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보다 어머나, 그 짠한 내력 생생육아

어머나가 어찌하여 어머나가 되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깨닫고 보니 어머나는 이미 어머나로 불리고 있었다.

 

 “어머님, 지금 집에 어머나 있죠?”

 앗, 어머나가 방에 굴러다니고 있다. 아침에 함께 챙겨갔어야 했는데 깜빡하고 가방만 전하고 온 모양이다. 여유 있게 걸으면 십 분, 뛰면 오 분 정도 걸리는 거리를 전력 질주한다. 문 앞에 나와 기다리고 계신 원장님께 어머나를 건네고야 안도의 숨을 내쉰다. 휴우. 집에 닿기도 전에 "어머나 안더니 거짓말처럼 울음을 뚝 그쳤어요, 안심하세요"란 문자가 왔다.

 

아이는 아침이고 낮이고 밤이고 어머나를 꼭 품고 다닌다. 특히 잠에서 깼을 때 없으면 곧장 울음을 터뜨리므로 손을 더듬더듬 할 때 냉큼 쥐어준다. 아이가 태어나기도 전에 장만했던 14490원 짜리 루디 극세사 담요가 어떤 경위로 어머나가 되었는지는 당최 알 수가 없다. 진상을 밝혀줄 단 한 사람이 통 질문을 이해하지 못하는 터라.

 

매번 아이는 홍시 맛이 나여 홍시 맛이 난다 하였는데 왜 홍시 맛이냐 물으시면하듯 어머나기에 어머나를 어머나라 하였는데 왜 어머나라 하느냐 물으시면하는 눈을 한다.

 

지금은 시들하다만 한때 문구용품이며 티셔츠에 자주 등장하던 만화 캐릭터 스누피에게는 라이너스란 친구가 있다. 라이너스는 주야장천 담요를 끌고 돌아다녔는데 어린아이들에게서 흔히 보이는 애착대상물이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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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도 라이너스처럼 담요를 손에서 놓지 않는다. 하여 친척집에서 하루, 이틀 자야할 때에는 물론이고 잠시 가까운 곳에 외출할 때에도 봇짐장수처럼 동여매고 나간다.

 

어이하여 이토록 어머나를 사랑하게 되었는가. 생각해보니 강압적인 수면교육의 후유증인가 싶다.

 

내 너에게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규칙적인 수면습관을 심어주리라, 저녁 여덟 시만 되면 방에 데리고 들어가 누웠다. 자기 싫다고 발버둥을 쳐도 예외 없다. 처음 한 시간 쯤은 토닥토닥 자장가도 부르고 가슴과 배도 쓰다듬쓰다듬 하는 친절한 엄마지만 한 시간이 경과하면 슬슬 본색을 드러낸다.

 

 “왜 아직 안 자냐, 이쯤 되면 잘 때도 되지 않았느냐, 해도 해도 너무한다.”

 

아니 생후 몇 개월 아기가 뭘 안다고 엄마는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고는 방을 휘 나가 돌아가지 않는다. 두고두고 돌이켜보면 어둠 속에 혼자 남겨졌을 아기의 외로움과 두려움이 마음에 사무치거늘, 그때는 나 한 몸 지쳐 쉬고 싶은 생각만 가득해 옳다 여기지도 않으며 베이버 위스퍼 식 수면교육을 실행했다.

 

아기의 울음소리가 높아졌다 잦아들 때까지 없는 체를 한다. 이 고비만 넘기면 수면의 틀이 잡히리라. 마음은 아프다만 엄마도 숨 좀 쉬자.

 

그때부터였던 모양이다. 울어도 돌아오지 않는 엄마 대신 아기는 포근한 담요를 닳도록 만지고 또 만지고 둥글게 말아 제 품에 꼭 껴안고 의지를 했을 터다. 그런 밤이 참도 길었다. 

