 활용했다. 지루하지 않게 그림을 그려 넣는다던지 하트모양처럼 종이를 접는다던지 하며 스스로 진화해갔다.

책상 서랍이나 필통에서 튀어나오던 서프라이즈 편지들! “(너지?)” 하는 표정으로 짐작이 가는 아이를 바라보면 “(응, 나야!)” 하는 만족스런 표정을 짓던 나의 단짝들은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려나.

 

한동안 멈췄던 편지쓰기는 한 남자를 알고 난 뒤 다시 활활 타올랐다. 서로의 손을 처음 잡았던 날 밤부터 나는 당연하게 편지를 썼다.

너란 사람을 첫 눈에 알아보았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우리가 결국 이런 사이가 된 것이 얼마나 경이로운지. 나에게 사랑이란 감정을 알려준 너란 남자는 내 인생에 어떤 의미로 남을 것인지.

 

편지가 아니면 무엇으로 전한단 말인가. 보고 있어도 보고 싶고, 내 손에 남아 있는 네 온기가 그리워 잠이 오지 않는다는 말을, 너에 관한 모든 것, 교복을 입고 있던 시절의 너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너까지도 독차지하고 싶어 견딜 수 없다는 유치찬란한 고백을. 그 덕분에 그 남자와 지금 아이를 낳고 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나는 지금 세 번째 ‘편지쓰기 전성기’를 보내고 있다.

큰 딸 준영이가 세 돌이 되어가던 작년 여름은 아이의 서러운 울음소리로 기억된다.

“준영아, 오늘 하루 즐겁게 잘 지내자!”

시나리오에 의하면 이쯤에서 뜨거운 포옹 뒤 웃는 얼굴로 빠이빠이 하고 돌아서는 건데, 현실은 눈물, 콧물, 땀이 뒤범벅인 아수라장이었다.

 

엄마가 자기만 남겨두고 사라지는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 낯선 장소를 아이가 반길 리 없었다.

그래도 “엄마가 회사에 가서 일하는 동안 준영인 어린이집에서 선생님과 친구들과 노는 거야.” 하는 말을 조금은 이해했는지 일단 차에서 내리기는 했다. 그때부터 입을 삐죽거리며 울먹이던 아이는 선생님과 인사를 할 때부터 양팔로 내 목을, 양 다리로 허리께를 꽉 조이고 바들바들 떨며 서럽게 울었다.

 

아이에게 우는 모습을 보이지 말고 단호하게 뒤돌아서야 합니다.

어디서 읽었던가, 들었던가.

피부처럼 달라붙은 아이의 팔다리를 억지로 떼어내 원장 선생님께 안겨주고 뛰쳐나오면서 목구멍까지 왈칵 차오르는 뜨거운 눈물을 꾸역꾸역 밀어냈던 날들.

이놈의 세상에서 살아가는 건 왜 이렇게 힘든 걸까, 난 정말 도시로 나올 수밖에 없었던가. 나의 선택을 원망하며 갈팡질팡 했던 계절.

 

알림장에 몰두하는 나의 모습은 예상 밖의 일이었다.

아이의 눈을 들여다보며 오늘 하루 어땠는지 물어보면 될 일인데. 나는 어쩐지 아이에게 직접 확인하는 것보다 사진 한 장과 함께 아이의 하루가 간단히 기록된 알림장을 보는 게 더 안심이 되었다.

내가 없는 동안 아이가 어떤 표정을 짓고, 무엇을 보고 느꼈는지. 무슨 말을 하고 행동을 하는지. 잘 먹고 잘 자는지. 엄마가 보고 싶다고 울지는 않는지.

알림장은(선생님은) 아이는 잘 하고 있으니 염려 말라고, 누구나 언젠가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라고 다독여주었다.

그 위로가 그리워 아이와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허겁지겁 가방을 열어젖히고 알림장부터 꺼내 읽은 날도 있었다.

 

 

“오늘은 엄마랑 헤어질 때 울고는 교실에 들어와서 바로 뚝 그쳤답니다!”

