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를 제압하는 강한 기운으로 무위태극선 교실

민웅기의 무위태극선/천하는 신령스런 그릇/좌우타호식 左右打虎式   

 

하늘에 짝한다는 좌납천수식에 이어 나오는 것이 좌우타호식左右打虎式이다. 왼쪽의 하늘나무를 안고 있던 두 권이 허리가 돌아 나오면서 오른쪽으로 이동하여 가슴 앞쪽에서 수평을 이룬 뒤, 다시 좌회전하여 왼 가슴 앞쪽에서 두 권이 교차하여 감긴 팔이 풀려 나오는데, 오른 팔꿈치가 어깨 높이로 마치 오른 방향의 물체를 밀어내는 것처럼 뒤로 주욱 나오고, 왼손의 권은 왼쪽 어깨 앞쪽에 오게 된다. 이것이 우타호식이다.

다시 왼쪽으로 허리를 풀어 두 권이 돌아 나와 오른 가슴 앞쪽으로 옮긴 뒤에 좌타호식이 되는데, 우타호식과 같은 방식으로 행한다.

 

타호打虎란 이름은 호랑이를 타격한다는 뜻에서 유래했다. 호랑이를 안고 산으로 돌아갔다가 호랑이의 먹이가 되어 호랑이와 일체가 된(抱虎歸山) 수련자는 이번에는 타호식으로써 호랑이를 제압한다. 나를 잊어버린(忘我 혹은 喪我) 수련자가 다시 호랑이를 제압함으로써 나를 찾게 되는 것(復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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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가 어떤 동물이던가? 백수의 제왕이다. 땅에서 사는 동물 중에 가장 용맹한 친구이다. 이런 호랑이를 일부러 보듬어 안고 산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호랑이의 동굴에 스스로 찾아 들어간다는 말이다. 호랑이의 먹이가 됨으로써 그 동굴로 들어가는 것이니 예사로운 일은 아니다. 그리하여 호랑이와 합일한다. 호랑이의 강인하고 용맹한 정신과 일체감을 이룬다. 지상에서 가장 힘센 호랑이의 기운 속으로 들어가서 그 기운과 합일하니 욱일승천하는 기상이 된다.

 

그런 수련자가 이번에는 다시 호랑이를 타호식으로 제압하고 무릎을 꿇린다. 마치 네가 힘자랑 하는 것을 이번 기회에 그만두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것 같다.

그리고 한번 지고 한번 이겼으니 우리 그만 화해하지!”라고 손을 내미는 것과도 같다. 인간의 내면에 늘 두려움의 대상으로 남아있던 호랑이를 잠잠하게 해놓았으니 그 기세가 천하를 삼킬 만하다.

 

그러나 호랑이와 화해하고 합일한 인간은 천하가 바로 그 호랑이 동굴 같은 것임을 알고 있다. 천하의 만물 만생이 모두 한 몸이니 누가 누구를 이기고 지고 할 바 있겠는가? 한 가지라도 부족하면 천하는 천하로서 부족하게 된다. 한 생명이라도 귀하지 않은 것이 없고, 한 미물도 다 스스로의 자리가 있다. 그것을 일컬어서 노자는 천하는 신령스런 그릇(天下神器)’이라 한다.

 

강함과 부드러움을 상호 운용해야 한다.”

오랫동안 연습하여 순숙시켜야 한다.”

 

剛柔互運 강유호운

久練純熟 구련순숙

 

태극선은 부드러움으로 시작해서 부드러움으로 끝나는 수련 공부이다. 달리 말해서 방송으로 들어가서 방송으로 나온다고 한다. 그러면 다시 강함이란 무엇인가? 진정한 강함은 굳고 뻣뻣한 강함이 아니고, 부드러움이 밑받침이 된 강함이다. 모든 생명은 부드러움()으로부터 나와서 부드러움()으로 되돌아간다. 그런데 살아있는 생명은 때로는 부드러움을 삶의 방편으로 삼고, 때로는 강함을 삶의 수단으로 쓰기도 한다. 그것이 생명의 법칙이다. 강과 유는 상호 매개하고 전화한다. 그러나 강과 유를 운용할 때 반드시 명심해야 할 것은 유를 체, 을 용으로 하여 기를 운용하는 원칙이다.

