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든 시절, 내 아이의 가장 예쁜 시절

복직 직전 마지막으로 올린 글이 2015년 10월이었으니 벌써 2년 가까이 되어간다. 그동안 레이 뿐 아니라 우리 가족에게 많은 변화가 있었다. 체력적 감정적 물리적 사회적 양극단 상황을 넘나들며 웃다가 울다가 지쳐 쓰러져 화내다 의기소침해지다가…. 결국에는 가족끼리 서로 위로하고 도닥이며 끄응~ 젖먹던 힘을 긁어모아 다시 몸과 마음을 일으켜 기운 내서 씩씩하게 살고 있다. 
다른 많은 필자들의 칼럼 수가 백 단위를 넘어가는 걸 지켜보며 들었던 가장 큰 감정은 ‘미안함’이었다. 자폐를 가진 아이를 키우는 가족의 모습을 보여주겠노라 다짐해놓고 칼럼 열 개도 못채운채 이렇게 오래 방치하다니. 
It’s better late than never. ‘늦었다고 생각될 때가 다시 시작할 때’라는 영어 경구를 중얼거리며, 나 역시 다시 시작한다. 
사람이 바뀌려면, 만나는 사람이 바뀌고, 사는 곳이 바뀌고, 하는 일이 바뀌어야 한다는데, 그 중 레이는 두 가지가 한꺼번에 일어났다. 첫째, 혁신학교가 있는 동네로 이사왔다. 대안학교와 살던 동네의 공립 초등학교와, 기독교 재단의 사립학교와, 양평 등 학생 수가 적인 분교 수준의 공립 초등학교 등등. 현존하는 모든 초등교육 기관에 대해 고민하다가, 결국 제도권 내에 있는 게 낫겠다는 결론을 내리고, 그 중 학교 분위기가 편안하고 통합 지원 아동에 대해 수용적이라는 평을 들은 학교 옆으로 부랴부랴 이사왔다. 예전에 살던 아파트보다 대규모 단지이고, 집도 넓어져서인지 아이는 새 집이 좋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이사 오기 전 걱정이 컸다. 익숙한 것에 집착하는 자폐스펙트럼 장애의 특성상, 이사간 후 예전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울며불며 떼쓰는 애들이 많다는 얘기를 익히 들었기 때문이다. 
뭐든, 처음이 어려운 법이니 새 집에 이사 가기 전에 몇 번 가보자, 익숙해지면 괜찮을 거야, 결심하고 몇 차례 찾아왔다. 주변에 볼 일이 있으면 일부러 차를 돌려 새 집 근처에 가서 창 밖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저기가 우리 이사갈 집이야~~”라고 알려주고, 도배하는 날에도 함께 들러 집안까지 들어가 둘러 보았다. “이 방이 우리 레이 방이야. 엄마가 이쁜 책상 사줄께~” 예전에 살던 집에는 방이 3개였어도 크기가 너무 작아 안방, 서재방, 창고방으로 겨우 쓰고, 딱히 아이 방이 없었다. 임신 중에 이사 갔던 그 집은, 아무것도 모르는 초보엄마가 아기는 그냥 몇 년 아기침대에서 자는 걸로 알고, 아이의 놀이와 생활방식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집을 꾸몄던지라, 아이가 생활하기엔 불편한 구조였다. 
나의 계획은 레이가 4살쯤 되는 해에 집을 넓혀 이사가는 거였으나, 세상일 뜻대로 되지 않는법. 레이가 자폐스펙트럼 진단받은 게 우리 나이 4살이고, 치료비에 큰 돈이 들어가는 통에 이사는 딱 3년 늦어졌다. 집 알아보고, 이사하느라 이것저것 알아보고 따져보느라 몸은 힘들었지만, 쾌적하고 편리한 새 집에서 우리 식구 모두 전보다 여유롭고 마음이 편안해졌다. 
둘째, 입학과 동시에 새로운 사람들을 만났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 전에 익숙한 사람과의 이별은 당연한 일. 3년 동안 레이를 키워준 어린이집을 드디어 졸업했다. 그런데, 좋은 일이 겹치는 건지, 일이란 녀석은 원래 몰려다니는 건지, 나는 아이의 졸업과 입학이 있는 2017년 2월 중순과 3월 초에 업무 관련 연수를 6주 동안 받아야 했다. 사이사이 시험도 많이 보고, 수업도 강도 높기로 유명한 과정이라 준비도 많이 필요했다. 6주 동안 업무를 쉬고 장기 연수를 가는 것은 회사로서도 큰 투자인지라 애엄마라는 핑계로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는 부담감도 컸다. 무엇보다도 내 업무에 가장 도움이 되는 과정이라 정평이 나 있어서 개인적으로도 제대로 해보겠노라 포부도 당당했던 터였다. 결석도 이틀만 허용이 되어, 아이의 졸업과 입학에 아낌없이 써버렸다. 내 입학식, 졸업식보다 감격스러웠던 그 이틀을 결석한 건 지금 생각해도 잘 한 결정이었다. 결석한 날 진도가 나갔던 과목 시험은 제대로 망쳐버렸지만. 
어린이집 졸업식에서, 나는 울었다. 처음 레이를 맡기러 가던 날, 초췌한 몰골에 넋은 반쯤 나가고 바짝 긴장했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원장님은 당시에도 친절히 나를 맞아주셨는데, 나중에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레이엄마, 처음 우리 원에 레이 맡기러 왔던 때는 완전히 바늘 끝처럼 신경이 곤두서있었어요. 질문하는 것도 날카롭고, 너무나 방어적이고.. 어우~ 어찌나 또 똑소리나고 독한지 자폐에 관해 얘기할 때는 아주 찬바람이 쌩쌩 불었잖아. 그런데, 아이 건사하는 게 얼마나 힘들까, 오죽하랴 싶어 참 안스러운 마음이었죠. 지금은 레이엄마가 많이 편안해지고, 엄마가 편안하니 레이도 편안하고… 이렇게 큰 거 봐요. 레이 엄마가 참 고생 많았어요.” 
그 얘기를 하며 둘이 함께 깔깔거리며 웃었지만, 짠했다. 나를 포함한, 통합반 아이들의 엄마를 챙겨주시고 큰언니처럼 감싸주시던 원장님은 졸업식 날에도 곱게 한복을 입으시고 화사한 모습으로 우리를 맞이해주셨다. 졸업사진을 찍고, 선생님들과도 사진을 찍고, 나는 원장님께 다가갔다. graduation-1580019_960_720.jpg » 졸업식. 사진 픽사베이.
 
