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천은 바닥이 났으니 하늘로 부터 빌어서 채운다 무위태극선 교실

민웅기의 무위태극선/하늘에 짝함/좌우납천수 左右拉天樹  

 

좌우납천수左右拉天樹는 우등각에 이어져 나오는 식이다. 허리가 우회전함과 동시에 오른발이 내려오고 두 손의 권이 오른쪽 가슴 앞에서 마치 작은 항아리 하나를 보듬고 있는 모습이 된다. 오른손의 권이 위에, 그리고 왼손의 권이 주먹하나 사이로 그 아래에 놓여 있다.

항아리를 안고 있는 모양의 두 권이 흡사 하늘로부터 드리워져있는 동아줄을 잡아당기고 있는 모습이다. 우식은 왼발이 실하고 오른발이 허하며, 좌식은 그 반대이다. 우납천수에서 왼쪽으로 허리가 돌면서 그대로 오른 권이 아래쪽으로 내려들어가고 왼 권이 돌아 올라오면 좌납천수가 된다.

 

은 연결하다, 잡아 당기다의 뜻이다. 납천수拉天樹는 하늘 기운으로 형성된 에너지장 에 연결하는 뜻이다. 그 하늘기운이 땅에서부터 하늘까지 일직선으로 낙락장송처럼 곧게 주욱 내려서있다. 하늘기운을 보듬고 있어 행공하는 이의 가슴부분에 활연관통된 에너지장이 형성되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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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납천수식은 마치 취권을 하는 이가 술항아리를 안고 있는 것 같다. 하늘 기운을 이 술항아리에 받아 담고 있는 것 같다. 비워진 기의 보따리를 충전시켜야 한다. 내 밑천은 이미 바닥이 나버렸으니 하늘로부터 빌어서 채운다. 하늘 아래 어떤 이도 이 하늘의 기운을 받지 않는 자가 없다. 하늘은 밑천이 바닥난 이들을 위해서 언제라도 베풀어 줄 준비가 되어있다. 다만 이 순간에 나를 비우면 된다. ‘가 비워져있지 않으면 채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납천수는 우리 인간이 자기의 할 바를 다하고 하늘의 명을 기다리는 것과도 같다. 살다 보면 내 힘으로 안 될 때가 있다. 잘 나가던 사업이 어느 날 갑자기 벼락을 맞은 것처럼 휘청거리고, 여태껏 감기 한번 앓아본 적이 없다고 호언하던 이가 하루아침에 큰 병에 걸려 시름한다. 그렇게 무상無常한 것이 인생이고, 세상살이고, 생명이 아니던가.

그럴 때는 다 놓고 하늘을 바라보아야 한다. 할 만큼 했으니 후회할 것도 없고 자책할 것도 없다. 다만 가 늘 그러하리라고 믿고, 일과 사업이 영원히 번창하리라고 믿었던 그 근거 없는 믿음도 내려놓고, 변치 않은 우정이나 변치 않은 애정이 있다고 집착하는 마음도 내려놓고, 하늘을 한번 바라보아야 한다. 하늘을 믿고 하늘에 의지하게 되면 하늘로부터 다시 명을 받게 될 것이니, 이것을 두고 하늘에 짝한다(配天)’고 한다.

 

오궁이 합일되어야 하리

위와 아래가 서로 따라야 되네

五宮合一 오궁합일

上下相隨 상하상수

 

오궁五宮은 두 손의 장심과 두 발의 족심과 하단전을 합해 다섯 개의 기의 구멍을 말한다. 이 오궁이 합일되도록 하는 것이 태극선의 식과 세를 행하는 기본이다. 태극선은 기세로부터 한번 시작하고 나면, 쉬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여서 마지막 수세에 이르러야 동작이 멈춘다. 마치 슬로비디오처럼 동작이 끊기지 않고 이어지는데, 그 슬로비디오의 어느 한 군데라도 오궁합일五宮合一에 어긋나면 안 된다. 매 순간순간의 동작이 오궁합일 되어야 하는 태극선의 동작은 그렇게 섬세하고 원리적이기 때문에 더욱 즐겁고 신비롭게 된다. 어느 한 순간이라도 마음이 행공하는 데서 떠나면 안 된다. 그렇게 정신이 성성하고 밀밀하게 몸의 동작과 함께 있게 되면 수행의 성과가 따를 뿐만 아니라 수행의 단계 또한 진일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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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와 아래가 서로 따름(上下相隨)’의 요결은 매우 요긴하게 익혀두어야 할 구결이다. 태극선의 식은 허리를 중심으로 두 손 두 발의 사지가 밀밀密密하고 관관貫貫하게 서로 꿰고 물리어 돌아가기 때문에, 몸이 어느 한 방향으로 움직임은 실제로 모든 방향으로의 동작을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것과 같다. 전후, 좌우, 상하가 상호 맞물려서 관천貫串되어 움직이기 때문에, 어느 한 방향으로 실낱같은 움직임의 단서만 생겨나도, 그 반대 방향과 나머지 모든 방향으로 동작이 파급되어 가는 것이, 마치 연못위의 물결이 번져나가는 원리와 같다. 위로 가려는 의도가 생기는 순간 몸이 먼저 아래쪽을 향해야 한다는 구결은 노자의 위와 아래는 서로 기울고, 앞과 뒤는 서로 따르네(高下相傾, 前後相隨, 2)”의 뜻과 같다. 몸의 동작의 원리만 그러한 것이 아니고 세상살이도 그러하기 때문이다.

