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을 깨워서 몸을 보게하라 무위태극선 교실

민웅기의 무위태극선/천하로써 천하를 보라/전신좌우등각 轉身左右蹬脚

  

분각을 하고 몸을 뒤로 돌아 먼저 오른발을 들어 올리는 우등각右蹬脚을 한 다음, 다시 뒤로 돌아 왼발을 들어 올리는 좌등각左蹬脚을 한다. 연이어 다시 뒤로 회전하여 우등각을 한 뒤 루슬요보 식으로 바뀌어진다.

분각이 몸의 좌우 45도 각으로 발을 들어 올리는 반면에, 등각은 허리의 정면으로 들어 올리고 분각이 발등을 위로 차올리는 데 반해, 등각은 발뒤꿈치를 앞으로 밀듯이 차내는 동작이다. 분각이 그 초식의 행공이 수려하고 우아한 데 비해, 등각은 매우 힘차고 강직하다. 등각의 발의 높이는 하단전에서 중단전 사이가 좋다. 너무 높이 차올리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왜냐하면 발 높이가 너무 높으면 몸의 기운이 안정감을 잃게 되고 기운이 위로 뜨기 때문이다.

 

등각을 행할 때는 특히 골반 뒤쪽의 힘이 잘 받쳐줘야 한다. 태극권의 힘은 발뒤꿈치에서 나와서 골반을 거쳐 허리에서 운용된다. 태극수련을 하는 중심은 의념이다. 일심다용一心多用의 의념意念의 사용이 필요한데, 의념의 절반이상이 하단전을 떠나면 안 된다.

왜 그러한가? 하단전은 인체의 원기元氣가 내재해 있는 곳이고, 인체는 이 원기로 인해 살아있는 표식이 되기 때문이다. 원기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기운을 말하며 진기眞氣나 진여眞如, 본성本性이라고도 말해진다. 원기는 본시 타고난 기운이므로 더 커지거나 작아지지 않는다. 원기가 존재함으로 단전으로부터 들고나는 기의 작용이 있게 되고, 따라서 이 원기가 훼손되지 않도록 보기補氣하고 양기養氣하는 것은 기수련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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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기는 우리 몸 안에 존재하는 태극太極으로 바꾸어 말할 수 있다. 우주의 본체인 태극에 우리 몸 안에 내재하는 태극의 기운을 계합하는 것이 태극권의 수련의 목적이고 방법론이다. 이를 위해 몸과 마음의 방송放松이 중요하다. 방송은 몸과 마음을 고요하고 텅 비워서 부드럽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뜻에서 보면 방송은 바로 도가 된다. 이렇게 방송의 도를 통해서 우주적 태극의 도와 우리 몸 안의 태극(원기)의 기운이 합일하도록 함으로써 태극 선경에 노닐 수 있게 되는데, 장자가 말한 소요유逍遙遊의 경지가 바로 이하다.

 

등각수련을 통해서도 역시 분각수련에서 얻어지는 하체 단련효과를 얻게 된다. 안정되고 탄탄한 하체의 뒷받침이 없이 원활한 등각초 식을 운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108식 장공 투로를 행공하다 보면 분각과 등각에서 자신의 체력을 점검할 수 있다. 그만큼 하체의 힘이 필요한 초식이라는 말이 된다. 안정된 하체의 힘이 없으면 몸의 균형을 잡을 수도 없을 뿐더러, 기운차고 활기찬 등각의 기세를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등각을 할 때 다리는 들어올리기보다 앞으로 밀어나가도록 한다. 그렇게 되니 등각의 기세는 멧돼지의 그것처럼 저돌적이고 힘이 있다. 밀물되어 밀려오는 거센 파도와 같다. 진중하면서도 활기가 있고 차분하면서도 나아간다. 위엄이 있으되 사납지는 않다. 기운이 넘쳐나되 살상의 뜻이 담겨있지는 않다. 태극선은 살리는 도리이다. 죽이는 기술로 사용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노자의 싸우지 않는(不爭)’ 도리를 안에 담고 있는 선법仙法이자 양생법養生法, 그것이 참된 태극선이다. 태극선은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평화를 구현하는 도리를 담고 있으므로, 잘 써야하고 협력하는 기운으로 써야 할 것이다.

