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시대, 내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화순댁의산골마을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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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 지 30년도 넘은 시댁 아파트 앞 골목에는 매일 노점상이 열린다.

하루 종일 같은 자리에서 상추나 오이, 각종 과일, 식물뿌리 같은 걸 파는 노인들,

그 주변에서 파지를 챙기는 노인들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짠한' 공간이기도 하다.

 

그 길에서 배가 볼록한 임신부와 아장아장 걷는 아이는 언제라도 관심 대상인데,

급기야 오늘은 한 아저씨가 "예쁘다"며 아이 손에 천 원을 쥐어주셨다.

낡은 모자, 낡은 옷, 낡은 운동화 차림의 아저씨가

퉁퉁 부은 거친 손으로 다 헤진 지갑을 열었을 때, 코끝이 멍했다.

얇은 지갑 안에는 고작 천 원짜리 몇 장뿐이었기 때문이다.

 

그 짧은 순간 전해진, 자식을 키우는 이들의 연대와 동질감.

어린 아이를 키우느라 애쓴다, 또 한 생명이 태어나면 더 애쓰겠다는

격려와 애틋함에 마음이 먹먹해진 나는 한동안 멍하니 땅만 보고 걸었다.

 

엊그제 베이비트리에는 세월호 참사로 인한

임신부 정신건강에 대한 내용의 기사가 소개됐다.

(http://babytree.hani.co.kr/?mid=media&category=7742&document_srl=159047)

 

나도 심각한 우울증 증상을 겪고 있는 것은 아닌지 주의깊게 읽었지만

시간이 날 때마다 습관적으로 뉴스를 들춰보게 되는 건 멈출 수가 없다.

아무리 괴롭고 분통이 터져 눈물만 나고, 가슴이 내려 앉아도,

내 뱃속의 귀한 아이처럼, 그 아이들도 꼭 내 아이들 같아서다.

그거라도 하지 않으면 세월호 희생자들과 유가족들에 대한 미안함과 죄의식을

어찌 갚으랴 하는 마음 때문이다.

 
세월호 사건과 관련한 대통령의 일련의 행보에 치가 떨리는 이유는

온 나라가 함께 슬퍼하고 고통을 나누며 힘이 되어주려고 안간힘을 쓰는데,

멀쩡히 살아 있던 수백 명이, 살릴 수 있었던 생명들이

우리 눈 앞에서 말도 안 되게 죽어갔는데,

그에게선 진심어린 감정의 동질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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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첫 아이를 임신하면서부터 지금까지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명제다.

 

아이 이름을 '밝은 달빛'이란 뜻으로 지은 건

세상의 어두운 면, 고독한 면을 외면하지 않기를,

어둠과 절망 속에서도 끝까지 희망을 잃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공부를 잘 하고, 돈을 많이 버는 것보다

설사 손해를 보더라도 착하게, 정의롭게 살라고 가르쳐야 한다,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모인 우리부터 똑바로, 올바르게 살아야 한다, 싶었다.

무모하다시피 귀촌을 한 것도 생각한 것을 실천하자는 당위성이 컸다.

 

그런데 며칠 사이 공개된 숨진 학생들이 촬영한 동영상을 보면

비통하다 못해 심장이 옥죄어 든다.

 

선실에 있던 아이들은 선생님을, 갑판에 있는 다른 친구들을 걱정하고 있었다.

움직이지 말라는 안내 방송에 "네!"하고 대답하며,

오직 세상에 대한, 어른들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던

말 잘 듣는 '착한' 아이들이었다.

 

내 아이가 그렇게 자라주었으면 하는 것처럼

애써 밝은 목소리로 친구들을 격려하며 끝까지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런 아이들이 하나 둘 차가운 주검이 되어 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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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대 때는 어서 결혼하고 싶었다.

무슨 근거였는지는 몰라도, 그때쯤이면

굴곡 없는 평안한 삶이 열릴 거라 기대했던 것 같다.

 

하지만 결혼과 함께 내가 맞닥뜨린 것은 가혹한 혼돈의 세계였다.

임신-출산-휴직 전직 혹은 퇴직-육아.

결혼한 여자로서 선택해야 할 일들은 매일 같이 내 어깨를 짓눌렀다. 


우린 둘 다 아이를 원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사회는 아이를 낳고 기르기 적합한 곳이 아니었다.