“원장님, 감사…해..요…” 울컥. 눈물이 쏟아졌다. 
“울지 마세요. 울지 마. 응. 좋은 날인데 왜 울어. 웃어야지. 괜찮아. 앞으로 레이 더욱 훌륭하게 잘 클거야.” 
다독다독 내 등을 두드리며 격려해주신다. 그래, 좋은 날인데 울지 말아야지, 굳세게 다짐했는데, 레이를 7살 때 돌봐주신 특수교사 선생님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다시 눈물이 터져버렸다. 이미 눈과 코가 빨개지고 눈물 범벅이 되어 있는 선생님은 외모는 걸그룹 소녀같이 깜찍하고 아담하지만 차돌처럼 단단한 분이다. 대학 졸업 후 2년차에 레이와 다른 2명의 통합 아동을 맡았는데, 레이가 일곱살에 이룬 성장의 팔 할은 이 분 덕이었다. 
 
복직하여 정신 없는 엄마를 대신 해서 끊임없이 반복해서 지도해 가며 생활 습관을 꼼꼼히 잡아주고, 친구들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레이를 옆에서 격려하며 표 안나게 친구들 무리 속으로 슬쩍 슬쩍 밀어넣어 주면서 참여를 유도했다. 레이가 그렇게 무섭고 싫어하는 워터파크와 롯데월드를 갈 때에는 망설이는 나를 오히려 설득했다. “어머니, 레이랑 친구들이랑 같이 놀면 좋잖아요. 걱정 마시고 저희가 잘 돌볼 테니 같이 가게 해주세요. 레이도 좋아할 거에요.” 걱정하는 나와 달리 거리낌 없이 아이를 데리고 가더니, 결국에 즐겁게 놀게 만든 위대한 분이시다. 심지어 레이는 워터파크에서는 나중에 더 놀다 가자고 했단다. 정확히 1년 전에는 입구에도 못들어갔던 레이가, 워터파크를 즐겼다니 나는 너무 신기하고 가슴이 벅찼다. 
“어머니, (훌쩍). 레이 사진이나 소식 간간히 전해 주세요. 정말 보고 싶을 거에요.. (훌쩍). ”  
“선생님한테 고맙고 죄송해서 어쩐대요.. 이사갔지만 근처에 오면 꼭 들를께요…(훌쩍).” 
뒤돌아보면 가장 힘들었던 시간은 내 아들 레이가 가장 예뻤던 시간이었다. 희고 통통한 손으로 엄마 볼을 쓰다듬으며 미소 짓고, 침대에 엎드려 나비잠을 자고, 길가다가도 쪼그리고 앉아 강아지풀을 만지고, 글을 깨우치고는 뭐든 읽고 쓰느라 책장마다 빈 곳에는 삐뚤삐뚤 이것저것 써놓고, 분수와 폭포를 좋아해서 올림픽 공원에만 가면 분수 앞에서 즐거워하고. 
가장 예쁜 모습을 만들어 주신 어린이집과 원장님 이하 선생님들,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사랑으로 아이를 돌봐주시고 가르쳐주시고, 철없는 엄마도 잘 다독이며 가르쳐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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