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아, 내가 너의 가시가 되어줄게 양 기자의 육아의 재발견

[베이비트리 생생육아] 육아의 재발견

 

* 생생육아 코너는 필자가 아이를 키우면서 일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소재로 생생하게 쓰는 육아일기 코너입니다.

   베이비트리(http://babytree.hani.co.kr)에는 기자, 파워블로거 등 다양한 이들의 다채로운 육아기가 연재됩니다.

 

03633312_P_0.jpg » 한겨레 자료.

 

나이를 먹어가고 어른이 되면 우리의 감정은 메말라간다. 식어버린 동태찌게마냥 일상은 비릿하고 비루하다. 봄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도 시큰둥하고, 개미·달팽이·무당벌레와 같은 작은 생명체들이 주변에서 꼬물거려도 그런 세상 따위야 눈에 들어올리 없다. 손 안의 작은 세상이라는 스마트폰에 푹 빠져 주변 사람들과도 눈 한번 제대로 마주치지 않는 날도 차츰차츰 늘어간다. 나 역시도 그런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반복되는 생활 속에서 크게 기쁘지도 크게 슬프지도 않은 날들이 이어졌다. 일희일비하지 않는 것이라고 합리화하고 있던 중, 첫째의 초등학교 입학으로 두 달 동안 육아 휴직을 하면서 아이들과 함께 하는 날들이 늘었다.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늘자, 아이들이 보는 세상이 하나씩 하나씩 내 마음에 들어왔다. 8살이 되었지만 아직도 모든 것이 신기하고 궁금한 딸, 가끔은 엉뚱하고 가끔은 과격하고 개미가 움직이는 것만 봐도 마냥 신기한 아들. 아이들이 안내하는 세상은 메말라가는 내 가슴에 물을 잔뜩 주고 거름을 주어 내 감정을 싱싱하게 만들었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뒤, 학교 가는 길에 많은 대화가 이뤄졌다. 며칠 전 딸과 손잡고 학교 가는 길에 장미꽃이 활짝 피었길래 봄이에게 장미꽃 이야기를 건넸다.
 
“봄아~ 우리 3월에 학교에서 봤던 장미 꽃봉오리 기억나? 그 장미가 5월이 되니 이렇게 활짝 피었네~ 엄마 이제야 장미꽃을 본다.”
“응. 엄마~ 장미 핀 지 한참 됐어. 이제 보는거야? 그런데 엄마, 장미에 왜 가시가 있는 줄 알아? ”
 
아이가 이렇게 물으면 나는 답을 알고 있지만 바로 대답하지 않는다. 모르는 척 하며 아이의 생각을 되묻는다. 아이들은 고정관념이 없기 때문에 내가 생각한 것과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다. 그런 대화에서 아이의 마음이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왜 그럴까?”
“음~ 장미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가시가 있는거야. 그것도 몰랐어?”
“아~ 그렇구나~ 가시가 없으면 자기 보호를 못 하나? ”
“당연하지~ 가시가 있어야 자기를 꺾으려고 하면 가시로 찔러 피를 낼 수 있잖아.”
“그렇겠네~ 그럼 봄이는 봄이를 보호하기 위해 뭐가 있어? 봄이도 가시가 있나? 봄이의 가시는 뭐야?”

(나는 속으로 봄이의 가시는 눈물, 호통치기, 짜증 내기 등을 생각하고 있었다.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어린 아이가 하는 전략은 그 정도이니까.)
“나도 가시가 있지~~ 엄마! 엄마는 날 보호해주는 사람이니까 엄마가 나한테는 가시지~ 또 아빠, 이모, 외할머니, 할머니, 할아버지~ 난 가시가 많지~~” 
 
무심코 대화를 이어가는데 봄이가 뱉은 말에 내 감정이 잠깐 출렁댔다.  ‘가시’하면 남을 아프게 찔러대는 말이 생각나고 겉은 아름답지만 가시처럼 날카로운 사람만 연상됐는데, 아이는 내게 전혀 다른 ‘가시’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 반전에 놀라고, 또 ‘엄마=나의 가시’라고 말해주는 아이의 마음이 고마웠다.

