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중국이 있어 행복했던 대전략가, 헨리 키신저의 '중국 이야기'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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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사이드가 1978년에 저술한 <오리엔탈리즘>은 3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널리 읽히는 명저다. 이 책에서 사이드는 ‘서양의 동양에 대한 지배’라는 관점에서 서양이 동양에 대한 편견과 조작, 왜곡을 어떻게 자행했는지 밝히고 있다. 오리엔탈리즘이란 서양이 만들어 낸 동양이라는 개념을 말하는 것이다. 오리엔탈리즘의 이면에는 동양은 서양에 의해 지배되어야 하고 교정되어야 하며, 관리되어야 할 대상이 된다.

그런데 이 책에서 관심을 끄는 대목이 있다.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에 대해 사이드가 평가한 대목이다.

“키신저의 방식은 <국내 구조와 대외정책>이라는 그의 논문 속에, 달리 볼 수 없을 정도로 솔직하게 나타나 있다... 키신저 이 논문에서 세계를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으로 나눈다. 그리고 선진국, 곧 서양은 ‘현실세계란 관찰자에게는 어디까지나 외재적인 것이고, 지식이란 자료의 기록과 분류(그것들은 정확하면 정확할수록 좋다)로 성립되어 있다는 사고방식에 분명하게 의존하고 있다’고 한다. 이 점에 관하여 키신저가 제시하는 증거는 뉴턴 학설에 의한 사고 혁명으로서, 그것이 개발도상국 세계에서는 지금까지 생기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일찍이 뉴턴 학설의 세례를 받지 못한 문화는, 현실세계가 거의 완전하게 관찰자 주관의 내부에 있다고 하는, 본질적으로는 뉴턴 학설 이전의 세계관을 오늘에 이르기까지도 계속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결론으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서양인에게는 뉴턴 혁명이 있었으나 그들(동양인)에게는 그것이 없었으며, 따라서 사고하는 인간으로서 서양인은 동양인보다도 훨씬 뛰어나다는 것이었다.”


 


오리엔탈리스트에서 현실주의자로


1971년에 중국을 비밀리에 방문하여 역사적인 비중 정상회담의 기초를 닦았고, 1973년에는 베트남전 해결에 대한 노력을 인정받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인물이 키신저다. 동양과의 평화를 도모하고 공동번영을 이끌어 낸 이 거인에 대한 사이드의 비판을 사뭇 놀랍다. 다름 아니라 동양이란 뉴턴 혁명을 겪지 못해서 근대화가 지체된 개발도상국이라는 ‘지배의 사상’을 가진 키신저가 어떻게 미중 정상회담을 이끌어 낼 수 있었던 것일까? 많은 의문이 제기되지만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2011년에 88세의 나이가 된 키신저는 <중국 이야기>를 통해 그 스스로 답을 내리고 있다. 그의 책 맨 마지막 부분에서 다름 아닌 오리엔탈리스트들을 비판하고 있다.

“신보수주의자들과 다른 운동가들은 민주 체제가 신뢰와 자신감으로 이루어진 관계를 위한 전제조건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이런 견해로 볼 때 (중국과 같은) 비민주적 사회는 태생적으로 위태로우며, 완력을 행사하는 경향이 짙다고 한다. 따라서 미국은 최대의 영향력이나 압력을 행사하여 미국의 안보를 위태롭게 하는 국가 안에 다양성이 생겨나게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구상의 틀 안에서 비민주사회를 다루는 미국 외교정책의 궁극적 목표는 정권 교체이다. 중국과의 평화는 전략의 문제라기보다 중국 통치의 변화라는 문제라고 그들은 말한다.”

놀라운 비판이다. 30여 년 전에 자신에게 가해졌던 것과 똑같은 논리로 키신저는 신보수주의자들의 중국에 대한 인식을 비판하고 있지 않은가? 이 책에 따르면 미국과 중국은 각기 해양문화와 대륙문화를 대표하는 국가로서 ‘공진화(共進化)’하는 존재라고 말한다. 미국과 중국은 제로섬 게임의 관계도 아니고 지배하는 관계도 아닌 서로의 발전을 촉진하는 관계라는 뜻이다. 이렇게 보면 34년 전에 사이드가 키신저를 오리엔탈리스트라고 비판했던 바로 그 논거를, 키신저는 신보수주의자들을 비판하는데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물론 키신저가 젊은 시절의 오리엔탈리즘을 다 청산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할지라도 오랜 외교의 경험에서 터득한 정치적 현실주의(레알폴리틱)에서 지배와 피지배가 아닌 공존의 철학을 완성도 높게 그려내고 있다. 남북한이 갈등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매우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한 메시지다.

