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 기억하고 있습니까? 생생육아

소녀에게는 엄마가 없다. 그래서겠지, 처연한 기운이 돌았다. 소원을 들어준다는 바람돌이와 떠난 추억 여행, 방울방울 가득 담긴 추억에 둘러싸여 소녀의 마음이 따스해진다. 비눗방울 같은 거품 하나에 추억 하나씩이 담겼다. 어떤 추억은 어제 일인지 선명하고 어떤 추억은 오랜 시간이 흘러선지 보일 듯 말 듯 뿌옇다. 그 중 하나, 이제는 완전히 흐려져 도무지 어떤 추억인지 알아볼 수 없는 거품에 마음이 쓰인다. 겹겹이 쌓인 세월을 걷어내고 투명한 안을 들여다보고 싶다. 소녀는 그 속에 담긴 추억이 몹시도 궁금하다.

 “이걸 볼 수는 있어. 하지만 한번 본 후엔 영원히 기억 속에서 사라질 거야, 그래도 괜찮겠어?”

 봉인을 열고 나온 추억은 한순간 머물다 이윽고 영원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이미 잊힌 추억이다. 허나 의식 너머에 존재하던 추억이 진짜 물거품이 돼 사라진다는 것은 아픈 일이다. 소녀는 궁금증을 참지 못해 그리하겠노라 답하고 오랜 시간 저 너머의 추억을 불러 세운다.

뿌옇던 거품이 차츰 맑아지고 마침내 투명해진다. 그리고 그 속에서 소녀는 가장 행복했던 시절의 추억 하나를 건져 올린다.

 엄마다! 엄마가 어린 소녀의 머리를 빗어주고 있다.

 아주 오래 잊고 지냈던, 그리고 종국에는 사라질 그 소중한 추억이 소녀의 마음에 차오른다.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 소녀는 정말 그 한 번으로 시리도록 슬프고 아름다운 추억을 영 잊고 말았을까.

 더 좋았던 만화라면 얼마든지 있다. 그런데 가슴에는 삼십 여년이 다 되도록 이 장면 하나가 가장 선명하게 남았다. <모래요정 바람돌이>는 꽤나 발랄한 만화였는데 이 일화만은 쓸쓸하고 아릿한 게 어린 마음에도 퍽이나 인상적이었다. 기억의 왜곡이 있을 테지만 한 번 보되 영원히 잊게 된다.’는 설정만은 또렷하다.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동요고 만화고 요즘에는 밝고 건강한 것들만 가득한데 예전에는 씁쓸한 여운이 남는 게 적지 않았다. 어린 마음을 다치지 않도록 세심히 배려하는 요즘 분위기와는 확실히 달랐다. 하여 만화에서도 격세지감을 느낀다.

 

 세 살 아들은 아직 만화에는 흥미가 없다. 뽀로로며 폴리, 타요까지 웬만한 아이들은 몇 십 분이고 집중해서도 보던데 아들은 주제곡이 끝나는 순간 휑하니 자리를 뜬다. 아직 내용을 이해하기엔 이른 모양이다.

 대신 애정을 갖게 된 만화 캐릭터가 몇몇 생겨났는데 대표주자가 호빵맨이다. 사실 엄마는 호빵맨 만화를 본 적이 없다. 등장인물 이래봐야 호빵맨, 세균맨 이름만 겨우 아는 정도라 검색을 좀 했다. 식빵맨, 카레빵맨, 햄버거 키드 등 아무튼 빵들이 총출동하는 모양인데 어떤 내용인지 감도 안 잡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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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은 몇 달 전 일본의 유아 놀이 잡지 메바에를 시험 삼아 한 권 사 보았다. 엄마도 일본말을 못하니 결코 일본어 교육이 목적일 리 없다. 그저 우연히 이것저것 검색하다 호빵맨과 세균맨의 종이 집을 보고 한눈에 반해버린 탓이다. 오밀조밀한 종이 집에 갖가지 세간 그림이며 2, 3층으로 이어지는 계단까지 어찌나 앙증맞은지. 유년에 가져보지 못한 사랑스런 장난감을 손에 넣으려 망설이지 않고 결제 버튼을 누른다.

 그렇게 고향을 떠나 한국 소도시에 안착한 호빵맨은 벅찬 사랑을 받기에 이르니. 호빵맨과 세균맨 손가락 인형은 아이보다 엄마 손에 들려있는 경우가 더 많다. 틈틈이 호빵맨과 세균맨을 침대에 뉘이고 계단을 오르내리게 만들며 엄마는 아이만큼이나 즐거웠다.

 

 언제나 호빵맨을 표지모델로 내세우는 잡지 메바에에는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또 다른 유명 캐릭터가 매월 한 두 페이지 등장하니, 그의 이름 짱구 되시겠다.

