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마를 타고 손가락을 내지른다 무위태극선 교실

  민웅기의 무위태극선/스스로 그러함을 도울 뿐/좌우야마분종 左右野馬分鬃  

 

야마분종野馬分鬃은 야생마를 몰고 가는 기수가 호쾌하게 말의 갈기를 양쪽으로 가르고 달리는 모습을 형상화한 초식이다. 오른손을 앞쪽 위로 쭉 뻗어 장심을 위로 향해 일지一指를 뻗고, 동시에 오른발에 체중을 실으며 앞으로 나아가 무릎을 굽힌 상태에서 왼손은 왼쪽 무릎 위로 장심을 아래로 향해 일지一指를 내려 뻗는다. 이것을 우야마분종右野馬分鬃이라 한다.

이어서 몸이 약간 오른쪽으로 돌면서 왼발이 앞으로 한 발 체중을 실으면서 무릎을 굽혀나가며, 동시에 왼손을 앞으로 뻗어 장심이 위를 향해 일지一指를 뻗고, 오른손을 장심이 아래로 향하도록 하여 뒤로 일지一指를 뻗는 것을 좌야마분종左野馬分鬃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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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분종野馬分鬃의 초식을 행할 때 수련자는 왼쪽과 오른쪽을 번갈아가며, 한 번은 합하고 한 번은 개하며, 한 번은 개하고 다시 한 번은 합하는데, 이렇게 합의 자세에서 기를 응축했다가 개의 자세로 전환하는 순간 경을 발하는 원리를 충실히 알고 행해야 한다.

 

야마野馬는 야생의 말을 뜻한다. 집에서 기르는 말이 아니다. 집에서 기르는 말은 야생마의 본성을 이미 상실했다. 본래 타고난 본성은 사람에게나 동물에게나 다 있는 법이다. 그런데 이러한 본성이 가축의 경우처럼 특정 목적을 위해 길들여지게 되면 사라지거나 변하기 마련이다. 본래 타고난 자연성을 잃어버리게 되거나 왜곡되게 된다는 뜻이다.

자연의 도로부터 품수 받은 본성이란 바로 도의 내재성을 의미한다. 만유만생은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본성을 내재하고 있다. 그 본성이 바로 도의 궤칙을 뜻하는 것이고, 그 본성이 있으므로 도의 궤칙으로부터 일탈하지 않는다. 그러하므로 야생마는 본래 품수 받은 자연의 도를 원형 그대로 잘 간직하고 있는 경우가 된다.

 

야마분종野馬分鬃의 손의 모양은 일지一指이다. 일지로 모았다가 일지로 내지른다. 손가락이란 무엇이던가? 손가락()은 무엇인가를 가리킬 때 쓴다. 가리키는 대상은 실재()가 된다. 손가락은 실재인 대상을 지시하나, 그것이 곧바로 실재인 것은 아니다. 그 실재를 반영하는 개념이고 이름()일 뿐이다. 장자는 이름()실의 손님(實之賓)’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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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월指月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다. 달이 실재實在인 것이지, 손가락이 바로 그 실재인 것은 아니다. 손가락은 다만 그 실재를 지시하고 있는 개념에 불과하다. 그런데 사람들은 손가락을 달로 착오하기 십상이다. 개념을 실재實在로 착오한다. 야마분종의 일지一指는 일자로 펴진 한 손가락이다. ‘한 손가락이란 무엇인가?

 

[장자, 제물론]천지가 하나의 손가락이요(天地一指), 만물이 하나의 말이다(萬物一馬).” 라고 하는데, 바로 앞에서 말한 그 말()이고 그 손가락()이다. 말에는 백마도 있고 흑마도 있다. 저것도 있고 이것도 있고(彼此), 나도 있고 나 아닌 것도 있다(自他). 대상도 있고 나도 있으며(物我), 옳기도 하고 옳지 않기도 하다(是非). 그렇게 백마와 흑마, 피차와 물아와 시비를 따라 손가락질을 하다 보면, 만유만생은 다 제각각이다. 그 제각각인 다자多者의 물상物象안에서 시시비비를 가리는 분별하는 마음만 분망하고 다채로운 것이다.

