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자매와 동고동락 85일] 오후 3시를 부탁해 화순댁의산골마을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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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3시.

남편이 집에 돌아오기까지 남은 시간 3시간.

목과 등은 뭐가 올라탄듯 무겁고 허리는 끊어질 듯 삐그덕 대고 물 먹은 솜마냥 축 쳐지는 시간.

첫째 아이의 "싫어, 안해, 하지마" 시리즈에 평정심을 갖고 대하기엔 정신과 육체가 한없이 피폐한 시간.

지난 밤, 잠든 아이들의 얼굴을 보며 "내일은 더 잘할게" 했던 다짐이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는 시간.

이러나저러나 오후 마실에 나설 시간.

 

그런데 동굴속 같이 컴컴하기만 한 마음에 한줄기 빛이 들었으니, 둘째가 낮잠을 잘 싹수가 보인다.

하루종일 뛰어 놀았어도 아직도 팔팔한 24개월 첫째 아이.

엄마가 꼼수를 쓰려는 건 꿈에도 모르고 신발 신는 걸 도와달라며 성화다.

 

조금만 기다려줘!

태희가 배가 고픈가봐.

일단 젖부터 먹이자.

 

자라, 자라 주문을 외우며 둘째 아이에게 젖을 충분히 먹인 뒤 트림까지 시킨다.

눈에 흰자위가 보일락 말락, 옳거니 기회가 왔다!

아이를 침대에 내려 놓고 조심조심 토닥이는데 목청 좋은 첫째 아이가 있는 힘껏 외친다.

"엄마~~ 기저귀 갈아주세요~~!!"

1차 실패.

 

조금만 기다려!

일단 언니 엉덩이부터 씻겨주고 다시 올게.

 

보일러를 틀어 따뜻한 물이 나올 때까지 기다린 다음 아이 엉덩이를 씻기고.

몇 분이 몇 시간 같다.

로션을 발라주고, 내복을 갈아 입히는 동안 둘째가 자지러지게 운다.

졸음이 잔뜩 묻어 있는 울음이다.

얼른 가서 대충 흔들어주면 바로 곯아떨어질텐데.

 

행여 적기를 놓칠세라 마음은 안절부절.

그럴수록 손은 자꾸 엇박자가 난다.

동생이 저렇게 울어제끼면 엄마를 동생에게 양보해야 한다는 걸 아는 아이는 내복바지를 입히려는 내 가슴에 하이킥을 날려가며, 옴몸을 배배 꼬아가며 시간을 끈다.

 

조금만 기다려줘!

태희 재우고 금방 올게.

 

여기도 저기도 조금만 기다려줘.

요즘 두 아이가 가장 자주 듣는 말이리라.

 

뛰다시피 둘째가 누워 있는 방으로 간다.

얼굴이 시뻘건 아기를 안아 올리자 울음을 뚝 그친다.

자장자장 우리 태희, 우리 태희 잘도 잔다~

 

그 순간 온 집안을 쩌렁쩌렁 울리는 소리

"엄마~~!! 내려줘요~~!!"

아뿔사,  준영이를 우리 침대에 올려둔 채 나왔지.

2차 실패.

 

이제 아이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 본다.

너를 재우지 못한 낭패감에 사로잡힌 엄마에게 눈치도 없이 꺽꺽 웃음을 날린다.

 

좋다. 좋아.

다 버리련다.

 

한 놈 재우고 다른 놈에겐 겨울왕국을 틀어주고 책 몇 쪽 보려던 사심을.

머릿속을 떠다니는 생각 하나를 끄집어 내 글로 풀어보려던(그래서 밤에 일할 시간을 줄여보려는) 욕심을.

하다못해 저녁 반찬이라도 미리 만들어두려던 것을.

 

뻣뻣한 허리를 끙하고 일으킨다.

한 손에 젖먹이를 안고 다른 손으로 큰 아이를 안아 침대에서 내린 다음 거실로 나온다.

 

대신 뽀로로, 토마스 기차 말고 엄마가 좋아하는 음악을 듣자.

오디오에 휴대폰을 연결한다.

남편과 오로지 둘뿐이던 시절 여행하며 들었던 음악들.

센과 치히로의 하쿠는 여전히 나를 설레게 하고, 언제고 나를 위로하는 바람이 분다를 지나 부활, 퀸, 레이디 가가...

 

둘째 아이를 안고 몸을 천천히 흔든다.

첫째 아이가 발을 탕탕 구르며 팔을 흔들며 춤을 춘다.

주방 유리문에 엉기적거리는 우리 셋의 잔영이 아름답게 새겨진다.

 

몇 곡이나 흘렀을까.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던 아기가 잠이 들었다.

내 허벅지에 딱 달라붙어 있던 첫째 아이도 거실 한쪽에서 저혼자 소꿉놀이를 한다.

지금이 바로 내가 원하던 순간이다.

아이를 침대에 눕히고 서재로 걸어가서 책을 보든 글을 쓰든 하면 된다.

그런데 난 왠지 지금 이 장면을 오래 유지하고 싶어진다.

 

그리고 결심이나 한 듯 외친다.

"준영아! 밖에 나가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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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2012년 첫째 아이 임신, 출산과 함께 경력단절녀-프리랜서-계약직 워킹맘-전업주부라는 다양한 정체성을 경험 중이다. 남편과 1인 출판사를 꾸리고 서울을 떠나 화순에 거주했던 2년 간 한겨레 베이비트리에 ‘화순댁의 산골마을 육아 일기’를 연재했다. ‘아이가 자란다 어른도 자란다’를 통해 아이와 부모가 함께 성장하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2017년 겨울, 세 아이 엄마가 된다. 저서로는 <호주와 나 때때로 남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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