키신저는 동서양이 평화를 이루는 구체적인 방향도 제시하고 있다. 2차 대전 후에 유럽이 평화를 이루는데 ‘대서양 시대’라는 관념이 큰 기여를 했듯이, 미국과 중국이 평화를 도모하는 것은 바로 ‘태평양 시대’라는 공동체 개념이 될 것이라고 본다. 여기에는 중국이 이제는 어엿한 발전 국가로서 국제사회의 한 역할을 책임지고 있는 중요한 존재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90년대 말의 아시아 금융위기의 충격을 흡수한 나라가 중국이었고, 현재 세계적인 금융위기를 구원해 줄 당사자도 중국이다. 서양이 만들어 낸 금융 자본주의의 실패를 동양의 중국이 보완해 주는 이 현실을 무시하고, 아직도 중국을 동양의 저발전 국가이며 서양의 관리 하에, 또는 견제 받아야 할 대상으로 인식하는 신보수주의자에게 키신저는 “틀렸다”고 말한다.



 

느긋한 중국식 시간 개념


<중국 이야기>(민음사 간)는 매우 놀라운 책이다. 놀라울 정도가 아니라 전율을 느끼도록 하는 경이로운 책이다. 키신저가 아니면 집필할 수 없는 풍부한 외교 내막과 사상의 역정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빼어난 문장력과 풍부한 교양이 곁들여져 있는 이 책은 책 읽는 재미의 남다른 일면을 느끼게 한다. 총 18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1~8장에서 중국의 고대 문화와 역사로부터 문화대혁명까지의 역정이 그려진다. 여기에서 키신저가 오리엔탈리스트로 공격받을 수 있는 약간의 동서양 문화 차이에 대한 설명이 나오는데, 서양의 역사가 주로 체스판이라면 중국의 역사는 바둑판이라는 비유가 그것이다. 체스는 힘의 중심이 어디인지, 결정적 지점이 어디인지를 파악하고 힘을 집중하는 방법으로 운영되는 게임이다. 적의 중심이 완전히 궤멸되어야 게임은 끝난다. 이런 사상으로 클라우제비치와 같은 전쟁 사상과 서구식 외교라는 것이 생겨났다. 그런데 바둑은 일정한 면적을 차지하면서 상대방을 포위하는 게임이다. 다양한 중심과 세력이 교차되는 상황에서 한 쪽이 완전히 궤멸되지 않더라고 공존하면서 경쟁하는 그런 게임이다. 이 대목에서 키신저가 톨스토이의 “장기는 과학이고, 바둑은 철학이다”라는 말을 인용했더라면 더 좋았으리라.

서구와는 시간 개념도 다르다. 마오저뚱은 1971년에 키신저를 만났을 때 타이완 문제를 말하면서 “100년 후에나 통일되면 될 것”이라고 말한다. 1958년의 진먼다오(金門島)에 포격을 가할 때도 홀수 날에만 쏘고 짝수 날에는 쏘지 않았으며 공휴일에는 쉬었다. 미군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포격 거리도 세심하게 조정했다. 점령할 뜻이 애초부터 없었다는 얘기다. 1993년에 덩샤오핑을 만난 키신저가 마오저뚱의 말을 상기시키면서 “100년 후에나 통일할 것 아니냐”고 묻자 덩샤오핑은 껄껄 웃으며 “22년 지났으니 이제 77년 남았다”고 응수한다. 조급하게 누구를 점령하고 궤멸시키는데 연연하지 않는 중국은 느긋하다. 1975년에 마오저뚱과 키신저가 나눈 대화록의 일부다.


마오저뚱 : 타이완이 미국의 손 안에 있는 편이 더 나아요. 지금 나한테 돌려주겠다고 한다면, 난 달갑지 않소. 왜냐하면 갖고 싶지 않거든. 그곳에는 반혁명 분자들이 너무나 많단 말이요. (손짓을 하면서) 우린 지금부터 100년쯤 지나면 타이완을 원할 테고, 그러면 그것을 두고 서로 가지려고 싸울 것이오.

키신저 : 설마 100년 이란 말씀입니까?

마오저뚱 : (손을 들어 제스처를 취하고 숫자를 헤아리며) 꼬집어 말하기는 어렵지요. 5년, 10년, 20년, 아니면 100년, 뭐라고 하기는 어려워요. (천장을 가리키며) 그리고 내가 천국에 가서 하나님을 뵙게 되면, 하나님께 그럴 거요. 지금은 타이완을 미국의 보호 아래 두는 편이 낫다고요.

키신저 : 주석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하나님께서 놀랄 것입니다.

마오저뚱 : 아니요. 하나님은 우리가 아니라 당신네를 축복하니까. 놀라진 않을 거요. (손을 흔들며) 내가 호전적인 장수인 데다 공산주의자라서, 하나님은 우리를 좋아하지 않아요. (세 명의 미국인을 가리키며) 그분은 당신, 당신, 그리고 당신을 좋아해요.