 

그래서 장자는 모든 시비와 피차와 물아와 자타가 하나의 중심축, 도의 지도리(道樞)’로 들고난다고 했고, 그렇게 도의 지도리로 들고나는 그 자리를 일컬어 환중環中이라 했다. 만물이 제각각인 것은 본래 하나의 쓰임새가 있어서 그러한 것이다. 그렇게 보면 만물은 옳지 않음이 없고, 모두가 다 도가운데 통하여서 하나가 된다. 그것이 일어나는 자리가 환중環中이고 도의 지도리(道樞)이다.

도의 지도리에 서면 모든 사물은 본래 그 모양 그대로 다 하나로 들어왔다가, 다시 나가서 각각의 모양과 색깔로 현시顯示한다. 도의 중심축, 즉 도의 한 가운데는 어떤 모양도 색깔도 향기도 없다. 어떤 시비是非도 아타我他도 물아物我도 피차彼此도 없다. 거기에는 모든 물상物象의 차이를 초탈함만 있을 뿐이다. 오직 무심한 마음만 있을 따름이다. 물상을 지시하는 손가락의 다양함도 없고, 오직 일지一指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일지란 도의 지도리를 지시하는 손가락이 된다. 그런데 환중의 자리에서는 일지조차도 사라진 텅 빈 무명無名의 자리, 혼돈()의 자리, 그대로 하나()’인 자리만이 존재하게 된다.

그 하나인 자리, 즉 일자가 다자로 현시함이 도의 덕이고 도의 쓰임새()이다. 그것이 장자가 말한 물화物化이다. 망아忘我가 물화物化가 되었다. 공즉시색空卽是色이다. 그러한 도의 쓰임이 끝나면, 모든 만물은 본래의 일자로 다시 은적隱迹해 들어온다. 그 물의 이름()이 다하면 본연의 뿌리로 되돌아온다.

같은 자리에서 보면 똑같기 때문에 천지가 일지一指이고, 만물이 일마一馬가 되는것이다. 그 같은 자리가 도의 지도리인 환중環中이다. 그러므로 만물의 본성이 그대로 도의 본성을 닮았다. 둘이 아니다(不二). ‘하나인 것이다. 일지가 그것을 지시함이다.

 

그러므로 야마분종은 야생마의 순수한 본성을 따라 말갈기를 나누어 달리는 수련자의 호연지기浩然之氣를 보여주는 수련이 된다. 야마분종의 일지는 도의 지도리를 지시하는 한 손가락이다. 도의 지극한 자리, 수련자의 마음의 중심자리, 그 자리가 일지의 자리이다.

일지는 수련자의 초발심을 지시한다. 일지一指는 일기一氣이며 일심一心이다. 일심이니 무심無心이고, 무심이니 정심淨心이고, 정심이니 명심明心이 되고, 명심이니 지심智心이다. 이 지혜의 마음이 곧 항심恒心이니 상주불변常住不變하는 깨달음의 본성本性이 된다.

 

이렇게 하나를 얻으면 모든 것을 얻는다. 불가에서 말하는 득일무애得一無碍의 경계가 된다. 도의 지도리에 서면 득일무애得一無碍한다. 근본지를 얻은 까닭이다.

 

득일무애得一無碍하니,

둥근 구슬이 모난 것이 없이 잘 굴러가는 것 같으며(如圓珠無方),

밝은 거울이 단박에 비추는 것과 같으며(如明鏡頓照),

허공이 간격이 없는 것 같으며(如虛空無隔),

메아리가 함이 없는 것같으며(如響無爲),

그림자가 걸림이 없는 것 같으며(如影無碍),

변화된 사람이 나는 바와 같다(如化人所生).

