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 냉방시스템에 숨어 있는 성차별 에너지식량

t6.jpg » 오늘날 빌딩들의 냉방 시스템은 남성만을 고려해 만들어졌다. 한겨레신문 자료사진

 

남성의 대사율에 초점을 맞춘 냉방시스템

 

“오마하(미 중북부 네브라스카주의 도시)의 여름은 뜨겁다. 온도가 화씨 100도(섭씨 37.7도)를 넘나든다. 하지만 디지털 마케터인 몰리 마하나(Molly Mahannah)는 끄떡없다. 그녀는 사무실에서 서랍 속의 카디건이나 큼지막한 스웨터를 꺼내 입는다. 그런 다음 이렇게 말한다. ’책상에는 브리또처럼 내 몸을 둘러쌀 수 있는 큰 담요도 있어요. 최근엔 너무 추워서 차 안에 들어가 온도를 100도(섭씨 37.7도)에 맞춰놓고 5분간 몸을 덥히기도 했습니다.' 24살의 마하나는 사무실에서 일하는 동안 자신이 마치 드라마 <왕좌의 게임>에 나오는 으스스한 좀비 '화이트 워커'가 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트위터에 포스팅했다.”
최근 <뉴욕 타임스>에 소개된 한 미국 직장여성의 여름나기 장면이다. 무더운 여름날, 오히려 찬 에어컨 바람 때문에 두텁고 긴 옷을 입어야 한다고? 남성에겐 요령부득인 이런 하소연을 하는 여성 직장인들이 제법 있다. 강력한 실내 냉방 시스템 때문이다. 굳이 외지에 등장한 사례를 빌지 않더라도 요즘 우리 주변에서도 몰리 같은 여성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반면, 바로 옆에 있는 남성들은 반팔 상의에 반바지 차림을 하고서도 덥다고 난리다.

그런데 이런 풍경 뒤에는 남성에게 초점을 맞춘 빌딩 온도조절 시스템의 역사가 자리잡고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냉방장치 뒤에 성 차별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는 것이다. 

네덜란드 마스트리히트대 연구진은 최근 <네이처 기후변화>에 발표한 '빌딩의 에너지 소비와 여성의 열 수요' 논문을 통해, 오늘날 대부분의 빌딩 온도조절 시스템은 수십년 전 남성의 대사율(소비하는 에너지의 양)을 이용한 낡은 공식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밝혔다.

 

 

t7.jpg » 구글의 스마트홈 온도조절장치 '네스트'. 네스트 제공

 

1960년대 직장환경을 토대로 만든 모델

 

논문 주저자인 보리스 킹마(Boris Kingma)에 따르면, 현대의 빌딩 온도조절 시스템은 1960년대에 개발된 열쾌적감(thermal comfort) 모델을 따르고 있다. 열쾌적감이란 특정 온도 조건에서 주관적으로 만족감을 느끼는 마음 상태를 말한 것으로, 건물 설계시 냉난방의 주된 기준으로 활용되는 개념이다.

이 열쾌적감을 결정하는 기본적인 환경 요인은 네 가지로 분류된다. 공기 온도, 복사 온도(물체의 온도), 습도, 풍속이다. 여기에 의복과 대사율이라는 두 가지 개인별 요인이 덧붙는다. 그 중에서도 문제는 대사율이다. 사람의 나이, 신장, 체중, 근육량, 업무 형태 등 수많은 변수에 따라 개인별로 대사율이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무리 완벽한 온도를 구하려 해봤자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는 일이다.