 

야생 멧돼지를 직접 본 적이 몇 번 있다. 중국의 서안에 있는 종남산의 정업사靜業寺 위의 토굴에서 수련을 할 때의 일이다. 종남산은 2,700미터가 넘는 서안의 큰 산으로 신라의 의상대사가 10년 동안 수련했다는 곳인데, 그 초입에 정업사가 자리해 있다. 하늘을 찌를 듯이 날카롭게 솟아 있는 산봉우리의 형세도 예사롭지가 않는데, 산허리와 봉우리를 장식하듯 박혀있는 바위들이 고산준령의 위용을 대번에 드러내고 있다. 고대 무림의 8대 문파의 장문인들이 중원의 화평과 무림의 발전을 위해서, 바로 여기 종남산에서 수시로 구수회의를 했다고 전해지기도 하거니와 그 고풍스러움도 한몫하는 곳이다.

 

내가 거처하고 있었던 토굴은 흙과 나무로 얼기설기 엮어서 소담스럽게 지어진 집이었다. 그간에 거쳐갔을 여러 수행자들의 이력들도 그리 단순하지 않을 터라, 그 이력들의 틈새에 끼어들어가는 나의 토굴살이의 감격도 만만찮았을 것이다. 왠지 모를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었으므로 빡빡한 수련 일정에 대한 불평 같은 건 처음부터 생각할 수도 없었다.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나서부터 하루 종일 정해진 요강에 따라 여러 과목의 수련과 공부에 전념했다. 잠깐 몸을 뉘면 그대로 신선이었다. 산허리를 감고도는 운무가 토굴 앞마당까지 드리워 있다. 운무에 젖은 마음은 늘 축축하고 고요하다. 마음이 밖으로 달아날 여지가 없다. 원천봉쇄를 하고 있는 운무 덕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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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굴이 해발 800미터나 되는 산중턱에 자리하고 있으므로 주변에는 야생동물들의 자취가 널려있었다. 그중 멧돼지에 혐의를 둘 만한 증거들로 보이는 것들이 많다는 이유로 기대반 우려반 멧돼지와의 조우를 기다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이었다. 새들 지저귀는 소리들과 나뭇잎 살랑대는 바람결에 보드라운 살갗마저 간지럼을 타는 적막한 순간이었다. 우당탕퉁탕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갑자기 뒤를 덮쳤다. 마당 왼쪽의 우거진 관목 숲 속에서 거무스름한 물체가 튀어 올랐다. 그 순간 멧돼지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난생 처음 상면한 멧돼지에 대한 대처 방법을 알 수는 없다. 공포 반 호기심 반으로 얼른 집 주위의 작대기 하나를 잡아들었다. 나도 모르게 한 임기응변이었고, 그 사이 다행히 이 친구는 개울가에 있는 커다란 물통만 엎질러 놓은 채 유유히 사라지고 없었다. 이 친구는 아직 나를 적수로 보지 않았던 모양이다. 제 볼일만 치르고 가버렸다.

 

무등산 아래에 사는 친구 부인으로부터 들은 얘기다. 밖에 나갔다 돌아오는 길이었단다. 산길을 올라 집 앞에 거의 당도했을 즈음, 웬걸 멧돼지 일가족을 만났다. 한밤중 그것도 좁은 산길에서 멧돼지 일가를 만났으니 화들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놀란 가슴에 경적소리를 정신없이 눌러댔다. 그 부인만 놀란 것이 아니었을 테다. 생전 처음 듣고 보았을 전조등 불빛과 자동차 경적소리가 멧돼지 일가에게는 얼마나 큰 충격이었겠는가. 슬그머니 일가는 사라지더라고 했다.

 

문득 이런 생각들이 떠오르니 무등산 집에 돌아오는 산길이 왠지 더 으스스하게 느껴졌다. 바로 며칠 전에도 야생동물을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을 떠올리던 중에 착하디착하게 생긴 고라니 한 마리와 마주쳤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바로 그 지점에서 멧돼지 한 마리가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야생 멧돼지를 그토록 가까이서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전조등 불빛이 강렬해서 그랬을까, 멈칫거리다 슬그머니 바로 차창 옆을 스치듯 지나간다. 차를 멈추고 더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 유리창을 내리려고 했으나 그 친구는 벌써 저만큼 가고 없었다.

