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 거짓말 생생육아 칼럼







얼마 전 다엘이 색다른 양상의 거짓말을 선보였다.
로션 뚜껑이 안 따진다고 진지한 표정으로 들고 온 것이다.
내가 열어보고는 ‘금방 따지는데 왜 그러냐’고 했더니
얄미운 표정으로 웃는다.
“거짓말인데! 헤헤헤~”

 

황당했다.
아니 잠시 머리가 띵했다.
유치한 건 둘째치고
유치한 거짓말을 이렇게 천연덕스럽게 하는 어린이가
정녕 그토록 순박했던 다엘이란 말인가.

 

지금까지 다엘은 자신이 불리한 상황에 처했을 때
뻔히 눈에 보이는 거짓말을 한 적은 있으나
별 문제 되지 않을 정도였다.
아이들의 거짓말은 그 자체를 문제 삼기보다는,
‘솔직한 게 더 이득’이라는 교훈을 간접적으로 알려줘야 한단다.
지금껏 이 원칙에 따랐고 다엘은 내 손 안에 있었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달라졌다.
다엘이 재미를 추구하는 새로운 거짓말의 세계에 입성한 것이다.
지인이 말하기를 고지식한 다엘이 성장했다는 증거이므로
축하할 일이라고 했다.
하지만 여전히 고지식한 세계에 머물고 있는 나로서는
‘축하는 x뿔’이라는 심정이 되었다.

 

내 인생에서 남을 놀리는 거짓말의 수용한도는
대체로 일 년 중 하루, 만우절의 거짓말이다.

 

고등학교에서의 교직 생활 중 만우절엔 소소한 일화들이 생기곤 했다.
남학생들의 장난은 그다지 섬세하지 못해서 크게 성공한 적이 별로 없었다.
그러던 어느 만우절, 내가 제대로 속아 넘어 간 적이 있다.

 

수업하러 교실에 들어갔는데 아이들이 뒤에 잔뜩 몰려 있고
두 녀석이 교실 바닥에 나뒹굴며 싸우고 있었다.
남학생들의 육탄전에 대처하는 교사들의 불문율은,
일단 강하게 압박하여 두 아이를 떼어놓는 것이다.

 

이에 따라 최대한 강력하게 화를 내며,
둘이 떨어질 것을 천둥 같은 목소리로 고래고래 명하였다.
내가 그렇게 화내는 걸 처음 본 아이들은
놀란 토끼처럼 모두 빛의 속도로 자리에 들어가 앉았다.
교실이 싸한 분위기가 되어 무거운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회장 아이가 주춤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선생님, 오늘이 만우절이라서…
아이들이 장난으로 싸우는 흉내를 낸 건데요...”

 

헉!
절체절명의 순간, 오만 가지 생각이 파노라마처럼 빠르게 지나갔다.
분명했던 건,
'여기서 내가 무너지면 완전히 똥 된다'는 냉엄한 현실이었다.
그러자 한 인간이 낼 수 있는 최대의 생존본능이 내 안에서 솟아올랐다.

 

나는 분노한 목소리로 더욱 거품을 물기 시작했다.
“그걸 말이라고 하냐? 수업 시작하고 나서도 뒤에서 뒹굴고 말이야!
수행평가 점수 다 깎아버리고 반드시 이거 문제 삼겠어. 어쩌고저쩌고~”
아... 말 하면서도 정말 말도 안 되는 얘기였다.
거기서 수행평가 얘기가 왜 나온단 말인가.

 

그러나 순진한 아이들은 고개를 푹 숙이고
숨소리도 내지 못한 채 앉아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살벌한 분위기로 수업을 진행하다가
칠판에 영어 문장 하나를 날려 쓰고는 한 명을 지적했다.
“너, 이거 해석해봐!”
회장 아이가 일어나서 소심한 목소리로 해석을 시작했다.
“화난 척 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그 순간 참았던 나의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러자 얼어붙었던 아이들의 긴장이 순식간에 탄식으로 바뀌면서
여기저기서 안도의 한숨과 서로를 위로하는 목소리가 넘쳐났다.

 

“야~ 난 진짠 줄 알고 죽는 줄 알았다.”
“어휴~ 아까 선생님이 혼자 피식피식 웃더라고!
우리를 비웃는 건 줄 알고 얼마나 무서웠는지 아냐?”

 

예전 고등학생들이 다 그렇게 순진했는지 이제는 기억이 잘 안 난다.
어쨌든 그 반 아이들과 나는 우호적인 관계를 맺으며 한 해를 아주 잘 보냈다.
당시 바닥에 나뒹구는 탁월한 싸움 연기를 선보였던 학생은
지금은 어엿한 직장인이 되어 가끔 연락을 해온다.

 

승기사진1.jpg » 만우절 메소드 연기의 달인이었던 정승기군이 최근에 보내온 사진.

 

만우절에 내게 당했던 학생들은
세상에 믿을 사람 없다는 걸 체감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후 맺은 신뢰관계가 지금까지 이어지는 걸 보면
유머와 진심으로 서로를 대하는 것만이 살 길임을 느낀다.

 

재미있는 일화로 남은 만우절 기억과는 달리
다엘의 거짓말에 대한 내 마음 속 불편함은
아들이 더 이상 품 안에 들어오는 어린아이가 아니라는 자각 때문이다.
이젠 능청스런 일을 꾸며내기도 할 아이 앞에서
나의 정신줄을 챙겨야 한다.

 

다엘의 거짓말 사건은 매우 사소했지만
내 육아인생이 새로운 단계로 넘어가고 있다는 신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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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딸이 뇌종양으로 숨진 후 다시 비혼이 되었다. 이후 아들을 입양하여 달콤쌉싸름한 육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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