 

05289621_P_0.jpg » 빌딩 냉방시스템 설계의 기준 모델이 된 직장인 남성의 쓰리피스 정장 차림. 한겨레신문 자료사진

 

현재 국제 표준으로 쓰이고 있는 열쾌적감 산출 공식은 1970년 덴마크의 엔지니어 올레 팡에르(Ole Fanger)가 개발한 것이다. 당시 그는 쓰리피스 수트(재킷, 조끼, 바지)를 입은 몸무게 70㎏인 40세 남성의 안정시대사율(resting metabolic rate)을 기준으로 열쾌적감을 결정하는 공식을 만들어냈다. 안정시 대사율이란 쉴 때 소비하는 열량을 말하는 것으로, 하루에 소비하는 열량의 60~75%를 차지한다. 그가 이런 기준을 사용한 것은 1960년대 직장 환경을 기반으로 했기 때문이다. 이 공식이 개발된 당시의 직장은 남성들의 공간이었다. 선진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하지만 지난 수십년 사이 직장환경은 급변했다. 전체 노동력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비중이 몰라보게 높아져 남성을 위협할 정도가 됐다. 한국의 경우만 보더라도 대학에선 여학생들이 태반을 차지하는 과들이 대다수이고, 기업에선 여성들이 신입사원 모집 성적에서 상위권을 싹쓸이하고 있다.

여성들은 남성들보다 대사율이 떨어진다. 남성에 비해 체구가 작고 근육이 적기 때문이다. 그 결과 팡게르가 개발한 현재의 빌딩 온도조절 시스템 모델은 여성의 안정시대사율을 과대평가하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고 연구진은 지적했다. 한여름에 실내에서 여성들이 오들오들 떨며 일하는 기현상의 탄생 배경이다.

 

student-849821_640.jpg » 강력한 냉방을 즐기는 남성 옆에서 여성들은 두텁고 긴팔 옷을 입어야 한다. PIXABAY.COM

 

여성 대사율은 20~32% 낮아, 남자보다 3도 높게

 

연구진은 따라서 빌딩의 실내 온도를 결정하는 공식을 바꿔 냉방 시스템의 성 차별을 해소하자고 제안했다. 그 핵심은 실내 온도를 조금 높이는 것이다. 온도를 높이면 에너지소비가 줄어 지구온난화와의 싸움에도 도움이 된다.

45년 전 팡게르 공식이 내놓은 쾌적 실내온도는 섭씨 21도였다. 그렇다면 실내 온도를 어느 정도 높이는 것이 적당할까? 마스트리히트대 연구진은 이를 알아보기 위한 실험을 했다. 연구진은 우선 평균 나이 23세, 몸무게 65킬로그램인 여성 16명을 여름용 얇은 옷을 입게 한 채 섭씨 24도의 특수한 방에 들여보냈다. 이 방은 산소 흡입량과 탄소 배출량을 측정하는 장치를 갖춘 방이다. 그러고선 이들에게 책상에 앉아 이메일을 보내거나 책을 읽는 등 가벼운 일을 하도록 주문했다. 실험을 진행하는 동안 이들의 손과 배를 비롯한 몇몇 부위의 피부 온도를 쟀다. 또 온도를 재는 알약을 삼키도록 해 체내 온도도 측정했다.

그 결과, 여성의 평균 대사율은 현재의 빌딩 온도조절 시스템에 적용된 표준치보다 20~32% 낮게 나타났다. 연구진은 이 결과를 토대로, 실제 남성과 여성의 대사율을 고려해 현재의 표준치를 조정할 것을 제안했다. 예를 들어 체중이 많이 나가는 사람들은 더 빨리 체온이 올라가고, 나이 많은 사람들은 대사율이 더 낮아지는 것 등을 반영해야 한다는 것이다. 같은 논리로 냉방장치가 유럽인 기준에 맞춰져 있다면, 아시아인들에게는 너무 낮게 설정돼 있다고 봐야 한다. 아시아인들의 체중은 유럽인보다 평균 30% 덜 나가기 때문이다. 실제로 서유럽이나 미국으로 여행을 하는 경우, 호텔의 냉방온도가 우리한테는 지나치게 낮아 한기를 느끼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럼 실제 실내온도는 어떻게 조정하는 것이 좋을까? 연구진은 자신들의 실험 결과를 토대로, 실내온도 섭씨 24도를 새로운 실내온도 기준으로 제안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제안을 뒷받침하기 위해 남녀간 선호 온도 차이가 섭씨 3도가 난다는 이전의 한 연구 결과를 인용했다. 2002년 일본에서 이뤄진 연구 결과에 따르면 여성이 선호하는 온도는 25.2도, 남성이 선호하는 온도는 21.1도이다. 하지만 사무실에서 겨울에는 더 따뜻한 옷을, 여름에는 시원한 옷을 입을 준비가 돼 있다면 온도조절 장치에 대한 요구도 더 느슨해질 것이다.