 

등각수련은 멧돼지의 야생성에서 엿보이는 힘찬 기상이 드러나되 그와 마주쳐 당황치 않는 사람의 기개도 함께 드러나야 한다. 헛된 강함이 아닌 참된 강함, 상대를 인정치 않는 독불장군식 무용이 아니라, 더불어 힘든 여정을 헤쳐나가는 진정한 용기와 우정으로부터 나오는 그런 강함이어야 한다.

 

유사한 강은 참된 강이 아니네.”

굳고 딱딱함을 피하고 정체됨을 피해야 하리.”

 

似剛非剛 사강비강

忌僵忌滯 기강기체 (태극구결)

 

등각 초식을 행공할 때는 필히 이 요결을 명심해야 한다. 강권에 익숙한 수련자들이 간과하기 쉬운 요결이다. ‘유사한 강(似剛)’이란 뼈와 근육에서 나오는 강한 힘을 말한다. 이렇게 뼈와 근육에서 직접 쓰는 힘을 졸력拙力이라 하는데, 태극선에서 절대 쓰지 않아야 할 것이 바로 이 졸력이다.

마음이 기를 억지로 부리는 것을 강함이라 한다.(心使氣曰强, 55)”고 한 말도 역시 이 유사한 강을 경계하는 말처럼 읽힌다. “모든 강폭한 것은 제 명에 죽지 못한다.(强梁者不得其死, 42)”고 한 말의 뜻도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읽는다. 이 경구에서 강폭한 것, 즉 참된 강함이 아닌 유사한 강함에 대한 근본적 통찰을 얻을 수 있으면 좋을 것이다.

 

진정한 강함은 부드러움을 지키며 자신을 비울 때 생겨난다. 상대방을 무너뜨리기 위해 억지로 힘을 쓰게 되면 강폭해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같은 원리가 개인이나 집단, 그리고 국가나 문명의 단위에도 적용될 수 있다. 상대를 인정하고 자신을 내세우지 않으며 공동의 번영과 평화를 추구하는 정신과 사상은 더 길게 가고, 더 감동을 주고, 더 생동하는 힘을 갖는다. 우선 눈앞에 보이는 이익을 좇아 물불 가리지 않고 덤벼드는 사람이나 사상은 오래가지 못할 뿐만 아니라 설득력도 없다. 역사적으로 동서를 넘나들어, 문명을 횡단하여, 고금을 관통하여, 감동적인 사람을 성인이라 하고, 이들이 설한 책을 고전, 혹은 경전이라 하거니와 이것이 그 증거가 된다.

 

등각수련을 할 때 수련자는 깨어있는 의식을 놓치면 안 된다. 의식이 단전뿐만 아니라 골반과 다리 발끝에 이르기까지 아주 미세한 부분도 놓치지 않고 관찰해야 한다. 명상을 할 때 마음챙김(定念)을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의식이 가는 곳에 기가 간다(意到氣到)”는 명제는 기 수련자가 절대 잊지 않아야 할 요결이다. 왜냐하면 이 명제는 양생과 수도에 있어서 핵심적인 원리를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수련과 생활의 거의 모든 분야에 있어서 적용되는 이치가 되기 때문이다. 명징한 의식으로 깨어있는 그 순간에 수련자는 존재하는 것이다.

 

노자가 말했다. “몸을 닦을 때는 몸으로써 몸을 보고, 천하를 닦아 나갈 때는 천하로써 천하를 보라.” 참되고 두루한 덕이 여기에 있느니!

 

잘 심은 자의 것은 뽑을 수 없고,

잘 껴안은 자의 것은 뺏을 수 없다.

자손들이 제사 지내는 것이 끊이지 않는다.

그 길을 내 몸에 닦으면 그 덕이 곧 참되며,

그 길을 내 집에 닦으면 그 덕이 곧 남음이 있으며,

그 길을 내 마을에 닦으면 그 덕이 곧 오래가고,

그 길을 내 나라에 닦으면 그 덕이 곧 풍요로우며,

그 길을 천하에 닦으면 그 덕이 곧 두루한다.