 

노자는 납천수를 수행하는 이들에게 말한다. 예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통하는 지극한 길이 있으니, 그것을 하늘에 짝함(配天)’이라 하는 것이다.

 

장수 노릇을 잘하는 자는 무력을 쓰지 않는다.

잘 싸우는 자는 노여움을 드러내지 않는다.

적을 잘 이기는 자는 맞서 싸우지 않는다.

사람을 잘 부리는 자는 자기를 잘 낮춘다.

이것을 일컬어 싸우지 않음의 덕이라고 한다.

이것을 일컬어 사람을 쓰는 힘이라고 한다.

이것을 일컬어 하늘에 짝함이라 한다.

이것은 모두

예로부터의 지극한 길이다.

 

善爲士者不武, 선위사자불무

善戰者不怒, 선전자불노

善勝敵者不與, 선승적자불여

善用人者爲之下, 선용인자위지하

是謂不爭之德, 시위부쟁지덕

是謂用人之力, 시위용인지력

是謂配天, 시위배천

古之極 고지극 (68)

 

장수란 원래 싸우기 위해 존재하는 자다. 그런데 노자는 훌륭한 장수는 무력을 쓰지 않는다(善爲士者不武)고 한다. 무력이란 한번 쓰게 되면 많은 희생을 치르게 된다. 옛날의 무력도 그렇게 많은 희생을 치르는데 하물며 현대사회의 전쟁이야 말할 것도 없다.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무력이란 인간을 짐승과 같은 상태로 만들어 버린다. 아니 짐승만도 못하게 만든다. 상대를 죽이고 파멸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쓰이는 것이 무력이기 때문이다.

전쟁이 일단 일어나게 되면 여태껏 이루어놓은 어떠한 성과도 다 무너뜨리고 만다. 지금까지 쌓아놓은 문명, 기술, 이기, 관계, 우정, 신뢰, 문화, 민주주의, 진보, 인권, 의식, 공동체, 생명, 생태계 등이 하루아침에 잿더미로 변하고 만다. 어떤 이유로도 전쟁의 방법은 피해야 한다. 누구도 전쟁을 일으킬 권리가 주어져있지 않다. 이런 까닭으로 생명을 귀하게 여기고 평화를 목숨처럼 소중히 지키는 것은 수련하는 이들의 가장 큰 덕목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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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도 칼로 일어선 자는 칼로 망한다.”라고 말했다. 전쟁을 하게 되면 혹 이기게 되더라도 결국 모두 지는 꼴이 되고 만다. 그래서 노자는 잘 싸우는 자는 노여움을 드러내지 않고(善戰者不怒), 잘 이기는 자는 맞서 싸우지 않는다(善勝敵者不與)고 했다.

사람을 잘 부리는 자는 자기를 잘 낮추는 자이다(善用人者爲之下). 처하處下의 미덕을 갖춘 자가 성공하고, 많은 사람들을 거느리고 부릴 수 있다는 것은 동서고금의 많은 실례가 웅변해준다. 정치인들도 마찬가지다. 처하處下의 덕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싯달타 붓다는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을 인간의 근본 문제(三毒)로 보고 평생 이 문제를 풀고 그 답을 나누는 실천으로 온 생애를 살았다. 붓다의 문제의식에서 돋보이는 것이 특히 분노()’이다. , 분노, 미움은 같은 말이다. 분노의 문제를 바로 알지 않고는 진리의 길에 들어섰다고 볼 수 없다. ‘의 문제를 풀지 못하고는 행복의 문으로 들어설 수가 없다. 왜냐하면 누군가에 대한 증오나 분노는 우리 자신에게 고통을 줄 뿐만 아니라, 상대에게도 복수의 칼날을 들이대게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분노를 해결하기 위해 분노를 한다는 데 있다. 미움을 갚기 위해 미움을 더 키운다. 하지만 역사상 어떤 복수로도 평화를 이루어낸 적은 없을 것이다. 미움으로 미움을 뿌리뽑을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화는 화를 부를 따름이다. 노자는 잘 싸우는 자는 분노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善戰者不怒)

 

성서에 나온 얘기다.