 

걸림이 없어서 이룸도 없고, 무너짐도 없고, 출몰이 없어서 항상 스스로 그러하다(自然)’. 이와 같은 경계에서 성인도 만 가지 것의 스스로 그러함(自然)’을 도울 따름이다. 그 스스로 그러함 위에 감히 무엇을 한다고 하지 않는다.”

 

성인은 바라지 않음을 바라고,

얻기 어려운 재화를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배우지 아니함을 배우고

뭇사람들이 지나치는 본바탕으로 돌아간다.

이리하여

만 가지 것의 스스로 그러함을 돕고

감히 무엇을 한다고 하지 않는다.

 

是以聖人欲不欲, 시이성인욕불욕

不貴難得之貨, 불귀난득지화

學不學, 학불학

復衆人之所過, 복중인지소과

以輔萬物之自然而不敢爲 이보만물지자연이불감위 (64)

 

욕불욕欲不欲학불학學不學의 의미를 명료하게 이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이란 생명체가 자기 스스로를 유지하고 재생산하는 하나의 기제이다. 이란 그것을 통해서 생명의 가치를 발현하며 유지하는 수단이다.

만약 욕이 없다면 생명체生命體가 어떻게 살아 있으라는 하늘의 명을 받들어 모실 수가 있을까? 그러므로 욕한다는 것은 도가 생명을 지키고 유지하며 번성하라는 명령을 충실히 이행하는 수단이 된다. 그렇게 되면 욕은 매우 자연스러운 도의 궤칙이 된다. 그런데 욕이 문제가 된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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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러한 주제를 논하면서 다시 한 번 노자의 언어사용과 사유방식을 짚어보지 않을 수 없다. 노자는 처음부터 늘 그러하듯이 한편으로는 언어쓰기를 저어해왔고,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그 언어적 개념의 고정화(혹은 고착화)를 경계해왔다.

그것이 도가도 비상도道可道, 非常道, 명가명 비상명名可名, 非常名의 경문에서 매우 명확히 드러나있다. 도를 말로 표현해서 도라고 할 수는 있다. 그렇게 언어쓰기를 함으로써 도를 설명하고 가르칠 수는 있으나, 그러한 언어적 글쓰기를 통해 드러난 도(可道)는 이미 상도는 아니다(非常道). 그리고 개념을 동원하는 것이 유용함으로 그 언어적 개념()을 사용하기는 하지만(可名), 그 개념이 항상된 개념으로써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非常名).

 

도 마찬가지다. 욕이 개체의 자기보존을 위해 필요한 만큼 사용되는 한에서야 그 욕은 당연히 정당성을 갖는다. 그러나 그 한계를 넘어서는 욕은 이미 전체의 도를 위배한다. 전체의 도를 위배하므로, 그 개체를 위해서도 결코 좋다고 할 수 없다. 이미 자연의 순리에서 벗어나게 되면, 그것은 더 이상 허용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는 셈이 된다. 그러므로 욕불욕欲不欲불욕不欲하라고 하는 것으로 읽는다.

 

같은 논리로 학불학學不學을 이해할 수 있다. 노자가 학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학은 필요한 만큼 배워서 쓰는 것으로 족하다. 노자의 경문 중에 배움은 배울수록 더 보태어지고, 도는 닦을수록 더 줄어든다.(爲學日益, 爲道日損)”는 말이 있다. 노자가 볼 때 학은 자꾸 쌓아가는 것이다. 알음알이를 쌓는 것이 학의 본질이다. 그렇기 때문에 학은 배울수록 명과 상을 쌓아가므로 오히려 그 학의 본래의 취지에서 멀어지게 되고, 자꾸 쌓다 보면 마음의 빈 공간이 줄어들게 되어 허무적적虛無寂寂한 도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노자는 도를 닦고 닦아, 덜고 덜어서, 텅 빈 무위의 지경에 이르도록(損之又損, 以至於無爲) 우리를 권면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렇게 무위의 지경에 이르게 되면 하지 못함이 없게 되니(無爲而無不爲. 48), 자연이 일부러 함이 없으면서도 이루지 못함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가 된다. ‘배우지 않음을 배운다(學不學)’는 노자적 언어는 그러므로 불언지교不言之敎처럼 읽어 불학지학不學之學의 의미가 된다.