국가와 정부는 이만 달러 시대에 대한 축포를 터트리며 자축하는데 여념이 없없지만

내가 보기에는 아무렇지 않게 사람을 죽이는 무시무시한 나라였다.

 

자식들에게 부담을 주기 싫어 병든 노인들이 자살하고,

학교에서 따돌림과 폭행을 당한 청소년들이 자살하고,

대학생들은 학비와 생활비를 벌다 지쳐 자살하고,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들이 분해서 자살을 해도,

그럴수록 효율과 경제성장만이 답이라고 호도하며

자연과 생명을 파괴하고, 기업을, 사람을 팔아가며 제 이득만 챙기는 기득권의 국가.

 

굵직한 사건 사고의 당사자는 아니었지만

한강을 건널 때면 다리가 무너지지 않을지,

터널을 지날 때는 터널이 무너지지 않을지 무서웠다.

이사갈 집을 고를 때도 소방서와 경찰서가 가까이 있는지부터 살폈다.

아파트 주차장에서 싸우는 사람들을 봐도 무시하고 지나쳤다.

누가 어디서 흉기를 들고 난동부릴지 모르니까.

난 이미 우리 사회를, 사람들을 믿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굳이 아이를 낳아야 할까?

내 아이는 이 사회에서 정상적으로,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아무리 노력해도 아름다운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다.

결혼하자마자 장기 여행을 떠난 것도 이런 현실에서 잠시나마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지금, 둘째 출산을 앞두고 세월호 사건을 겪으며

난 다시 그때와 똑같은 질문을 던진다.

내 아이는 이 사회에서 정상적으로,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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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세상은 지금도 아이들을 길러내기 좋은 곳이 아니다.

아니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되고 있다.

희망을 운운하는 것이 사치로 들릴 정도로 곳곳이 상처 투성이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내 아이들에게 공부를 잘 하고 돈을 많이 버는 것보다

손해를 보더라도 착하게, 정의롭게 살라고 가르쳐야 한다, 생각한다.

하루에 고작 몇천 원을 벌더라도 기꺼이 마음을 나눌 줄 아는 '착한' 어른이 되라고,

불의에 맞선 분노와 슬픔과 상실감이 희망까지 잡아먹게 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칠 것이다.

힘 없고, 약하고, 괴로워 하고, 절망하는 이들의 손을 기꺼이 잡아주라고,

네가 넘어졌을 때도 너를 안아주고 일으켜줄 이들이 항상 있을 거라고 말해줄 것이다.

 

어제는 우리 부부가 만난 지 13주년 되는 기념일이었다.

남편은 세월호 문제에 관한 대책을 마련해보자는 한 시민 모임에 참석하러

축하의 말 한 마디 없이 서울로 갔고,

집에 남은 나는 무어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이 글을 썼다.

저 아이들을, 꽃같이 어여쁜 저 아이들을 오래오래 기억하며

병든 사회를 고쳐가는 데 힘을 보태는 것이 살아있는 나의 의무이고,

이 땅의 아이들에게 떳떳할 수 있는 길이라고 믿으며...

 

그리고 아빠를 기다리며 잠든 아이에게,

뱃속의 아이에게 시를 읽어주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너희들을 사지로 내모는 것 같은지,

가슴이 미어지는지 모르겠다.

 


<딸을 위한 시 - 마종하>

 

한 시인이 어린 딸에게 말했다.

착한 사람도 공부 잘하는 사람도 다 말고

관찰을 잘 하는 사람이 되라고.

겨울 창가의 양파는 어떻게 뿌리를 내리며

사람들은 언제 웃고 언제 우는 지를

오늘은 학교에 가서

도시락을 안 싸온 아이가 누구인지 살펴서

함께 나누어 먹기도 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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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2012년 첫째 아이 임신, 출산과 함께 경력단절녀-프리랜서-계약직 워킹맘-전업주부라는 다양한 정체성을 경험 중이다. 남편과 1인 출판사를 꾸리고 서울을 떠나 화순에 거주했던 2년 간 한겨레 베이비트리에 ‘화순댁의 산골마을 육아 일기’를 연재했다. ‘아이가 자란다 어른도 자란다’를 통해 아이와 부모가 함께 성장하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2017년 겨울, 세 아이 엄마가 된다. 저서로는 <호주와 나 때때로 남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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