유를 근본으로 삼고 강을 지말枝末로 삼는다. 부드러움에 기반해서 강함을 발하고, 강함을 발한 다음에는 곧 바로 부드러움으로 복귀해야 한다. 그리고 다시 강함을 발할 수 있도록 부드러움을 잘 쌓아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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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수련은 오랜 기간 단련하여 익히면 순하게 되는데, 그것을 순숙純熟된다고 한다. 고구마를 삶더라도 잘 익혀야 맛있는 고구마가 되듯이, 우리 신체와 정신도 잘 단련하고 익혀야 말랑말랑하고 단내 나는 고구마처럼 순숙되는 것이다. 아무리 알아도 익히지 않으면 소용없다. 특히 수련의 길에서는 더욱 그렇다. 올바른 방법으로 오랜 시간 동안 노력하지 않으면 익혀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좋은 안내자와 바른 안내지도가 필수적이다. 좋은 스승을 만나 올바른 법을 전수받고 이를 익혀 나가는 것은 매우 의미 있고 즐거운 일이 된다.

 

타호식은 이름에서 인상 지어진 바와 같이 매우 강인한 힘을 느끼게 하는 식이다. 이 식을 수련하면서 수련자는 강한 기운을 얻고 쓸 수 있게 된다. 내면의 강한 기운이 삶의 동력이 됨으로써, 자신의 삶을 더 풍요롭게 할 뿐만 아니라(自利), 이웃들에게도 좋은 에너지를 보낼 수 있도록 해야 한다(利他). 그것이 수련하는 이들의 보람이고 즐거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수련자는 강인함을 연마하는 타호식을 익힘에 있어, 노자가 언명하는 세 가지 지나침을 경계해야(三去) 할 것이다.

 

천하를 손에 넣고자 억지를 부리는 자를 보면

나는 그렇게 되지 않음을 볼 뿐이다.

천하란 신령스러운 그릇이다.

도무지 거기다 어찌할 수가 없는 것이다.

억지로 하는 자는 패할 것이요,

움켜잡는 자는 놓칠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 사물의 이치는

앞서가는 것이 있으면 뒤따라가는 것이 있고,

들이마시는 것이 있으면 내뿜는 것이 있고,

강한 것이 있으면 여린 것이 있고,

솟아나는 것이 있으면 무너지는 것이 있다.

그러하므로 성인은

극심한 것을 버리고

사치한 것을 버리고

과분한 것을 버린다.

 

將欲取天下而爲之, 장욕취천하이위지

吾見其不得已. 오견기부득이

天下神器, 不可爲也: 천하신기 불가위야

爲者敗之, 執者失之. 위자패지 집자실지

故物或行或隨, 고물혹행혹수

或歔或吹, 혹호혹취

或强或羸. 혹강혹리

或培或隳. 혹배혹유

是以聖人去甚, 去奢, 去泰. 시이성인거심 거사 거태 (29)

 

사람은 힘이나 부, 권력이 쌓이면 원래의 소박한 생각이 바뀌어 점차 더 많이, 더 높이, 더 멀리, 더 빨리목표를 수정하고 욕망을 증폭시킨다. 그래서 욕망의 크기는 눈덩이처럼 불어나게 된다. 내가 갖고 있는 능력은 한계가 있는데, 목표는 이미 저만큼 앞서 달아나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목표에 집착하면 몸과 마음을 상하게 되고, 급기야 목표달성은 고사하고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세상마저 잃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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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물며 부와 정치권력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말할 것도 없다. 노자가 살았던 당시에도 그랬을 것이다. 천하를 삼키려고 하는 자들이 이곳저곳에서 일어나고, 이들은 목표달성을 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덤볐다(將欲取天下而爲之). 지금 가지고 있는 경계, 지금 다스리고 있는 영토는 늘 부족하다. 온 천하를 다 삼켜도 족함이 없다.

그래서 노자가 말했다. 그렇게 억지로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고(吾見其不得已). 천하는 신령스런 그릇인데(天下神器), 감히 이를 가지려고 덤비는 사람들은 반드시 실패할 것이라고(爲者敗之). 그래도 억지로 힘과 무력을 동원해서 정도를 저버리고 날뛰는 자들은 가진 것을 다 잃게 될 것이라고(執者失之).