 

t4.jpg » 에어컨 실외기가 빼곡한 한 건물 외벽. 냉방 시스템을 여성을 기준으로 조절하면 에너지 소비도 줄이고 업무 생산성도 높아진다. 한겨레신문 탁기형 선임기자

 

여성 중심이 되면 에너지 소비는 줄고 생산성은 높아진다

 

연구진은 자신들의 기준치가 모든 사람을 만족시켜주지는 못할 것이지만, 지금의 기준치보다 에너지를 덜 소비하게 해준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들에 따르면 주거용 건물과 업무용 사무실의 에너지 소비로 인한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지구 전체 배출량의 30%에 이른다. 특히나 에너지 소비 변화의 80%는 건물 안에 있는 사람들이 어떤 행동 패턴을 보이느냐에 좌우된다고 한다. 하지만 에너지 절약을 더 생각한다면 이런 방식에 덧붙여 전통적인 냉각 방식도 적극 활용할 만하다. 예컨대 창문을 활짝 열어 젖히거나 부채를 부치고, 반바지 차림으로 일한 것 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실내온도는 생산성에도 영향을 미친다. 2004년 코넬대 연구 결과에 따르면, 직장인들은 따뜻한 곳보다는 쌀쌀한 환경에서 실수를 더 많이 하는 경향이 있다. 한달여에 걸친 이 연구에서 실내온도가 20도에서 25도로 올라갈 때 타이핑 실수는 44% 감소하고, 타이핑 생산성은 150% 높아졌다는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약간의 실내온도 상승이 에너지를 줄이고 생산성은 높이는 1석2조의 효과를 가져오는 셈이다.

21세기 지구촌 사회의 특징 중 하나로 각 영역에서의 여성화가 거론되고 있다. 여성의 사회진출과 여성성의 가치가 갈수록 확대되고 있는 현상을 뜻한다. 건물 실내온도 조절에서도 여성의 쾌적감이 새로운 표준으로 자리잡을지 주목된다. 미국에선 냉방온도가 정치 이슈로 등장하기도 했다. 2018년 8월 뉴욕주지사 토론회에서는 냉방온도 설정 기준이 40대 남성을 전제로 만들어진 것을 두고 성차별 논쟁이 벌어졌다.

 

 *2018년 8월 미국 뉴욕주지사 토론회 업데이트했습니다.

 

출처

http://news.sciencemag.org/biology/2015/08/thermostat-your-office-may-be-sexist

http://theconversation.com/why-is-it-so-cold-in-here-setting-the-office-thermostat-right-for-both-sexes-45585

http://www.washingtonpost.com/news/to-your-health/wp/2015/08/03/your-office-thermostat-is-set-for-mens-comfort-heres-the-scientific-proof/

http://fortune.com/2015/08/03/women-office-freezing-cold/ 

http://www.independent.co.uk/news/uk/home-news/women-frozen-out-by-office-aircon-systems-designed-for-male-comfort-scientists-find-10436035.html

http://www.livescience.com/51729-office-air-conditioning-energy-costs.html

http://www.nytimes.com/2015/08/04/science/chilly-at-work-a-decades-old-formula-may-be-to-blame.html

미국에서 벌어진 냉방온도 성차별 논쟁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8/31/2018083100305.html

TAG

Leave Comments


profile한겨레신문 선임기자. 미래의 창을 여는 흥미롭고 유용한 정보 곳간. 오늘 속에서 미래의 씨앗을 찾고, 선호하는 미래를 생각해봅니다. 광고, 비속어, 욕설 등이 포함된 댓글 등은 사양합니다. 

Recent Trackba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