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 8개월, 두 아이 엄마가 될 준비 화순댁의산골마을육아일기

"슬슬 조리원이랑 알아봐야 할 텐데..."

 

저녁 식사 뒤 수박을 먹으며 남편이 무심코 건넨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달력을 보니 임신 29주, 8개월에 접어들었다.

아이와 한 몸에서 부대낄 날도 고작 두 달 남짓 남은 것이다.

그래, 조리원도 알아보고 아니, 그 전에 어디서 낳을지부터 정해야지.

애써 미뤄왔던 출산 준비를 더이상 미룰 수 없는 시기가 왔다.

 

처음과 두번째의 차이는 이런 건가 보다.

가슴 밑까지 아이가 차 올라오고 내 소화력이 떨어질 때,

기미가 짙어지고, 분비물이 늘어나고, 조금만 오래 걸어도 헉헉할 때,

달력을 확인하지 않아도 몸이 알아서 아이가 얼만큼 컸는지 감지하게 된다.


 
큰 아이 임신 때는 모든 게 처음 겪는 일들이라 마냥 신나고 즐겁기만 했다.

부지런히 맛있는 음식을 찾아 먹었고, 아이와 태담을 나누고,

책을 읽고, 음악을 들으며 산책을 했다.

임신 5개월 무렵부터는 일을 그만두고 남편과 집에서 글만 썼다.

그의 철저한 보호와 배려 속에 나와 아기, 그리고 일에만 집중할 수 있었던,

지금 생각하면 다시 없을 꿈 같은 시간이었다.

 

둘째를 임신하고 나서도 얼마간은, 이번에도 그럴 거라 막연하게 기대했던 것 같다.

출산 전, 두번째 책을 출간하는 일도 전혀 무리가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지난 8개월 간 도대체 뭘 했나 떠올려보면 우울하기 짝이 없다.

 

임신 초에는 첫 책 마무리하고 출간하느라 나를 돌볼 새가 없었고,

이제 좀 일상으로 돌아오려나 할 무렵, 큰 아이가 수술을 하는 바람에

전에 없던 깊은 침체기에 빠져들었다.

봄꽃들이 세상을 밝게 물들일 무렵, 이제 정말 집중하자 마음을 먹었는데

세월호 사건이 일어나면서 내 마음은 하릴없이 부유중이다.

 

이런 엄마의 타는 속은 모르고, 18개월인 아이는 요즘 유난히 엄마만 찾는다.

아빠가 돌봐주는 시간인데도 부엌에 있거나 책상에 앉아 있는 내 주변을 서성인다.

말을 하고 의사표현이 늘어나면서 아이와 협상을 해야 하는 일도 늘어만 간다.

한 두번 설득해서 효과가 있으면 괜찮지만, 그렇지 않을 땐 막막하다.

아이 하나를 돌보며 일하는 것도 벅찬데 과연 둘째가 태어나면 어떻게 될까...

하, 상상만 해도 무시무시하다.

 

오늘 새벽.

평소 같았으면 뭐라도 생산적인 일을 해야 한단 생각에 골머리를 앓을 시간.

나 자신과 독대를 청했다.

그리고 나를 불행하게 했던 것들과 정면 대결을 펼쳤다.

내가 마주한 건 '일'에 대한 욕심, 도태되는 데 대한 두려움이었다.

 

인정하기 싫었던 건, 현실적으로 아이 출산 전에 책을 출간하는 것이 불가능하는 거였다.

그래서 업무 일지로 쓰는 달력에 수정테이프 자국이 늘어날 때마다 화가 솟구쳤고,

읽어야 할 책, 일이 쌓일 때마다 나에게도 아이에게도 너그럽지 못했다.

내 개인적인 성취나 만족감도 문제지만,

출판사 입장에서 적극적으로 글을 생산해내는 저자가 나 뿐이라는 것이 더 큰 부담이었다.


남편이 백팩을 둘러메고 출장을 갈 때마다

버스 안에서, 지하철에서 마음껏 책도 읽고, 사람도 만날 그가 부러웠다.
출판사 외연을 확대해 보려고 애를 쓰는 그가 안쓰럽다가도,

그는 이렇게 점점 성장해 가는데 나는 제자리에 머물러 있나 싶어

마냥 기쁘지만도 않았었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이렇게 내 마음을, 막막함의 정체를 제대로 들여보고 나니 마음은 한결 편해졌다.

업무 일지 달력에 다시 한 번 수정테이프 세례를 쏟아 부은 다음,

현실적으로 가능한 독서, 원고 수정 계획을 써 넣었다.

아이가 깨기 전, 새로 태어날 아이가 쓸 것과 큰 아이가 쓸 옷서랍을 정리했다.

책상 위에 쌓아 놓은 읽어야 할 책들을 치우고, 읽고 싶은 책들을 늘어놓았다.

세월호 사건을 겪으며 고민했던 엄마들과의 제주도 여행도 예정대로 다녀오기로 했다.

다음주 내로 출산할 병원과 조리원도 알아볼 참이다.

 


내가 할 수 있는, 해야 하는 작은 일에 정성을, 최선을 다하는 것.

며칠 전 포스팅에 인용한 뒤, 내내 마음속에 머물러 있는 중용 23장의 구절이다.

 

당분간, 어쩌면 꽤 오랫동안 나혼자 두 아이를 돌보며,

잠잘 시간을 아껴가며 일을 해야 하게 되겠지.

그러나 지금 나에게 가장 중요한 우선 순위는 두 아이들이다.

그냥 내가 해야 하는 일, 좋고 싫고의 문제가 아니라, 아무런 목적도 이유도,

심지어 깊이 생각할 필요도 없이 무작정 해야만 하는 일이다.

그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엄마로서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하긴, 제 할일을 제대로 안하고 못해서 세상이 이 사단이 아니던가.

 

확실히 큰 아이를 임신했을 때와 지금은 많은 것이 다르다.

그때 내 마음은 분홍색 장밋빛이었다면 지금은 핏빛에 가까운 진한 붉은 색이다.

그땐 좋은 생각만 하고 싶었는데

지금은 아이에게 모든 것을 가감없이 보여주고, 느끼게 하고 싶다.

나의 번민과 고뇌와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아이의 심성을 강하게 해 주리라 믿는다.

 
이 여름이 지나고 서늘한 바람이 불 때 쯤이면,

난 좀 더 어른스러워져 있을까...


내 곁에 있는 사랑하는 이들을 생각하며 괜히 한 번 웃어본다.

이들을 지키기 위해선 내가, 엄마가 먼저 강해져야 해, 스스로 되뇌이게 되는 것.

아마 처음과 두번째의 차이는 이런 건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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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2012년 첫째 아이 임신, 출산과 함께 경력단절녀-프리랜서-계약직 워킹맘-전업주부라는 다양한 정체성을 경험 중이다. 남편과 1인 출판사를 꾸리고 서울을 떠나 화순에 거주했던 2년 간 한겨레 베이비트리에 ‘화순댁의 산골마을 육아 일기’를 연재했다. ‘아이가 자란다 어른도 자란다’를 통해 아이와 부모가 함께 성장하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2017년 겨울, 세 아이 엄마가 된다. 저서로는 <호주와 나 때때로 남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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