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반전을 부른 두 분의 사부님 민웅기의 수련일기

민웅기의 수련일기 1/사부님 나의 사부님
  
 <모든 것의 역사>,<켄 윌버의 일기>,<에덴을 넘어>,<의식의 스펙트럼>,<무경계>,<통합심리학> 등 이십여 종의 책을 쓰며 세계적 지성사의 한 획을 그은 켄 윌버(1949년~, 미국)는 자수성가형 사상가이며 영적 지도자이다. 트랜스퍼스널 심리학의 대가이자 통합심리학 분야를 대표하는 학자이고, ‘의식 연구 분야의 아인슈타인’으로 평가받는 이 시대의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자 중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그는 의학과 생화학을 전공했지만 노자의 <도덕경>을 읽고 큰 충격을 받아 심리학, 종교, 영성에 대한 동서양 사상에 심취했다. 그는 심리학과 철학, 인류학, 동서양의 신비사상, 포스트모더니즘 등을 총망라하여 인간의식의 발달과 진화에 대한 통합이론을 제시하였고, 이러한 업적은 프로이트와 융, 윌리엄제임스의 업적에 비견되기도 한다. 또 선불교와 티베트 불교의 수행법을 오랫동안 실천해온 수행자이기도 하다. 켄 윌버는 내가 난회이진(南懷瑾, 1918-2013) 선생과 함께 마음으로 존경하며 배우는 위대한 현대의 스승이다.
 

켄 윌버  1 copy.gif » 켄 윌버

 

켈 윌버 2.jpg » 켄 윌버

 


 난 선생은 현대 중국 지식인의 우상이며, 중국인들에게 중국 전통의 고전과 사상, 그리고 수행의 중요성을 일깨워준 대각자이다. 내가 중국 상하이로부터 구해온 그의 총서와 국내에 번역 소개된 그의 <노자타설>,<장자강의> 등 여러 저작들은 내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인문고전 분야의 책들에 속한다. 난 선생은 대승, 소승(남방) 불학과 티베트 불교의 이론, 수행에도 능통하신 분이다. 또 노자와 장자, 도교, 중국의 의학, 그리고 유가의 경전들에 이르기까지 그의 학술과 사상이 미치지 않는 분야가 없을 정도로 해박한 학자이며 수행자셨다. 제자들이 그의 강의를 기록한 저서만 해도 수십 종에 이른다. 심지어 젊은 시절 한때엔 무술에 심취하여 수련에 전념하기도 하셨다고 한다. 동방의 전통 사상과 문화, 역사와 함께 서구의 학술 조류와 의학의 문제를 섭렵하고 통관하는 선생님의 지혜와 사상의 빛에 이끌려, 천학비재인 나도 한때의 공부에 절치부심한 적이 있었다. 지금도 공부가 어려울 때면 저서 속의 그를 친견하며 그분의 강의를 경청한다.  

 

난 회이 진.jpg » 난회이진  
 
 동방의 난 선생과 서방의 켄 윌버, 이렇게 두 분의 위대한 스승을 흠모하며 그분들의 사상과 수행의 자취를 탐미하는 것만으로도 금생의 기쁨에 더할 바가 없을 정도가 되니 참으로 두 분의 스승님들께 속 깊은 찬탄과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젊은 날 한때 시대정신에 이끌려 칼 마르크스(1818-1883·독일)의 사상과 철학에 경도되었던 때를 제외하면, 불행하게도 나의 인생엔 ‘사표(師表)’가 될 만한 어떤 위인이 뚜렷하게 각인되어있질 않았다. 사표를 갖지 못했다는 것은 몹시 불행한 일일 수밖에 없다. 스승과의 인연만큼 인생에 있어서 귀한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성장과 진화의 결정적 계기는 결국 어떤 스승, 어떤 멘토를 만나느냐 하는데 달려있게 된다. 그렇게 보면 어떤 원인을 비롯해서든, 내가 청년시절 어느 한때와 지금의 만학의 계기를 제외하고 내 인생의 노른자위에 해당될 어느 중차대한 시기에 직접적 배움의 계기를 만들지 못하고 실기했던것은, 나의 공부의 여정에는 참으로 치명적인 결핍의 사유가 되지 않을 수 없다.


 하여튼, 뒤늦게 찾아온 공부에의 인연으로 인해 귀농 이후의 나의 인생에 일대 반전이 예고되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오래전에 예비 되고 있었던 일일지도 몰랐다. 조그마한 유정란 농장을 운영하면서 가족의 생계를 지지할 어떤 근거를 마련했다고는 하나, 그 일속에서 내 인생의 본뜻을 찾기엔 진실로 무망한 어떤 소이가 내안에 잠재되어 있었을 것이다. 지치고 메마른 심정으로부터 일종의 어떤 해탈을 기도하기에 충분히 나의 때가 무르익고 있었다. 
 