 

이 세상 만유만생의 이치는 앞서가는 것이 있으면 뒤따라가는 것이 있다(物或行或隨)고 했다. 지도자가 앞장서니 백성들이 그 뒤를 따르고, 백성들이 뒤를 받쳐주니, 지도자들이 앞장서서 나아간다. 노동자가 없이 경영하는 이가 있을 수가 없고, 국민들이 없이 권력자가 다스릴 수 없다.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어주니, 이보다 나은 도가 없다. 상대를 인정하는 바탕 위에서만 온전함이 있게 된다. 독불장군처럼 자기 잘난 맛에 혼자 살 수 있는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들이마시는 것이 있으면 내뿜는 것이 있고(或歔或吹), 강한 것이 있으면 여린 것이 있고(或强或羸), 솟아나는 것이 있으면 무너지는 것이 있다(或培或隳). 모든 것은 상대방을 전제로 하여 자기를 드러내고, 그리고 다시 상대방 속으로 해체해 들어간다. 나 홀로 이룬 성과라고 위세를 떨 필요가 없다. 그 어느 하나의 것이라도 부족했거나 없었다면 애초에 이루어지지도 않았을 성과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인연법이다. 그것이 인과법이 된다.

 

바깥수련길에서 막 돌아와 마땅한 거처가 없었다. 무등산에서 수도하며 지내는 가까운 친구의 도움으로, 그 친구의 집으로부터 약 500미터 쯤 떨어진 계곡 바로 위 숲속의 반반한 터를 잡아 텐트생활을 하며 몇 달을 지낼 때의 일이다.

그 계곡은 위에 시무지기 폭포가 있고, 곳곳에 목간하기에 좋을 소가 잘 만들어져 있으며, 사시사철 흐르는 물이 마를 날이 없는 매우 아름답고 고즈넉한 곳이다. 숲은 가꾸지 않아서 원시림과 다를 바 없는데, 군데군데 보기에도 묵직한 고목들이 쓰러져 나뒹굴고 있다. 취나물이며 노랑매미꽃 등의 야생화들이 군락을 이루어 자라고 있는 숲속은 손이 닿지 않는 아마존의 풍경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계곡의 물은 근방에 오염원이라 할 만한 것이 없는 그대로 산속이라, 손바닥으로 받아 마시면 그대로 청량한 생수 그대로이고, 물속을 들여다보면 일급수에만 산다는 몇 종의 피리들이 눈치 볼 것 없이 오간다. 사람 손타지 않아, 숲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새소리 물소리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와 계곡물 흐르는 소리들만 부산을 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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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은 아래쪽에 있는 친구네 집에서 먹으니 문제가 없는데, 뒷일 보는 것은 아무래도 문제다. 이 일은 현장에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계곡 안쪽으로 돌들이 많이 쌓인 곳에다가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화장실을 만들었다. 반반하고 큼직한 돌덩이 두 개를 양쪽으로 갈라놓고, 그 아래는 똥이 떨어져도 안전하도록 약간 움푹하게 해놓았다. 비가 오면 별 도리 없이 노천에서 일을 봐야 하니 약간 불편하기도 하나, 새들과 풀벌레들 엿보는 것 말고는 프라이버시도 크게 문제될 게 없다.

 

여기서 일을 보면 재미있다. 아무 생각도 없다. 그냥 일보는 데만 전념하면 된다. 한 덩어리가 떨어지고 또 한 덩어리가 떨어지면서 약간 귀찮은 일들이 벌어진다. 어디선가 모르게 똥파리들이 날아든다. 인터넷도 없는데 어디서 정보를 얻었는지 귀신같이 알고 나타난다. 똥파리 말고도 아마 똥에 관심 있거나 취미가 있는 것들은 다 모인 것 같다. 자기네들끼리 약속이나 한 것처럼 말이다. 순식간의 일이다.

며칠 뒤에 다시 그 자리에 가보면 참으로 가관이다. 그 사이에 똥파리들이 까놓은 구더기들이 구들구들하다. 자세히 보니 그것뿐이 아니다. 그때 함께 동참했던 이런저런 벌레들이 모두 어우러져 있다. 한 무더기의 생태계가 자연스럽게 펼쳐져 있다. 그때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 이것이 노자가 말한 바로 그 천하신기(天下神器)’라는 것이로구나!

