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퉁 만리장성에서 터닝메카드를

20151127_IMG_5344s.jpg » 도교가 성하고 손오공의 고향이라는 노산(라오샨) 꼭대기에서 손오공 회사 장난감 짝퉁으로 놀고 있는 앙큼군. 사진 권귀순 제공.

 “셋업 메카드! 날 위해 싸워라. 메카니멀 고우 고우 고우 고우…”

앙큼군의 목청은 무척이나 낭랑하고 깔끔하게 떨어졌다. ‘Go go go go…’ 마지막 주문은 중국 노산 봉우리에 맞부딪히며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멀미가 나서 죽겠다던 그 앙큼이가 맞나 싶게 노산 최고봉에서 터닝메카드를 뿌려대는 손 스냅은 날렵했고 “파이널 어빌리티”를 외치며 한바퀴 휘도는 몸짓은 태극권을 보는 듯했다.

중국 특유의 향신료 냄새에 인상을 쓰며 중국시장 입구에 들어서던 앙큼이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왜 아닐까? 발밑에는 앙큼의 시선을 사로잡는 장난감이 있었다. 한국에서의 핫 아이템이 중국이라고 없을 리 있나. 가격은 한국 정가의 절반값이었다. 가이드 친구가 주인에게 살짝 물어보니 ‘쩐더’(진짜)가 아니라 짝퉁이란다. 쩐더는 예상과 달리 한국보다 서너배 비쌌다. 

 “앙큼아, 두개 골라봐.”

20151127_113213s.jpg » 터닝메카드 에반과 알타. 사진 권귀순 제공.

선심 썼다. 앙큼군은 엄마 맘이 변할까 싶어 얼른 메카니멀(카드를 갖다대면 각종 동물, 드라큐라 등으로 변신하는 로봇자동차) 중 에반과 알타를 집었다. 호오가 분명한 앙큼이는 뭘 고를 때 망설이는 법이 없다. 그러나 꼭 맞물려 있어야 할 자동차는 카드를 갖다 대기도 전에 후루룩 제멋대로 변신해버렸다. 헐겁기 이를 데 없는 짝퉁이었건만, 앙큼이는 천하의 보물을 얻은 듯 이미 통통거리는 발걸음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날은 손오공의 고향이라고 알려진 노산을 향하는 길. ‘손오공’이라는 장난감 회사 것을 모방한 짝퉁 장난감을 들고 신나하던 앙큼이는 담배 쩐내나는 택시에 탄지 얼마 안돼 “속이 안좋아”를 반복했다. 창문을 내리고 겨우겨우 달래 1시간 가까이 달렸다. 금방이라도 도인이 튀어나올 것 같은 노산을 눈앞에 두고 앙큼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 역류하기 직전의 모습이다. 택시를 공사판 찻길에 세웠다. 밖으로 나온 앙큼군은 조금 있다 정신을 차리고선 “다시는 택시를 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아직 1.5킬로나 남았는데…. 되돌아갈 때는 어쩌라고? 우리는 아수라장 공사판 갓길을 올레길 걷듯 걸었다. 하루 예약된 택시는 엉금엉금 뒤따라 왔다. 

앙큼군은 매표소에서 표를 끊고서 버스를 타고 산 중턱까지 뱅글뱅글 오를 때도 멀미 때문에 사색이 됐다. 아래 그물망도 없이 상공에 둥둥 뜬 케이블카를 탔을 땐 내가 멀미가 날 지경이었다. 앙큼이에게 케이블카는 놀이기구였다. 하나도 안무섭고 어지럽지도 않다고 했다. 케이블에서 내리자마자 “야~ 만리장성이다.” 얼핏보면 꼭대기까지 꼬불꼬불 놓인 계단길이 만리장성 성벽같기도 했다. 


 “엄마, 나 중국 가면 만리장성 가볼래.”

앙큼이는 중국이 서울만한 줄 안다. 중국 가면 당연히 만리장성을 볼 수 있을 줄 알고 막무가내로, 생각날 때마다 졸랐다. 

 “만리장성은 베이징에 있어서 못가. 우리는 칭따오로 가는데, 베이징은 거기서 아주 멀단다.”

3월에 가기로 했다가 7월로 밀렸다가 다시 11월로 늦춰진 중국 여행. 3월에는 떠나기 전날 할아버지의 부음을 듣고 황망하게 항공권과 비자를 날렸다. 7월엔 메르스 때문에 입국 심사에서 차질이 있을까 싶어 포기했다. 결국 여행 비수기 11월로 앙큼군의 첫 해외여행 일정은 늦춰졌다. 결과적으로 1년 내내 앙큼이는 중국 가고 싶어 안달인 상태로 지내게 됐다. 

20151127_만리장성.jpg그림책 <만리장성>(리젠 지음, 김세영 옮김/씨드북)이 앙큼군의 눈에 든 건 그래서일 것이다. 화선지 채색화 느낌의 그림책을 보는 순간 앙큼이는 쏘옥 빨려들었다. 중국 작가의 그림책은 처음이라 반응이 궁금했던 터다. 일본 고양이 그림책만 좋아하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네. 아기자기한 일본 그림책과 달리 대국의 시원함이 느껴지는 동양화풍의 그림과 이야기 중간중간 망루, 봉화대, 초나라, 진나라, 한나라, 명나라 등에 대한 파란색의 참고설명이 덧붙여 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앙큼이의 눈은 샤오밍이라는 소년을 쫓아다녔다. 