 남도의 어느 절에서의 요가수행, 위빠사나 명상수행도 그 한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연이어 만난 사부의 인연은 나의 새로운 수행 길을 인도하는 길라잡이가 되어주었다. 스승의 인연이 박하던 내게 드디어 길이 활짝 열리고 있었던 것이다. 스승과 제자, 제자와 스승이란 무엇이던가? 참된 제자가 되지 못한 이가 어찌 좋은 스승이 될 수 있겠는가. 훌륭한 스승으로부터 배울 수 없는 자가 어찌 좋은 제자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스승은 제자를 통해서 빛난다고 했다. 스승을 통해서 제자가 빛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누구누구의 제자’라고 아무리 읊어댄들 어떤 의미가 있겠는가. 다만 제자로서 바르게 배울 뿐인 것이다.
 
 켄 윌버는 동서고금의 스승상을 두 가지 유형으로 분류했다. ‘구루형’과 ‘현자형’이 그것이다. ‘구루’는 전통적으로 인도와 중국 등지에서 보이는 사표가 된다. 구루는 제자와의 관계 맺음에 있어서 자신의 전 인생을 건다. 제자와의 전인격적 관계를 통해서 삶을 나눈다. 여기에서 가르침과 배움이란 동전의 양면처럼 둘로 나누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잘 배우는 자가 잘 가르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구루와 제자는 배움과 가르침이 혼연하여 지식의 분야에 한정되지 않는 인격과 삶의 전부를 공유한다. 피를 나누진 않았을지 모르나 혈연관계보다 묽지 않다. 그것은 결코 돈을 주고 사는 거래관계가 아니다. 그것은 방편이 될 수 없는 그 무엇이다. 그것은 목적이면서 과정이며, 과정이면서 동시에 목적이다. 그것은 길을 같이 가는 것이다. 생과 사를 함께 하는 그 무엇이 된다.
 
 그러므로 구루란 부자의 연이나 군신의 연에 못지않고 수없는 전생의 인연에 의해서만 비롯된다고 설해진다. 그것은 길(道)의 맥락을 이어가는 것이며 그 속에서 텍스트와 콘텍스트간의 밀밀한 대화가 구성된다. 스승과 제자는 길을 비추는 따스하고 밝은 한줄기 빛에 연루된다. 두 줄의 새끼꼬기가 혼연하게 얽힘으로써 서로가 서로에게 갈마들어가는 것처럼 스승과 제자는 새끼꼬기의 인연으로 서로의 빛과 어둠속으로 갈마들어간다. 이것이 ‘구루의 길’이다. 동시에 이

것이 `제자'의 길이 된다.

 

61.jpg » 무등산 계곡에서 참선하는 민웅기 .


 ‘현자’는 ‘구루’와는 달리 직접 제자를 기르지 않는다. 현자는 예언자의 길과 흡사하다. 구루가 한 인격을 온 삶으로 상담하고 치유하고 인도해가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면, 현자는 한 시대를 일별하여 그 시대정신을 일갈한다. 그리고 현자는 지혜의 묵시록을 설한다. 일대일의 인격적 접촉을 매개하는 대신 불특정 다중을 대상으로 길과 길의 지혜를 선포한다. 그러므로 현자는 독설과 패로디와 희론에 능하다. 한 시대의 담론을 주도할 뿐만 아니라 시공을 넘는 보편적 진실에 다가간다. 그의 혀는 뱀의 그것처럼 예리하고 그의 머리는 고금의 진리를 두루 꿰며 그의 가슴은 시대와 민중의 아픔을 두루 감싼다.
 
 그러므로 현자의 길은 한 마리의 외로운 학과 같이 고고하고, 잠룡이 여의주를 품어 구만리장천으로 비상하는 것 같으며, 드높은 하늘의 현현처에서 이글거리는 태양빛에 아지랑이처럼 비추인 진애(塵埃)를 보는 것 같으며, 無何有之鄕(무하유지향, ‘어떠한 존재의 경계도 없는 곳’)의 고원한 지대로부터 다시 남녘의 어느 세간(世間)의 바다 한가운데로 하강하여 여여함을 보는 것과 같을 것이다.
 
 켄 윌버가 정리한 두 유형의 스승의 길도 겉모양새와는 달리 근원적으로는 전혀 그 뜻이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나는 지금 어느 시점으로부터 비로소 열리기 시작한 스승의 인연을 떠올리면서, 나의 길에 인연되어주고 그 길의 지평을 열어 보여주시며 몸소 그 길의 안내자가 되어주신 동서와 고금의 위대한 스승들을 묵상하고 있다.   

  

 59.jpg » 무위태극권을 수련하는 민웅기


민웅기(<태극권과 노자>저자.송계선원 문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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