“눈이 마주칠 때면 활짝 웃어주는 우리 준영이. 어디서 애교덩어리가 저에게 온 건지^^”

“우리 준영이 배추 모종 심고 왔어요. 많이 해본 솜씨던데요? 말을 너무 예쁘게 해요~ “나중에 다시 만나러 올게~ 잘 자라라”라고 이야기 하며 모종심기에 열심에요.”

“집에서도 역할 놀이에 빠졌군요. 저는 어린이집에서 맨날 미용실 손님이랍니다 ㅋㅋ”

 

 

어린이집 적응기를 완전히 벗어난 지금도 나는 알림장 주고받는 걸 여전히 좋아한다. 밤에 아이들이 잠들고 난 뒤, 혹은 아침에 일어나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바로 알림장을 쓰는 일이다. 마치 열쇠가 달린 비밀 일기장에 교환일기를 쓰던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다.

아이의 매일을, 역사를 기록하는 일에 동참하는 것 자체가 기쁘고, 공동 양육자로서 선생님과 동지애를 교감하는 것이 좋다. 특히, 나보다 더 오랜 시간을 내 아이와 함께하는 선생님과, 그 아이의 사랑스러움에 대해 나누는 편지라니!

가끔 메모지를 덧붙여 길게 쓰기도 하는데, 부디 선생님도 즐기고 계시기를 바랄뿐이다.

 

사실 선생님 칸은 늘 새로운 이야깃거리들로 넘치지만 내 칸은 복사 붙여쓰기라도 한 것처럼 비슷해서 조금 민망할 때가 있다.

그래도 진심인 걸, 제일 전하고 싶은 말은 그것뿐인 걸 어쩌랴 하며 오늘도 정성껏, 마치 처음 고백하는 것 마냥 써내려간다.

 

“선생님도, 아이들도 모두 좋은 하루 보내셨으면~♥ 늘 고맙습니다.”

 

 

부록. 알림장 맨 앞장에 붙여 둔, 등원 첫 날 선생님께 보낸 편지쓰기 달인 엄마의 편지.

 

선생님 안녕하세요.

정준영 엄마, 안정숙 입니다.

 

준영이는 10월이면 만 세돌이 되는 저희의 첫 아이에요.

돌을 막 지난 여동생(정태희)이 있고요.

노래 부르고, 춤 추고, 공 차고, 돌을 줍고, 뛰어다니며 노는 걸 좋아하고, 자동차, 로보카 폴리, 프린세스 소피아, 토토로를 사랑한답니다.

 

준영인 돌 무렵부터 화순의 산골마을에서 살았어요.

그래서 또래 친구보다 할머니 할아버지들, 논, 밭, 개, 닭, 새들과 더 친숙합니다^^

 

새로운 환경에서 선생님과 친구들과 함께할 준영이의 새로운 날들에 무척 설렙니다. 모든 부모의 마음이 그렇겠지만, 부모의 품을 떠나 처음 만나는 어른, 선생님과의 인연이 참 각별하고 소중하게 느껴지네요.

 

아무래도 첫 어린이집 생활이다 보니 부모도, 아이도 여러 가지 면에서 서툴 거에요.

저희 부부도, 준영이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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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낮잠 자는 시간에 짬을 내어 알림장을 쓰는 준영이의 담임 선생님의 모습.

며칠 전 아이들 상담하러 간 덕분에 엿보며 생각했다.

한밤중, 새벽에 알림장을 쓰는 엄마들과 닮았을 거라고(분위기도, 마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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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2012년 첫째 아이 임신, 출산과 함께 경력단절녀-프리랜서-계약직 워킹맘-전업주부라는 다양한 정체성을 경험 중이다. 남편과 1인 출판사를 꾸리고 서울을 떠나 화순에 거주했던 2년 간 한겨레 베이비트리에 ‘화순댁의 산골마을 육아 일기’를 연재했다. ‘아이가 자란다 어른도 자란다’를 통해 아이와 부모가 함께 성장하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2017년 겨울, 세 아이 엄마가 된다. 저서로는 <호주와 나 때때로 남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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