그러므로

그 몸으로써 몸을 볼 것이요,

그 집으로써 집을 볼 것이요,

그 마을로써 마을을 볼 것이요,

그 나라로써 나라를 볼 것이요,

그 천하로써 천하를 볼 것이다.

내 어찌 감히

천하의 그러함을 안다고 말하리요?

이 때문일진저!

 

善建者不拔, 선건자불발

善抱者不脫, 선포자불탈

子孫以祭祀不輟, 자손이제사불철

修之於身, 其德乃眞, 수지어신 기덕내진

修之於家, 其德乃餘. 수지어가 기덕내여

修之於鄕, 其德乃長, 수지어향 기덕내장

修之於國, 其德乃豊, 수지어국 기덕내풍

修之於天下, 其德乃普, 수지어천하 기덕내보

故以身觀身, 고이신관신

以家觀家, 이가관가

以鄕觀鄕, 이향관향

以國觀國, 이국관국

以天下觀天下. 이천하관천하

吾何以知天下然哉, 오하이지천하연재

以此 이차 (54)

 

잘 심은 자의 것은 뽑을 수 없고(善建者不拔), 잘 껴안은 자의 것은 뺏을 수 없다(善抱者不脫).”는 도의 덕을 말함이다. 우리 안에 잘 세워지고 잘 껴안고 있는 도의 덕은 쉽게 무너지지도 않는다. 외부의 어떤 난관이나 재난이 와도, 도를 잘 닦아 그 덕을 잘 체화하고 있으면 굳건하게 존재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런 악재도 잘 보듬고 소화시킴으로써 호재로 바꿀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하니 이를 흠모하는 자손의 제사가 끊이지 않는다고 했다.(子孫以祭祀不輟)

 

도를 자신 안에서 닦고(修之於身), 가정에서 닦고(修之於家), 마을에서 닦고(修之於鄕), 나라에서 닦고(修之於國), 천하에서 닦으면(修之於天下), 그 덕이 곧 참되며(), 남음이 있으며(), 오래가고(), 풍요로우며(), 두루한다().”는 말은 공자가 말한 수신修身, 제가濟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의 뜻과도 통한다.

 

그런데 그 몸으로써 몸을 볼 것이요(以身觀身)”라는 말은 어떻게 읽어야 할까? 몸으로써 몸을 본다는 말을 이해하기 위한 열쇠를 우리는 깨어있음’, 혹은 깨달음에서 찾을 수 있다. 이를테면 우리가 잠들어있어 꿈을 꾸는 동안에는 그 꿈의 내용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그러나 잠을 깨고 나면 그 꿈속의 모든 스토리들이 허상이라는 사실을 깨우치게 된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꿈을 꾸는 동안에 깨어있을 수 있다면, 그리고 깨어있어 그 꿈의 내용들을 바라볼 수 있다면, 그것들이 허상이고 가짜라는 사실을 꿈을 꾸는 바로 그 순간에, 즉각 알아차릴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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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지금 내 몸의 어딘가에 혹이 자라고 있다고 해보자. 혹이 자라고 있는데도 바쁘다 보니 알아차리지 못하고 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다고 하자. 그렇게 되면 그 혹은 아직 내 몸의 일부로서 인정받지 못한 경우가 될 것이다. 그 혹에 대해서 깨닫지 못하고 있는 동안에는 그 혹은 나하고 아무 상관도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마음속의 번뇌도 마찬가지다. 사실 우리가 사는 동안 우리의 마음속에는 티끌처럼 많은 번뇌 망상이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데도 이것들을 깨닫지 못하고 지나간다. 깨닫지 못하고 스쳐 지나가는 순간들과 번뇌들이 의 일부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의 생각이나 삶과는 무관한 것들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그 번뇌의 순간에 내가 깨어있게 된다면, 그것들은 의 일부나 전부로서 인정되고 받아들여지게 된다.