 

어설프게 한두 마디씩 시작하던 아이가 어머나.”라고 또렷하게 말했다. 어머나가 뭘까, ? ? 몇 번을 물어보지만 답답하다는 듯 어머나아라고만 한다. 무슨 감탄사인가 싶었는데 대상이 분명한 모양이다. 한참을 돌아다니더니 담요를 끌고 와 어머나란다. 그리하여 아이가 어머나라 외치면 착오 없이 대령하기에 이르렀다.

 

극세사 담요다 보니 이게 참, 계절을 탄다. 가을, 겨울에는 푸근하고 괜찮다만 여름에는 보는 것만으로도 땀띠 날 듯한 따뜻함을 제공한다. 한 손에 아기 손을 잡고 한 손에는 담요를 들고 걷게 된 어느 날엔 혹여 꽃 꽂은 여자로 오인될까 괜히 한 마디씩 뱉는다.

 “에유, 우리 아기, 이게 그렇게 좋았어요? 우쭈쭈.”

 

어린이집에 다니게 된 후부터는 오전, 오후 들고 오가자니 여간 성가신 게 아니다. 묘책이 없을까 궁리하던 차, 할머니가 반으로 가르자.” 회심의 제안을 하신다. 가까운 세탁소로 달려가 이등분한다. 그리하여 빨래 마를 틈도 없이 2년 여 풀타임으로 근무하던 담요는 2교대 근무에 돌입한다.

 

근심거리 하나가 따라붙긴 했다. 하도 찾아대는 통에 채 마르지도 않은 축축한 담요를 건넸더니 몇 번 만져보고는 아니라며 통곡한 적이 있다. 그 특유의 부드러운 촉감과 몸에 휘감기는 크기를 완벽하게 스캔하고 있다면 반 토막이 난 어머나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심상한 척 방에 하나 툭 던져두었다. 잘 끌고 다닌다. 촉감에는 예민하나 크기는 중요치 않았던 모양이다. 이로써 어머나는 집에 하나, 어린이집에 하나 분리 보관 가능하게 됐다. 한동안은 주말 꽤 주의를 했다. 주말이면 어린이집 물품을 집으로 돌려보내기 때문이다.

 

 “아니, 내 손에 어머나가 있는데 저기 또 어머나가 있어!”

어머나가 플라나리아도 아니거늘 엄청난 재생력으로 번식하는 줄 오해하며 존재론적 회의에 빠질까 저어하여 보안에 신경을 썼다. 빨랫줄의 어머나는 잘 보이지 않는 맨 구석 자리에 밀어 넣었다. 그러던 주말 하루, 그만 발각되고 말았다. 항상 숨기던 곳은 아이가 잘 드나들지 않던 곳인데 하필 그날따라!

 

어머나가 두 개라는 사실에 과연 어찌 대처할 것인가. 숨을 죽이고 추이를 지켜보았다. 헌데, 기우였다.

 

 “어머나, 두 개다.”

 

매우 천연덕스럽다. 전혀 놀라지도 않고 아무렇지 않은 듯 두 개를 끌고 돌아다닌다. 그 후로 모두 순조롭다.

 

방의 어머나를 끌어안고 신발을 신으려는 월요일 아침, “어머나는 두고 가자.”하면 순순히 바닥에 내려둔다.

 “어린이집에도 어머나 있지요.”

 많이 컸다.

 

 다시 생각한다. 어머나는 어찌하여 어머나가 되었나.

 말문이 트이며 아이는 한동안 엄마, 안아. 엄마, 안아.” 부쩍 엄마에게 안겨왔다. 혹 까만 어둠 속에서 아기는 어머나를 의지해 꼭 안고선 엄마 안아, 엄마 안아 마음으로 주문을 외웠던 건 아닐까 그 밤에 어머나만이 마음의 위안이었던 건 아닐까.

 

엄마 안아, 엄마 안아, 엄만아, 어머나.. 그리하여 내 아기를 감쌌던, 이제는 3년이 다 돼 나달나달해져 가는 담요는 엄마를 대신해 아기를 안아주는 어머나가 되었을지 모를 일이다,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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