비바람이 치니 제비가 바빠진다


천하(天下)와 중화(中華) 중국의 세계관, 우주관은 서양열강의 모진 침략과 굴욕적인 역사에도 불구하고 1949년에 공산주의로 통일된 중국에서 다시금 부활되었다. 그러나 과거와 다른 점은 중국의 통일과 발전을 위한 철학이 되었고, 평화공존의 길을 닦았다. 9장부터 시작되는 미국과 중국의 접촉의 역사는 매우 인상적이다. 소련의 위협에 직면한 중국이 미국을 끌어들이기 위해 키신저를 환대하는 중국은 “미국과 대결할 뜻이 없다”는 점을 한사코 주장한다. 끊임없이 미국을 끌어들이고 환대하는 중국의 전략에 대해 키신저는 삼국지에 나오는 제갈량의 ‘공성계(空城計)’에 비유한다. 이 이야기에는 한 지휘관이 아군보다 월등히 강한 군대가 다가오고 있음을 깨닫는다. 저항했다가는 파멸할 것이 불을 보듯 뻔하고, 투항했다가는 미래의 통제를 상실할 것이므로, 그는 하나의 전략을 택한다. 그는 성문을 활짝 열고, 스스로 편하게 휴식하는 자세로 앉아 현악기를 뜯고, 그 뒤에서는 조금도 당황하거나 우려하는 기색이 없이 정상적인 삶의 모습이 펼쳐진다. 침략해 오던 장수는 이 같은 침착함의 뒤에는 무언가 복선이 깔려 있다고 해석하여, 진군을 멈추고 퇴각한다.

마오저뚱은 키신저에게 “핵전쟁이 일어나 중국인이 3억 명이 죽어도 중국은 이긴다”고 말한다. 소총과 좁쌀로 버티면 예전에 열강의 침략을 받고도 이긴 것처럼 결국은 중국이 이긴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팽창하는 소련이 중국을 포위하지 않도록 전략적인 조치가 필요하기 때문에 미국과 손을 잡으려는 뜻을 솔직하게 전달한다. 그리고 1972년에 마침내 닉슨 대통령을 미국으로 불러들여 정상회담을 진행한다. 마침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서 점점 불리해져 가는 상황에서 마찬가지로 소련의 위협을 절감하고 중국과 손잡는다.

그러던 마오저뚱도 말년이 다가오자 시인이자 혁명가답게 중국의 미래에 대한 자신의 심경을 키신저에게 털어 놓는다. 여기에서 나오는 비밀 대화록은 서사적이다.    

      

마오저뚱 : 세상은 조용하지 못하고, 폭풍우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비바람이 가까워지니 제비들이 바빠집니다.

키신저 : 맞습니다. 저는 제비가 비바람에 끼칠 수 있는 영향보다도 우리가 폭풍우에 좀 더 많은 영향을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오저뚱 : 비바람이 들이닥치는 것은 미룰 수가 있어요. 하지만 언젠가는 오는 것을 완전히 막기란 몹시 어렵지요.


여기서 말 하는 비바람은 소련의 팽창이다. 이윽고 미국과 중국은 소련의 위협에 공동 대응하는 ‘준동맹’의 관계로 발전한다. 1974년에 덩샤오핑은 미국을 방문한다. 문화혁명 당시에 수모를 겪은 작은 체구의 그는 이제껏 문화혁명의 유산을 완전히 청산하고 개인의 창의성을 발전의 핵심으로 하는 대전환을 시작한다. 국내 정책 중에서 바뀌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었지만 미국과의 대화 및 관계정상화라는 외교정책만큼은 계승한다. 여전히 소련은 가장 위험한 전쟁의 원천이었다. 덩샤오핑은 일본과도 관계 정상화를 시도했다. 1978년에도 미국을 방문한 그는 카터 대통령에게 “소련이 손을 대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든 그 손가락을 잘라 버려야”한다고 말했다. 이 말을 하기 위해 그는 미국에 온 것이다. 바야흐로 핵전쟁의 가능성이 구체적으로 감지되었다. 베트남이 소련과 손을 잡고 인도차이나를 장악하려는 낌새가 보였다. 1979년에 중국은 베트남을 공격했다. 이어서 미국과 중국의 세 번째 코뮤니케, 덩샤오핑과 레이건 대통령과의 새로운 대화가 시작되었다. 이 과정에서 키신저가 덩샤오핑과 대화를 하면서 가장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되는 점이 드러난다.