<만리장성>은 <진시황 병마용> <자금성>과 아울러 ‘신통방통 샤오밍과 함께하는 중국 문명 시간 여행 시리즈’다. 2000년 넘게 걸려 완성한 유네스코 등재 세계 최대의 인공 건축물 만리장성. 유독 긴 것을 좋아하는 앙큼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온 건축물임에 틀림없다. ‘기차광’ 앙큼군은 몸통이 긴 뱀도 좋아한다. “뱀은 왜 좋아?” “뱀은 모기를 다 잡아먹으니까 좋지.” (이건 요즘 대답이고, 이전에는 귀엽다며 좋아했다.)

호기심 많은 샤오밍은 아빠랑 만리장성을 향한다. 아빠는 베이징에서 가깝고 일반인에게 가장 먼저 개방된 팔달령으로 가는 버스에서 수천년 동안 황제들이 고치고 다시 만들며 단단해진 성의 내력을 말해준다. 커다란 성문, 계단으로 이어진 성의 꼭대기…. 반밖에 못오른 아빠에게 꼭대기에서 손짓하는 샤오밍에 빙의된 앙큼이는 아빠를 이겼다는 대리만족을 함께 느낀다. “야호, 아빠는 여기까지밖에 못왔네.”

날은 저물고 아빠와 멀어져 성벽을 신나게 달리던 샤오밍 앞에 등불을 든 갑옷 할아버지가 나타난다. 이 책의 재미는 이 지점이다. 갑옷 입은 만리장성 수호대장은 번쩍 번쩍 시간여행을 한다. 처음 간 곳은 2600년전 초나라, 성벽공사가 한창인 광경이 펼쳐진다. 바로 만리장성의 맨 첫 모습이다. 수호대장이 등불의 심지를 세우자, 다시 2200년 전 진나라로 뿅! 마침 중국 최초의 황제 진시황제가 마차를 타고 만리장성을 순찰하는 중이니, 때마침 잘왔다. 병마의 사열도 볼만하다. 앙큼군은 “어, 이거잖아” 하면서 중국에 사는 이모에게 받은 진시황 병마용 열쇠고리를 흔든다. ‘차이나’(China)가 중국 최초로 통일을 완성한 나라 ‘진’(chin)나라에서 나왔다는 사실도 알려준다. 

다음은 한자(漢字)가 유래된 한나라로. 2천년 전 이미 1만 킬로미터를 넘어선 만리장성. 장대한 성벽 길이에 그림의 원근도 아득해진다. 북방의 침략에 신경을 곤두세웠던 600년전 명나라 때는 더욱 화려하고 거대해졌다. 작가는 나뭇가지로 쌓은 성벽, 흙을 다져올린, 성벽, 벽돌이나 돌로 쌓은 성벽, 자갈과 갈대를 섞은 성벽 등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른 재료도 그림으로 이해를 돕는다.

시간여행이 끝나면 산해관, 망경루 등 구석구석 볼거리를 살펴보는 공간여행도 한다. 전쟁이 끝나면 성문을 열어 성 안팎이 시끌벅적한 시장이 됐다. 포목상, 야채상, 물지게꾼 등이 좌판을 벌여놓고 있다. 샤오밍은 망루에 있던 병사가 “적이 나타났다” 소리치자 봉화대에 연기가 다다다닥 차례차례로 피어올라 삽시간에 황궁까지 소식이 전해지는 광경도 바라보며 감탄한다. “샤오밍” 아빠가 부르는 소리에 현실로 돌아오며 과거여행은 끝난다. 앙큼군도 잠시 있다 현실로 돌아왔다.  

20151127_IMG_5519s.jpg » 청도 5.4광장 바닷가에서 만난 미키마우스 할머니들. 앙큼이에게 다가와 유쾌하게 사진을 찍고는 돈을 달라 했다. 그것도 찍힌 사람당 30위안씩, 우리돈으로 하면 1만5천원을 순식간에 뜯겼다. 사진 권귀순 제공.

“나는 세상에서 중국이 제일 좋아.”

“대한민국은?”

“그래. 대한민국 다음에 중국이 제일 좋아.”

“중국 여행 땐 뭐가 제일 재밌었어?” 

“어어 산꼭대기에서 터닝메카드 배틀한 거.”

“또?”

“어어 아빠가 택시 안에서 내 바지에 오줌싼 거. 아하하하하하…”

녀석은 라오산 등반 다음날 피곤했던지, 택시 뒷자리 ‘아빠 시트’에서 고롱고롱 자다 아빠무릎에 오줌을 싸버렸다. 바지를 따로 갖고 다닐 리 없는 나이라 방법이 없었다. 칭따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장개석 별장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 택시를 돌려 복합쇼핑몰로 갔다. 새 바지를 사 입히고 나자 뽀송해진 앙큼군. 뭐 뀐 놈이 성낸다고, “아빠가 오줌싸는 바람에 내 바지 다 젖었잖아.” 하며 큰소리 쳤다. 참, 노산 꼭대기에서는 큰 거 두 덩이로 영역표시도 하고 왔다. 

앙큼군에게 독일 식민지 시절을 간직한 칭따오의 유럽풍 건축물이 기억에 남은 것 같지는 않다. 현대사의 그늘조차 상품으로 포장한 ‘중국 자본주의’에서 오래된 문명의 멋을 읽기는 어려운 여행이었지만, 엄마 아빠와 함께했던 시간이 그저 즐거웠나 보다. 잠들 때마다 하는 말. 

“엄마, 중국 또 가고 싶어요.” 

“그럴까? 우리 <만리장성>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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