 

오로지 깨어있음으로써만 나는 로서 오롯하게 존재하게 된다는 말이다. 깨달음을 통해서만 그것들은 존재의 의미를 찾게 된다는 말이다. 내가 혹 법적으로 등기된 땅이 있다하더라도 그 땅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면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그 땅의 주인으로서 자격이 상실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만일 주인의 자격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그 땅에 대한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깨달은 다음에야 이것이 내 땅임을 알게 된다.

 

몸과 마음에 대해서도 똑같은 이법이 적용된다. 깨닫지 않으면 그 순간의 마음이 일 수 없고, 깨닫지 않으면 그 순간의 몸이 의 몸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깨달음이 없으면 그 삶이 참된 의 삶이라 말할 수도 없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깨닫는다, 깨어있다는 말은 주체(보는 자)와 대상(보이는 자)으로 분열됨이 일어나지 않고 합일되어 있음을 의미하게 된다. 깨닫지 못할 때는 주객의 분리와 분열의 상태가 지속될 것이나, 깨달은 이후에는 그 분리와 분열되었던 주객이 통합된다. 온전히 하나 됨이 이루어진다.

 

우리 몸과 마음의 주인으로서 우리가 깨어있느냐?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몸과 하나가 되어있는 것과 같으니, 몸으로써 몸을 보게 된다(以身觀身). 우리 몸속의 오장육부와 기관들, 세포 하나하나에 다 깨어있으니, 몸 따로 마음 따로가 아니게 된다. 몸이 곧 마음이고 마음이 곧 몸이 되는 심신합일心身合一의 도가 여기에 있다. 이로써 몸 안에 내재한 덕에 대해 깨어있게 됨이니, 그러므로 그 덕이 참되다(其德乃眞)”고 말한 것이다.

 

그 집으로써 집을 볼 것이요(以家觀家)” “그 마을로써 마을을 볼 것이요(以鄕觀鄕)”, “그 나라로써 나라를 볼 것이요(以國觀國)”, “그 천하로써 천하를 볼 것이다(以天下觀天下)”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도를 내안에 체달하게 되니 내 안의 덕이 되고, 도가 가정과 마을과 국가와 천하에 가득 차니 두루한 덕을 갖추게 된다. 스스로가 스스로를 비추어보는 거울이 됨이니 자연의 도가 그러하게 된다.

그러므로 내 자신을 수행하는 도리가 천하로써 천하를 보는 도리와 다르지 않게 되고, 이로써 세상살이의 도리에 밝아지게 된다.

 

나에게 조금 만큼의 지혜가 있어서

큰 길을 행하라고 한다면,

오로지 샛길로 빠질까봐 두려울 뿐이다.

큰 길은 평탄하고 쉬운데, 사람들은 샛길을 좋아한다.

 

使我介然有知, 사아개연유지

行於大道, 행어대도

唯施是畏. 유시시외

大道甚夷而民好徑. 대도심이이민호경(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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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길은 평탄하고 쉬운데 왜 사람들은 샛길로 빠져들까? “조그마한 지혜만 있어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라고 술회한 노자의 감상이 마음에 와닿는 것 같다. 큰길로 가지 못하고 샛길로 빠져 두리번거리고 있는 중생들에 대한 노자의 안타까움이 짙게 배어있는 대목이다.

 

[장자, 대종사편]에 나온 진인眞人에 관한 이야기다.

옛날 참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거부하지도 않았고, 스스로의 덕을 뽐내지도 않았고, 어떤 일도 마음에 두지 않았다. 이런 사람은 잘못을 저질러도 후회하지 않으며, 잘되더라도 자랑하지 않는다. 또한 그는 높은 곳에 올라서도 무서워하지 않으며, 물에 빠져도 젖지 않으며,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는다. 그의 지혜가 도에 다다른 것이 바로 이와 같은 것이다.

 

옛날의 참사람은 잠을 자도 꿈을 꾸지 않았으며, 깨어나서도 근심 걱정이 없었다. 음식에 있어서도 맛있는 반찬을 구하지 않았으며, 호흡은 매우 깊었다. 참사람은 호흡을 발뒤꿈치로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목구멍으로 헐떡거린다. 사물에 매어있는 사람은 목소리가 마치 무언가를 토하는 듯하고, 욕심이 많은 사람은 천기天機가 얕게 된다

 

글 사진/민웅기(<태극권과 노자>저자,송계선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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