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살이 10개월 차, 개가 가르쳐준 것들 화순댁의산골마을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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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서울 10개월 차.

따식이 엄마아빠가 된 지도 10개월 차.

 

아무 연고가 없는 산골마을로 내려온 이유가 서울에서와는 다른 생활을 위해서였다면,

그 삶을 재현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나보다 그가 훨씬 더 구체적인 청사진을 갖고 있었다.

 

"아침마다 새 소리에 일어나고, 노을이 지는 걸 감상하며 저녁식사를 하는"

것이 나의 시골 라이프의 로망이었고,

그는 "개를 몇 마리 두고, 프리 레인지 닭을 키워 신선한 달걀과 닭고기를 먹고,

가능하면 텃밭이 아니라 논이나 밭을 사서 제대로 농사를 지어 보는..." (골치아픈) 것이었다.

 

시작은 강아지였다.

그동안 마당 딸린 집에서 살고 싶은 욕망을 어떻게 참고 지냈지?

집에 인터넷이 개통되자마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관련 동호회, 카페에 가입을 하고 우리 집에 들여올 개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한 마리는 사는데 얼마가 드느냐" 는 나의 멋 없는 질문에

그는 사고 파는게 아니라 '분양 받는다'고 표현해줄 것을 정중히 요청했다.

 

나는 이러다가 가끔 텔레비전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냉동고에 고기를 비롯한 수십 가지 식재료를 구비해 두고

끼니 때마다 해동시켜 먹이는 일이 벌어지는 것은 아닌지 불안했지만,

어린 아들의 기를 꺾고 싶지 않은 엄마의 심정으로 일단 지켜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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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인근 지역 우체국에 근무하는 직원이 단 돈 5만원에

진돗개 한 마리를 '분양' 받을 사람을 구하고 있었다.

그는 진돗개를 이 가격에 들여오는 것은 거저나 다름없다며 무척 만족해 했다.

 

그렇게 햇살이 아주 좋던 작년 가을 어느 날,

우린 태어난 지 두달 된 강아지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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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멀미를 했는지 집에 돌아와 보니 가련한 강아지는 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낯선 곳으로 데려온 새 주인을 향한 눈빛에 원망이 서려 있는 것도 같았다.

암묵적으로 동의하긴 했지만 사실 나는 동물, 특히 개 키우는 일이 탐탁지 않았다.

아이 하나 키우는 것만도 벅차기도 했고, 무엇보다 언젠가 닥칠 이별의 순간이 싫었기 때문이다.

 

내 인생 최초의 애완견은 빈 소막을 활용해 용돈벌이를 해볼까 싶어 엄마가 키웠던

열마리 쯤 되는 잡종개들이었다.

하도 숫자가 많으니 일일이 이름을 지어준 일도, 놀아준 기억도 없지만

그들과 헤어지던 순간만큼은 선명하게 남아 있다.

 

그 날이 그 날인 줄 모르고 있던 나는

낯선 아저씨가 소막에 들어가 뒷발로 안간힘을 다해 버티는 개들을

한 마리 한 마리 끌어내는 걸 보고나서야,

왜 엄마가 그날 오후 사료를 주고 나오면서 펑펑 울었는지 알았다.

이십여 년 전만 해도 복날이면 동네 다리 밑에서 개를 잡던 시절이었다.

그때 이후로 도시에서 아파트 생활을 했으니 더이상 개를 키울 일도,

키우던 개가 개장수에게 끌려가는 걸 보며 울 일도 없었지만 그래도 자신이 없었다.

정든 개와 작별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나는 잊지 않고 있었으니까.

 

그래도 어쩌랴.

동물 없는 시골 생활은 팥 없는 단팥빵인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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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집, 낯선 식구.

처음 얼마간은 밤마다 구슬프게 울던 개도, 주인도 금방 적응했다.

 

시부모님은 개 이름은 개 답게,

누렁이 라던가, 방울이 라고 지어주라고 한마디씩 했지만

우린 남편 이름(태준) '태'자에다가,

다행히 두 형들 이름에만 달라붙은 (촌스러운) 돌림자 '식'자를 붙여

태식이(애칭 따식이)라고 명명한 뜻을 거두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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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과 물, 일용할 양식을 챙겨주고 놀아주는 따식이 아버지와,

그런 그의 발자국 소리만 나도 뒷마당 앞마당을 종횡무진하며 달려오는 어린 따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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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식이 아버지 만큼은 아니었지만 나도 그에게 꽤 사랑을 받았다.