어느 날 바리새인들이 현장에서 붙잡은 간통한 여인을 끌고 와 예수에게 물었다.

선생님, 유태의 법으로는 간통한 자는 돌로 쳐죽이라고 했는데 당신의 법은 무엇입니까?”

예수가 그들에게 말했다.

너희들 중에 누구든지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

노자는 이것을 싸우지 않음의 덕(不爭之德)’이라하고, 이것을 사람을 부리는 힘(用人之力)’이라 하고, 이것을 하늘에 짝함(配天)’이라 한다. 그리고 이것은 예로부터 변치 않는 지극한 길(古之極)’이 된다.

 

[장자, 달생]에 싸움닭 이야기가 나온다.

기성자가 왕을 위해 싸움닭을 키웠다. 열흘이 되어 왕이 물었다.

닭은 이제 싸울 수 있겠나?”

아직 안 됩니다. 다른 닭의 울음소리나 모습을 보면 당장 덤벼들려고 합니다.”

열흘이 지나 왕이 다시 물었다.

기성자가 대답했다.

아직 안 됩니다. 상대를 노려보며 성을 냅니다.”

열흘이 지나자 또 왕이 물었다.

그러자 기성자가 대답했다.

이젠 됐습니다. 상대가 울음소리를 내도 태도에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다.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나무로 만든 닭 같습니다. 그 덕이 온순해진 겁니다. 다른 닭이 감히 대적하지 못하고 도망쳐 버립니다.”

 

노자가 말했다. 무릇 무기란 상서로운 물건이 아니니 군자가 지닐 그런 물건이 아니다.

 

무기란 것은 도무지 상서롭지 못한 기물이며

군자의 기물이 아니다.

부득이 해서 그것을 쓸 뿐이다.

전쟁의 결과에 대해선

항상 염담하게 생각하는 것이 가장 좋다.

승리를 해도 아름답게 생각지 않는다.

그것을 아름답게 여기는 자는

살인을 즐기는 자이다.

兵者, 不祥之器, 非君子之器, 병자 불상지기 비군자지기

不得已而用之, 恬淡爲上, 부득이이용지 염담위상

勝而不美. 승이불미

而美之者, 是樂殺人. 이미지자 시락살인 (31)

 

노자의 전쟁관이 잘 나타난 대목이다. 싸움이란 불가피하게 일어날 수는 있으나, 그것을 즐기거나 남용해서는 결코 안 된다는 강조의 말이다. 승리조차도 아름다울 수 없는 것이다. 사람들을 살상해놓고 승전의 잔치를 치르는 일은 살인을 즐기는 일이며(是樂殺人), 사람의 할 바는 아니기 때문이다.

 

길은 늘상 함이 없으면서도 하지 아니함이 없다.

제후와 제왕이 만약 이를 잘 지킨다면

만 가지 것이 장차 스스로 교화될 것이다.

누가 교화한다고 무엇을 하려 한다면

나는 그 놈을 이름도 없는 통나무로 때려눕힐 것이다.

이름 없는 통나무는 무릇 또한 욕망도 없을지니,

바램이 없이 고요하면

하늘 아래 인간세가 스스로 질서를 찾아갈 것이니.

 

道常無爲, 而無不爲. 도상무위 이무불위

候王若能守之, 萬物將自化. 후왕약능수지 만물장자화

化而欲作, 吾將鎭之以無名之樸. 화이욕작 오장진지이무명지박

無名之樸, 夫亦將無欲. 무명지박 부역장무욕

不欲以靜, 天下將自定. 불욕이정 천하장자정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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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항상 자연그대로 있다. 함이 없이 그 길을 간다(道常無爲). 그렇게 가다 보면 되지 않음도 없다(而無不爲). 정치하는 이들이 이를 잘 지킨다면(候王若能守之), 만물만생이 스스로 그 자연의 도에 맞춰 조화롭게 된다(萬物將自化). 만에 하나 어느 왕이나 위정자가 억지로 자기의 통치방식을 내세워서 백성들을 교화하려고 하거나 강제로 동원하려고 하면(化而欲作), 나는 그런 놈을 이름 없는 통나무로 때려눕힐 것이다(吾將鎭之以無名之樸).

 

이름 없는 통나무(無名之樸)는 본연의 도를 부르는 말이니, 장차 이 무명의 통나무가 스스로 욕망을 부릴 수는 없다. 그리하여 다만 고요함으로써 탐욕을 부리지 않기 때문에(不欲以靜), 세상은 그 스스로의 자연스러움의 질서를 되찾게 되고 도에서 떠나지 않게 된다(天下將自定).

 

글 사진 민웅기(<태극권과 노자>저자,송계선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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