 

‘그래 그래, 봄이야~ 엄마는 너의 가시야. 네 말이 맞다. 너를 누가 꺾으려고 하면 엄마가 가시가 되어 보호해줄게. 그리고 가시처럼 아픈 말로 찔러 네게 상처내지 않도록 노력할게. 너를 찌르는 가시가 아니라 너를 보호하는 가시가 될게. 그러니 너는 네 꿈도 맘껏 펼치고 저 장미처럼 붉고 예쁘게 환하게 피어라’라고 나는 마음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이들과의 대화로 생생한 감정을 회복한 나는 책 한 권을 읽어도 내용이 이전과 다르게 다가온다. 1994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했지만 시집 한 권 낸 적 없는 무명시인, 2010년 7월 출판사를 차리고 페북에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스타로 떠오른 림태주 시인이 최근 두번째 산문집 <그토록 붉은 사랑>을 펴냈다. 새벽에 잠에서 깨 이 책을 보는데 시인과 시인의 어머니 사이에 꽃을 소재로 나눈 대화가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꽃 하나를 보면서도 엄마와 이렇게 길고 긴 대화를 나눌 수 있다니, 이게 진짜 삶이고 아름다운 찰라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우리 아이들이 좀 더 컸을 때 이런 대화를 주고 받을 수 있는 엄마가 되고 싶다.  <그토록 붉은 사랑>에 실린 `꽃밭에서'라는 글의 일부를 소개한다. 시인의 어머니 역시 언어의 달인이다. 말이 착착 입에 와서 감긴다. 아들과 주거니 받거니 호흡도 척척 맞는다. 그 어머니의 그 아들이다. 시인이 산문집의 첫 글을 어머님의 편지로 시작해 산문집의 마지막을 어머님에게 보내는 글로 마무리한 이유를 알 것 같다. 그토록 붉은 사랑을 준 어머니를 어찌 잊을 수 있으랴.

 

“엄마, 방안까지 향기가 몰려들어 시끄러워 죽겠어.”
“글 쓰는 데 방해되거든 사정없이 내쫓아 부러야. 향기라고 봐주지 말고.”
“꽃이 무슨 잘못이 있겠어? 못 참아 내는 내가 공부가 모자란 거지.”
 ... (중략)
 
“치자도, 천리향도 엄마가 아끼는 꽃에선 다 엄마 냄새가 나서 좋아.”
“나팔꽃 좀 봐. 저것이 야리야리해도 공중곡예 선수여. 선수!”
“나팔꽃도 색깔이 다 달라. 흰 것도 있고 보라도 있고 분홍도 있고.”
“그래도 나팔꽃은 보라지. 보라가 조강지처고 딴 것들은 다 첩이여.”
“엄마는 참, 애먼 데다 희한한 비유를 섞고 그러네.”
 ...(중략)

 “아서라, 니 눈에는 맨드라미하고 분꽃하구 같아 보이냐?”
 “그야 생판 다르지. 분꽃이 풋사랑이면 맨드라미는 상사병 수준이지.”
 “암만, 니 말 잘했다. 누가 뭐래도 나는 빨강이여. 사람이 지조가 있어야지.”
 “그럼 엄마는 그리도 빨강이 좋다면서 작약이랑 모란이랑 철쭉이랑 분홍 때깔 나는 저것들은 왜 저리 많이 심어놨어?”
 “아야, 니는 삼시 세끼 밥만 묵고 사냐? 가끔 가다 수제비도 묵고 백설기도 묵고 짜장면도 묵고, 안 그르냐?”
 ... (중략)
 
 “세상에 좋은 것 나쁜 것이 어디 있거냐? 다 이유를 갖고 태어났을 것인디. 내가 좋아하는 것과 니가 좋아하는 것이 있고, 일찍이 좋아한 것과 나중에 좋아하게 된 것이 있것지. 세상에 나쁜 건 없는 법이여. 열아홉 처녀 적에 좋았던 거, 애 낳고 보니 좋았던 거, 늙어지고 나니 좋아지는 거가 있을 뿐인 거지.”
 “나는 태어나기 전에도, 어렸을 적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항상 좋은 게 하나 있어.”
 “그게 뭐다냐?”
 “엄마지!”
 
양선아 기자 anmad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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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알듯말듯한 육아에 대해 함께 알아가고 고민합니다. 불안한 육아가 아닌 행복한 육아를 꿈꿉니다. 몸과 마음이 건강한 삶을 지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