거실 창문을 열고 따식아~ 하고 부르면 저렇게 쪼르르 달려와주었고,

내 발밑에 가만히 앉아 있기도 했다.

 

그런 그에게 목줄을 채우게 된 건,

내가 그를 순종이 아니라 잡종일지 모른다고 의심하기 시작한 건 순전히 '똥' 때문이었다.

따식이는 많이 먹고 많이 쌌다.

나름대로 정해진 자리가 있긴 했지만, 잔디가 깔린 마당에 똥이 쌓이는 꼴이 아름답진 않았다.

게다가 주인은 물론, 다른 어떤 누구를 보고도 짖지 않았다.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점잖고 영리한 진돗개의 성정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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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 따식이가 똥을 산처럼 쌓아올려도 화가 덜 날 만한,

똥 치우기 쉬운 장소를 찾아 여러번 잠자리를 옮겼다.

 

맨 처음엔 뒷마당 수돗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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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엔 오른쪽 앞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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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엿한 제 집이 생기면서 왼쪽 앞마당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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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지금은 뒷마당과 텃밭 사이,

토끼장과 닭장 가운데서 닭과 토끼를 호령하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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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로 우리집에 온 동물 친구를 아빠 옆에 서서 관심있게 바라보는 따식이.

아, 정말 너무너무 사랑스러워서 뽀뽀라도 할 뻔 했던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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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집에 꼬꼬야들이 여러 마리 들어오면서

따식이는 질투의 화신이 되어갔다.

 

저렇게 유심히 바라보는 척 하다가

엄마 아빠가 안볼 때, 닭들을 쫒아가 뒤꽁무니를 앞발로 철퍼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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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식이, 네 이놈!

 

아빠가 혼내려고 하면 저렇게 쏜살같이 도망을 다녔지만,

결국 마당의 평화를 위해 따식이는 낮이고 밤이고 묶여 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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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다른 동물들을 들여오기 전에) 그는 개 키우는 일에 무척 적극적이었다.

가끔 마당에선 멈춰! 기다려! 하는 그의 소리가 들렸고,

공 던지기 놀이를 하며 놀아주기도 했다.

정기적으로 산책도 했다.

 

며칠 동안 집을 비우고 돌아오는 날이면 따식이는 아빠 구두에 오줌을 갈겼고,

남편은 그런 그의 머리를 한참 쓰다듬었다.

그들만의, 반가움의 표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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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겨울, 봄이 차례로 지나면서

우리집엔 개 한 마리, 토끼 한 마리, 닭 한 마리, 병아리 여섯 마리가 생겼다.

 

집 나간 토끼를 여러 번 찾아 오고,

여섯 마리의 닭 중 한 마리만 살아남고,

달걀 서른 다섯 개를 부화시켜 네 마리를 얻는 동안

따식이는 혼자서 묵묵히 자라났다.

그는 마치 어린 동생들 먼저 보살펴야 하는 부모의 처지를 이해해주는 장남같았다.

울거나 보채지도 않았다.

그런 그는 늘 든든하고 믿음직스러운 존재였다.

 

그런데 요즘은 영 마음이 쓰였다.

날이 더워져서 그런지 시기적으로 그럴 때가 온 건지,

털갈이를 하느라 덕지덕지 누더기 같은 몸을 힘없이 바닥에 깔고 누워

주방에서 달그락 거리는 나를 바라보거나,

열정 없이 제 생식기를 핥는 그를 보고 있으면 가슴이 뜨끔했다.

그때마다 "사랑받지 못하는 개들은 낯선 사람이 와도 짖지 않는다."는

시어머니 목소리가 마음을 어지럽혔다.

"사람도, 개도 각자의 개성이 있다.

그리고 대부분은 성장 과정이 잘못되어 못된 성질을 가지게된 것이다."고 씌여있던

한 철학 에세이의 글귀도 떠올랐다.

 

어쩌면 우린 따식이를 방치하는 것은 아닐까.

밥을 주고 물을 주는게 전부가 아닌데...

 

처음엔 애완견을 갖는다면 영리한 개였으면 했다.

따식이가 순종 진돗개냐 아니냐는

동네 동물병원 원장님의 한 마디, "똥개여~!"로 일단락 되었지만

나에게 그건 더이상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즐겁고 행복하게 살기.

서울을 떠난 우리들의 신념이었다.

그건 우리는 물론, 아이도, 따식이도, 닭도, 토끼도 마찬가지였다.

