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칼날을 세우자/나무막대로 줏대를 수련,지금 여기서

살법의 정점은 활법

춤이 자유로운 몸짓을 통해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것이라면 무예는 연습할 때조차 생사의 문제를 염두에 두기 때문에 그 어느 때 보다도 순도 높은 정신과 육체의 집중을 이끌어낸다. 이러한 집중이 한층 더 깊어지면 종교적 경건함에 비견할 수 있는, 깊고도 투명한 마음의 상태에 도달하게 된다. 바른 힘쓰기와 정신집중의 결은 결코 다르지 않다. 마치 광기와 깨달음이 서로 등을 맞대고 있듯이 가장 정교한 살법(殺法)과 내면을 다스리는 수행법은 둘처럼 보이는 하나이다. 역설적이게도 무예가 살법으로서 최정점에 도달하였을 때 비로소 그것이 활법(活法)으로 변모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다.

 

같은 길을 걷더라도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결과는 달라질 수 있다. 군사적 목적으로 개발된 기술이 상용화되면서 대중의 삶을 이롭게 하는 데 이바지할 수 있듯이, 힘의 효율을 극대화하기 위해 고안된 무예의 방법론을 조금 다른 목적과 시각에서 재조명한다면 우리 삶의 깊이를 더하고 몸과 마음의 중심을 두텁게 만드는 수행법으로 삼을 수 있다. 사실 이것은 현대에 이르러 갑자기 나타난 새로운 시도라기보다는 이미 앞서간 스승들에 의해 선취된 ‘오래된 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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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예 중에서도 검술은 으레 높은 경지의 수련으로 이해되어 왔다. 먼저 검술을 연마하여 예리한 검기를 세워낸 다음, 그 검기를 넉넉한 호흡에 담아 놀면 그것이 검무다. 그리고 검무에 염원을 담아 하늘을 향해 아뢰면 신성한 제의가 된다. 검은 삼무(武,舞,巫)를 아울러 관장해오면서 우리 정신문화의 깊숙한 뿌리에 닿아있다. 총포의 등장으로 검의 실용적 가치는 급격히 쇠퇴해갔지만 반면에 검이 가지고 있는 정신적, 수행적 측면은 더욱 깊어져갔다. 조선 중기 무렵부터 무(武)를 드러낼 수 없는 사회적 환경 속에서 무예의 맥이 산 속으로 숨어들게 되면서 내적 수행의 가치로 전환하는 시기로 접어들었는데, 여기서 아예 검 없이 맨손으로 검결을 일궈내는 형태-수벽치기-로까지 나아갔다. 이것은 병장기와 무기술의 개념에서 완전히 벗어나 검 수련의 수행적 측면을 극대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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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수벽치기의) 검 수련법 ‘숨치기’를 해보자. 가장 중요한 원칙은 쇠칼을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무로 된 것은 다 좋은데, 목검 보다도 자연상태의 목봉이 더 좋다. 철물점에서 판매하는 대형망치의 자루도 훌륭한 검이 된다. 먼저 왼손으로 자루의 끝이 남지 않도록 잡고, 그 위로 손가락 두세개 들어갈 간격을 띄고 오른손을 얹는다, 손등이 보이도록 양손을 안쪽으로 가볍게 틀어쥐고 양손 모두 넷째손가락이 잡는 힘의 중심이 되도록 한다. (처음엔 검지에 집중되기 쉬움)

검을 잡는 순간 검끝 10cm에 의식을 두도록 한다. 천천히 검을 등 뒤로 넘기는데 이 때 왼손의 팔꿈치를 쭉 편다. 억지로 호흡에 신경 쓰지 않아도 자연히 숨이 들어온다. 치켜들었던 왼손을 내리면서 검을 앞쪽으로 내는데, 이마높이 혹은 아랫배높이에서 멈출 수 있다. 자연스럽게 숨을 내쉬면서 동작의 맺음에 집중하는데, 검으로 벤다기 보다는 메긴다는 느낌으로 한다. 멈출 때의 힘의 중심점은 왼손에 있다. 타격점에만 함몰되지 말고 검이 멈춘 이후로도 계속해서 기운을 앞쪽으로 뿜어내는 노력이 더해져야 한다. 지금까지의 상체동작을 보편적으로 무술에서 사용하는 여러 자세에 적용해본다. 어떤 자세든 발바닥-아랫배-왼손 넷째손가락-검끝으로 이어지는 힘의 경로가 잘 형성되도록 연습한다. 정확한 동작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정신의 중심인 줏대가 바로 서게 된다.

 

김범부 선생의 <<화랑외사>>의 물계자 편에서는 검술을 배우러 온 자에게는 거문고를 먼저 익히라 하고 거문고를 배우고자 하는 자에게는 검을 먼저 익히라고 하였다는 대목이 나온다.

왜 하필 거문고인가? 거문고는 본디 가락(멜로디)을 타는 악기가 아니다. 먼저 힘 그 자체의 질감을 드러내는 것이고, 나아가 음과 음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배음의 향연을 바라보는 것이다. 거문고는 잎사귀의 음악이 아니요 기둥과 뿌리의 음악이다. 소리로 현현한 힘들이 저마다 있어야할 자리에 놓일 때 거문고의 악(樂)은 완성된다. 

 

  

 

같은 의미에서 검을 배운다는 것은 그저 베고 찌르는 기술을 연마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된다. 검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보다 근원적 힘으로 인도하는 매개체이다. 그것은 정신의 결을 드러내는 거울과도 같은 것이다. 따라서 검을 가르치고 배운다는 것은 행위의 전승이 아니라 심결을 이어받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어떤 정신적·문화적 전통을 이어간다고 했을 때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에만 머물러서는 안되며 그것들을 지배하는 본원적 인자(因子)를 스스로 획득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의 결을 터득하게 되면 그 때부터는 자유를 얻게 되고 핵심적 원리를 바탕으로 하여 각 시대의 환경에 맞추어 자유롭게 변용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이것은 ‘형식적 일치’가 아닌 ‘내용의 동질성’으로 향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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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분야에서나 ‘본질’이라고 부르는 무언가가 있다. 구체적 현상으로 나타나기 이전의 에너지는 사실상 같은 것이다. 그 핵을 직접적으로 건드려 일깨우는 것이 바로 검 수련이다. 검이란 그저 병장기의 한 종류가 아니며 무예의 한 과목으로 가둘 것도 아니다. 그것은 깨어있는 정신으로 바르게 서있고자 하는 모든 의지를 일컫는 말이다. 이제 저마다의 칼날을 벼리자. 각자의 삶 속에서 넓은 의미의 검기를 세워야 한다. 정제된 마음이 검기로 맺힐 때 줏대가 바로 서고, 쉬이 흔들리지 않는 정신들이 곳곳에 살아있을 때 올바른 뜻이 강처럼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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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사진 동영상/육장근(전통무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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