 

길을 가는 모든 것들은 때가 되면 나타나고 사라지고 한다. 누가 오라 가라 하지도 않는데 스스로 잘도 알아서 한다. 그리고 거기에는 일점일획의 오차도 없다. 남음도 없고 부족함도 없다. 세상에! 똥 덩어리 하나를 처리하기 위해서 온갖 처리반원들이 다 모여들었고, 그들은 아무 착오 없이 능수능란하게 일을 깨끗하게 잘 처리했다. 그 신령함이 저 미물에까지 이르렀음에야! 그래서 장자가 똥오줌 속에도 도가 있다고 했더라.

성인은 극심함을 버리고, 사치스러움을 버리고, 과분한 것을 버린다.(是以聖人去甚, 去奢, 去泰) 이른바 삼거三去. 자연의 도는 한편의 극에 치우침이 없다. 치우침이 없는 자연의 도는 인간의 도의 준칙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도 자연의 도에 부합하는 삼거三去를 행위의 준칙으로 삼아야 한다. 왜 삼거三去인가?

 

극심함을 버린다(去甚)’는 한쪽의 극단에 치우친 사고나 행동을 피해야 한다는 말로 이해된다. 종교 안에서도 그런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이단으로 몰거나, 사이비로 규정해서 공격하는 경우들이 그것이다. ‘정도정법’, ‘정교등은 교리나 교학을 정하고 지켜야 하는 종교전통에서는 있을 수 있는 일이나, 문제는 거기에 있지 않고, 상대방을 퇴치해야 한다고 몰아세우며 인신공격을 하고, 세간의 법리논쟁에 몰두하며 고소고발 등을 일삼는 데에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종교의 본의에서 한참 먼 일이 될 것이다.

타종교를 공격하는 일까지도 서슴지 않으니, 그야말로 볼썽사나운 일들이 아닐 수 없다. 다른 종교의 성지를 훼손한다든지, 다른 종교의 처소를 공격하고 방해한다든지 하는 일들은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다. 정치적 견해를 달리하는 정당이나 계층, 인사들에 있어서는 그 극심함이 차마 눈뜨고 보기 힘든 지경일 때도 많다. 극심한 입장이나 극심한 행동, 극렬한 언사 등은 자연의 언어나 자연의 행위, 자연의 사유는 결코 아니다는 것이 노자가 말하고자 하는 뜻이다.

 

사치함을 버린다(去奢)’는 쓸데없이 치장하고 포장하고 과장하는 것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니, 혹 하는 일이 있더라도 지나치지는 말아야 한다는 말이다. 사치는 밖을 치장함으로 안을 감추는 일이다. 안이 결핍할 때 밖을 단속하느라 온갖 값나가는 물건들로 주렁주렁 매달고 치장하는 것이다. 다른 계층들로부터 자기를 차별화시키고 드러내 보이려는 심산이기도 할 것이다.

충분히 부유한데도 밖을 꾸미고 장식하는데 별 관심이 없는 이들도 있다. 소박한 일상이고 소박한 밥상이고 소박한 나들이다. ‘이 충만한 사람들의 모습이 그러하다. 안이 빈곤하고 결핍하면 밖으로 그것을 때우려고 하고, 그러다 보니 과분한 사치를 일삼게 된다. 지나친 명품애호, 지나친 선물, 지나친 의상, 심지어 외모 뜯어고치기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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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분함을 버린다(去泰)’도 마찬가지가 된다. 남들과의 경쟁을 의식해서 과도하게 자기를 과시하려고 하니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고 오만한 행동들을 일삼는다. 이것도 역시 그릇된 생각, 병적인 태도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불필요한 것들로 위세를 부리고 헛된 자존심으로 돈과 시간을 낭비하며, 거만한 태도로 상대를 깔보는 것들은 미성숙한 단계의 의식을 반영한 것이다.

 

공자는 이같은 뜻으로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 했다. 이토록 지나침은 미치지 않음만 못하다.

자연은 소박함을 길로 삼는다. 단순 소박함의 도를 우리 삶의 이정표로 삼으리니!

 

글 사진/민웅기(<태극권과 노자>저자,송계선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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