 아들은 짱구가 변기에 앉아 응가하는 모습을 보더니 첫눈에 반해버렸다. 두 주먹 불끈 쥐고 눈을 잔뜩 찡그린 채 응가에 매진하는 박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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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늘 변기를 피해 도망 다니던 아들이 짱구를 따라 두 주먹에 힘을 잔뜩 주고 외친다. “짱구, 짱구 주세요.” 엄마가 짱구 페이지를 펼쳐주면 아이는 눈을 꼭 감는다.

 도무지 나이를 짐작할 수 없을 만큼 능청스럽고 밉살맞기만 하다며 타박했던 짱구야, 고맙다, 덕분에 한국 세 살짜리 아기 하나 변기에 응가 시작했다.

 

 잡지는 스티커 붙이기, 색칠하기, 종이 접어 만들기 등 퍽 평범한 구성으로 가득 차 있다. 헌데 이게 어쩐 일인지 하다 보면 어느새 스르르 빠져든다. 옆에서 아들이 뭐라 하건 말건 엄마, 지금 이거 만들고 있잖아.’ 무시하는 상황에 이른다.

 결국 제 흥에 겨워 호빵맨 버스도 만들고 토마스 기관차 터널도 만들고 키티 옷도 갈아입히며 혼자 놀고 있다. 전혀 아들을 위한 놀이가 아니다!

 실은 엄마 재미에 빠진 셈이지만 그나마 아이 장난감을 손에 쥔 채라 괜찮다. 아이를 위해 기꺼이 종이 인형 놀이까지 하는 멋진 엄마 코스프레가 가능하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유의 놀이잡지가 없을까 두리번대봤으나 아쉽게 아직 찾지 못했다. 다달이 발간되는 유아잡지가 있어도 참으로 괜찮을 성 싶은데 말이다.

 메바에에 이어 겡끼며 베이비북까지 몇 권 챙겨보았으나 역시 입맛에 맞는 건 메바에. 일단 겡끼는 호빵맨과 짱구가 등장하지 않아 탈락. 베이비북은 좀 더 어린 유아를 위한 책인 듯 (아기가 아니라) 엄마 수준에 영 맞지 않다.

 어린 시절 관심도 없던 호빵맨에 뒤늦게 빠진 엄마는 아이야 원하건 말건 매달 메바에 부록을 체크한다. 도대체 이 나이에 호빵맨 스탬프며 호빵맨 전화기를 가져서 어쩌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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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에는 어른왕자나 키덜트족이란 말도 꽤나 흔하니 엄마의 이런 유아적 취미가 이상한 것만도 아니겠지 싶긴 하다. 딱히 유년시절로 돌아가고 싶기까지 한 건 아니지만 장난감 하나 손에 쥐고 있다 보면 마음 넉넉히 좋다<플로네의 모험>이며 <사랑의 학교><원탁의 기사> 같은 정겨운 만화들도 하나씩 떠오른다.

 그러다 보면 또 잊고 지나온 건 없나 돌아도 본다. 필시 내 안에도 무수히 많은 추억이 방울방울 맺혀 떠돌아다닐 터인데, 새 것은 선명한 빛을 띠고 옛 것은 시간의 두께가 켜켜이 쌓여 희미해졌음이 분명한데.

 나는 혹시 잊어서는 안 되는, 가장 나중까지 지니고 있어야 할 소중한 추억 하나를 시간 속에 가둬둔 게 아닐까 염려도 된다. 추억 하나가 내게서 떠올려지길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때로 모래요정을 생각한다.

 "너의 추억 하나를 지금 보여줄게, 하지만 한번 본 후엔 영원히 기억 저 너머로 사라져 버릴 거야. 그래도 넌 보고 싶어?"

 좋은 일일지 나쁜 일일지, 잊혀 마땅할 일인지 잊어선 안 되는 일인지 알지 못한다. 잊혔으니 잊힌 채로 살아도 될 성도 싶고 어차피 사라질 추억 봐도 나쁘지 않을 성 싶고. 헌데, 너무나 아름다워 잊고 싶지 않은, 두고두고 간직하고 싶은 추억이면 어찌 한다

 어떡할까 대답을 망설인다.

 

 유년, 기억하고 있습니까?

 

 

 

*유년의 마을로 안내한 잡지 7권의 가격은 이러합니다.

메바에 네 권이 31,870

겡끼 두 권이 16,200

베이비북 한 권이 8,010

모두 56080.

원하시면 호빵맨, 세균맨과 함께 빵의 나라로 떠날 수도 있습니다. :D

 

*<바람돌이>의 저 내용 뒷부분을 기억하시는 분 안 계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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