중국은 국가의 주권을 존중하며 국가들끼리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 사실상의 아시아판 베스트팔렌 체제를 주장한다. 그런데 이런 신성불가침한 국가주권에 입각한 국제사회는 다름 아닌 키신저가 하버드에서 연구한 분야이고, 이제는 중국이 키신저에게 그것을 가르치고 있다! 냉전의 말기에 서양의 사상은 국가 단위를 넘는 초국가적 가치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핵과 에너지, 인권과 같은 주제들이 그것이다. 그런 초국가적 이슈들은 서양이 세계에 개입하기 위한 구실이자 명분이다. 그러는 동안 중국은 아시아에서 베스트팔렌 체제를 구축하고 있고, 이것이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이고 발전의 에너지가 넘치는 새로운 세기를 창조하고 있다. 마침내 소련의 위협은 극복되었고 중국은 더더욱 발전의 길로 내달렸다.  



크로우 학파에 대하여


키신저는 독일 퓌르트 출생으로 1938년 나치스의 유대인 박해를 피하여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하여 제2차 세계대전에 종군하고, 1943년 미국  국적을 취득하였다. 1954년 하버드대학에서 정치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으며, 1962년 같은 대학 정치학 교수가 되었다. 저서 <핵무기와 외교정책 Nuclear Weapons and Foreign Policy>(1956)으로 대량보복전략을 비판하면서, 전술핵무기의 한정적 사용에 의한 유연대응전략을 제창함으로써 전략연구가로서의 지위를 확립하였다.

1969년 R.M.닉슨 행정부 발족과 함께 대통령보좌관 겸 미국국가안전보장회의 사무국장으로 취임하여 국무부의 통상적인 외교경로를 무시하고, 이른바 ‘키신저외교’를 전개하였다. 1971년 7월 중국을 비밀리에 방문하여 닉슨 방중(訪中)의 길을 열었고, 이어서 국무장관에 취임, 1972년 중동평화조정에 힘썼으며, 1973년 1월 북베트남과 접촉하여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등 세계평화를 위한 노력으로 그 해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다.

워터게이트사건 후 G.R.포드 행정부에도 유임되었으나, 1975년 대통령보좌관직을 그만두고, 1977년 국무장관직에서도 물러났다. 은퇴 후에도 국제정치의 연구와 평론을 쓰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으며, 1973·1974·1979·1983년 내한한 바 있다. 저서에 <선택의 필요성 : 미국외교정책 전망 The Necessity for Choice:Prospects of American Foreign Policy>(1961), <미국의 외교정책 American Foreign Policy>(1969), <백악관 시절 The White House Years>(1979) 등이 있다.

키신저는 <중국 이야기> 말미에서 워싱턴을 점령하고 있는 크로우 학파에 대하여 비판한다. 크로우는 1차 대전 전에 영국의 외교부장관으로 독일의 부상에 대비하여 영국이 적극적으로 해군력을 강화할 것을 주장하는 등 독일 견제 외교 노선을 확립했다. 19세기 말의 독일 통일제국의 출현은 유럽의 정치지형을 바꾸어 놓았다. 이런 내용을 담은 크로우의 메모는 1차 대전으로 이어지는 봉쇄와 견제 정책을 낳았다. 크로우 메모의 특징은 한 세력의 부상은 필연적으로 새로운 세력균형을 형성하기까지 갈등과 충돌을 수반한다는 것으로, 현재 떠오르는 중국에 대하여 미국의 신보수주의자들은 크로우와 같은 맥락을 중국에 들이대고 있다. 그러나 키신저는 이러한 크로우 학파가 워싱턴을 장악하고 있는데 대해 크게 우려한다. 그것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중국은 미국과 ‘공진화’하는 존재이며, 태평양 세기를 열어가는 데 미국과 협력해야 하기 때문이다.

30여 년 전에 오리엔탈리스트로 비판받았던 키신저는 이제 오리엔탈리스트를 비판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마오저뚱, 주언라이, 덩샤오핑은 키신저의 오랜 친구였고 동지들이다. 키신저에 의하면 마오저뚱은 “외교와 역사에 밝은 제왕적 철학자”이고, 주언라이는 “공자같은 고매함과 지혜를 가진 정치인”이고, 덩샤오핑은 “우울한 눈빛을 지닌 용감한 작은 거인”이다. 이 책의 마지막은 다음과 같이 마무리 된다.

“저운라이 총리와 내가 비밀 방문을 발표했던 코뮤니케 내용에 합의를 봤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게 세상을 뒤흔들어 놓을 겁니다.’ 그로부터 40년이 지난 지금 미국과 중국이 각자의 노력을 한데 모아 세상을 뒤흔드는 게 아니라, 세상을 건설헐 수 있다면 얼마나 굉장한 결정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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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월간 군사전문지 <디펜스21+> 편집장, 한겨레 군사사이트 <디펜스21> 전문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