 

처음엔 삯월세 방에 살기만 해도 좋을 것이라고 하다가, 다음에는 작더라도 내 집만 있으면 정말 좋겠다고 하다가, 그 다음엔 옆 동네 누구네 집만큼 되었으면 행복하겠다고 한다. 정작 그렇게 되어도 만족할 줄은 모른다. 이것저것 눈에 들어오는 것이 많으니, 욕망의 눈덩이 법칙에 빠져 참된 행복은 저만큼 달아나버린다. 그래서 노자가 배를 위하지, 눈을 위하지 말라(爲腹不爲目. 12)”고 당부한 것이다.

 

아이들이 자라나고 사업이 커져가고 배움도 많아지니,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의 상도 그만큼 커져가는 것 같다. 그럴 때는 다시 나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우리들이 살면서 지나쳐버리는 것들과 그것들의 소중함을 되돌아보아야 할 것 같다. 뭇 사람들이 지나치는 본바탕으로 되돌아가도록(復衆人之所過) 종용하고 있다.

 

이 순간 그저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자연성을 깨어있는 눈으로 바라보고, 다만 그 자연성을 도울 따름이지(以輔萬物之自然), 그 이상 뭔가를 감히해서는 안 된다(而不敢爲)는 노자의 말이 마음 한켠을 붙잡는다.

 

지난 가을에 산 아래쪽에 터를 닦다가, 문득 눈앞에 고라니 한 마리가 그림처럼 달리는 것을 보았다. 가을 하늘 아래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 같았다. 너무도 평화로운 모습에 그것이 몹시 생경한 풍경이라는 것도 잊었다. 잠시 후에 아랫마을 뒤 언덕배기에서 개 몇 마리가 나타나더니, 쏜살같이 그 고라니 뒤를 쫓아갔다. 웬걸 개들의 달리는 속도는 고라니의 그것에 비하면 느린 걸음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고라니는 순식간에 날을 듯이 달려 오른쪽 숲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수련장이 계곡가에 있어서 몇 번이나 고라니를 또 보곤 했다. 고라니는 내가 한가로이 수련하는 아침나절이나 저녁나절에도 개울 건너편에 나타나곤 했는데, 다소 신중하고 경계심이 많은 모습이었다. 몇 미터 떨어져 있지 않은데도 눈치를 못 채고 열심히 풀을 뜯어먹는데 마치 귀여운 아기사슴 같았다.

고라니의 눈은 참으로 맑다. 깨끗하다. 그 맑고 깨끗한 눈으로 두리번거리며 풀을 뜯는 풍경이 나를 일순간 아이로 만든다. 아이의 눈에 비친 숲 속의 풍경들은 아무리 보아도 새롭다. 무엇이 숲을 이렇게 아름답게 가꾸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신성한 느낌만 가득하다.

 

그렇게 신성함으로 동화되어 숲을 걷고 만지고 바라보는 것은 산아이의 마음을 충만케 한다. 솔잎의 향이 뺨을 어루듯 스치는 바람에 눈길이 머물고, 그곳에 계곡의 향기로운 물이 흐르고 있다. 생명을 키우는 어머니의 젖줄처럼 따스하다. 그 속에서 몇 종의 피리들과 다슬기들이 아기자기하다.

 

숲은 산아이의 마음속 깊은 곳에 충만한 영성을 불어넣어준다.

 

글 사진/민웅기(<태극권과 노자>저자,송계선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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