따식이가 좋아할 만한 일은 무얼까?

당연히 목줄을 풀고 힘껏 달리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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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기상 관측 이래 가장 더운 5월의 날씨였다던 5월 말,

정말 오랜만에 따식이와 산책을 나섰다.

 

집 밖으로 나오자 마자 왼쪽 뒷다리를 들고 영역 표시에 나서는 따식이.

이젠 정말 다 컸구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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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 가자고 아빠 몸을 칭칭 감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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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집 앞에 있는 널따란 잔디밭,

드디어, 네 목을 옥죄고 있던 줄을 풀어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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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달린다.

힘차게 달린다.

내 마음도 뻥 뚫리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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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도 내달려서 숨을 헐떡거리는 따식이,

그런 따식이가 흐뭇한 따식이 아빠,

강아지가 개가 되는 동안 저만큼 훌쩍 자란 딸.

 

그래, 이거였지.

내가 서울을 떠나온 이유는.

 

귀촌 10개월 차.

얻은 것도 잃은 것도 사람이라는 결론을 내리고서

과연 나에게 시골살이가 가당키나 한 일이었나 돌아보는 중이었다.

마침 친하게 지내던 동네 어르신 부부로부터 마음의 상처를 입고 온갖 번뇌에 시달렸다.

감정이 북받칠 땐 서울로, 도시로 돌아가는 상상을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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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저들의 뒷모습을 보는 순간 뒷머리가 시원해지는 기분이었다.

이 공기, 바람, 그리고 따식이.

내가 바라는 건 이렇게 작고 소소한 것들에 집중하는 삶이었다.

 

이들 없이 난 과연 행복하다고 느낄까.

아닐 것이다.

아마 금방 또 다른 핑계를 대고 다른 곳을 찾아갈 것이다.

 

내가 사는 곳을 천국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그건 그 누구도, 무엇도 아닌 내 마음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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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돌아온 뒷마당.

앞으론 출장을 가야할 때만 빼고 엄마 아빠랑 산책을 나가자.

훈련을 하려는 게 아니라, 너의 행복을, 아니 우리들의 행복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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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아침 따식이 물통에 물을 가득 부어준다.

텃밭 가꾸기, 동물 돌보는 일을 전적으로 담당하고 있는 남편 대신

내가 유일하게 마음을 쓰는 일이다.

"내가 너 때문에 이게 무슨 고생이냐!"

가끔 볼멘 소리를 하며 시골 어른들의 반어법도 흉내내본다.

 

인생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시골 살이는 더욱 그렇다.

 

텃밭에 맨 처음 심은 감자는 싹 하나 틔우지 못했고,

살아 남은 닭보다 땅에 묻은 닭들이 더 많다.

풀이 무성해질 때마다, 닭이 닭장을 빠져나올 때마다 이웃들의 참견도 늘어만 간다.

택배 아저씨는 마당 한가운데 박스를 던져 놓고 사라져 버리고,

온갖 벌레들과 사투를 벌여야 하며,

경운기가 후진하다 나와 아이가 앉아 있는 좌석을 밀고 들어오기도 한다.

어른들도, 아이들도 시도때도 없이 우리집 마당에 서 있다.

출판사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을 때까지 생계 걱정도 여전할 것이다.

 

따식이가 내 맨다리를 핥는다.

물을 마시는 따식이 머리를 쓰다듬는다.

그가 서 있는 뒤편에는 야트막한 산이 있다.

처음봤을 때와 똑같이, 요즘도 그 푸른 빛을 보고 있으면,

나무들 사이로 꽁지가 기다란 새가 날아갈 때면,

오늘 하루가 시작된 것이 감사하다.

최선을 다해, 주어진 시간을 살아내고 싶어진다.

 

이쯤 되면 어쩔 수가 없다.

일단 계속 살아보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할 밖에.

아침마다 따식이에게 물 주기를 계속하는 건

이 순간의 평화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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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2012년 첫째 아이 임신, 출산과 함께 경력단절녀-프리랜서-계약직 워킹맘-전업주부라는 다양한 정체성을 경험 중이다. 남편과 1인 출판사를 꾸리고 서울을 떠나 화순에 거주했던 2년 간 한겨레 베이비트리에 ‘화순댁의 산골마을 육아 일기’를 연재했다. ‘아이가 자란다 어른도 자란다’를 통해 아이와 부모가 함께 성장하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2017년 겨울, 세 아이 엄마가 된다. 저서로는 <호주와 나 때때로 남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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