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쩔 수 없이(!) 엄마표 3: 많이 모자란 장난감 생생육아

'99만 9천원 육아기'에 썼듯이, 우리는 아이에게 새 장난감을 사 준 적이 없다.

이곳은 한국에 비해 각종 공산품 가격이 비교적 저렴한 편이라 새 장난감도 큰 돈 들이지 않고 살 수 있지만, 

우리는 그만한 여유도 없어 꼭 필요한 물건도 여러 차례의 상의 끝에 겨우 장만하는 수준이다. 

게다가 이 곳은 차가 없이는 대형마트나 쇼핑몰에 가기 어려우니, 차가 없는 우리에게 '장난감 구매를 위한 쇼핑'은 그야말로 미션 임파서블.  


하지만 다행히도 집에서 도보 5분 거리에 대형 중고매장이 있어 그동안 제법 괜찮은 헌 장난감/ 헌 책을 쉽게 마련할 수 있었다.

그림책 한 권에 500원, 누르면 각종 동물 소리가 나는 장난감이 2천원. 뒤로 당겼다 놓으면 쌩, 하고 나가는 자동차가 500원.  

걷기 좋아하는 케이티를 데리고 나가 삼사십 분 머물며 구경하다 그 날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품목 하나를 손에 들고 나오는 일은 참 즐거웠다. 

그런데 계절이 가을에 접어들면서 이 매장이 갑자기 이전을 해 버렸다. 버스 노선에 포함되어 있지도 않아 집에서 걸어가려면 족히 20분은 걸리는 곳으로. 

기온이 아주 괜찮을 때를 빼고는쌩 부는 4차선 대로변을 20분씩, 그것도 아이를 데리고 걸어 가기란 보통 일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그 매장에 갈 수 있는 날 수가 점점 줄어들어 이젠 헌 장난감도 미리 목록을 적어두었다가 날씨 좋을 때 혼자 자전거를 타고 나가 매장을 쥐 잡듯 뒤져야 겨우 살 수 있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기를 두어 번, 이젠 점점 그마저도 힘들어지는 계절이 닥쳤다. 그렇게 나가 놀기 좋아하더니 날이 추워지자 아무리 꼬드겨도 밖에 나가려 하지 않는, 아침 댓바람부터 기운 하나는 펄펄 넘치는 23개월 아들과 실내에서 무얼 하고 놀아야 할 지 막막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하게 된 것이, '어쩔 수 없는' 엄마표 놀잇감 만들기다. 

나는 손재주가 없어 뭘 예쁘게 만들지는 못하지만, 필요하면 어떻게든 해 내는 사람. 

(그 예가 이전에 쓴 '어쩔 수 없이 엄마표 1: 날개옷 짓는 엄마' 라는 글에 나와 있다.)

지루해 하는 아이를 감당할 자신이 없어 집안에 돌아다니는 온갖 것들을 가지고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탄생한 케이티의 놀잇감들을, 약간의 민망함을 감수하고 공개한다. 

대부분 '이게 뭐야, 저게 무슨 장난감이라고!' 싶은 것들이지만,

나는 이 경험을 통해 아이들에겐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장난감으로 바꾸는 천부적인 능력이 있음을 깨달았다. 

사정상 아이에게 장난감을 매번 사 주기 힘들다면, 약간의 발상 전환만으로 아이에게 맞는 놀잇감을 손쉽게 제공할 수도 있다는 의미로 내 경험을 공유한다. 


1. 마음껏 낙서할 수 있는 '벽화 공간' 주기

: 평소 냉장고 문짝에 보드마커로 낙서하기를 즐기던 케이티가 갑자기 마커를 들고 여기저기 나다니기 시작했다. 장난감 자동차며 엄마 책이며 가리지 않고 낙서를 시도하더니, 급기야 안방 벽에까지 손을 대려는 것이 아닌가. 부리나케 잡동사니가 보관되어 있는 수납장을 열어 똘똘 뭉쳐 놓은 커다란 종이 뭉치를 꺼냈다. 나중에 이사갈 때 그릇짐을 싸는데 요긴하게 쓰일 것 같아 뭉쳐두었던 포장재였다. 종이를 펼쳐 벽에 대충 붙여주고는 '케이티의 낙서판'으로 명명했다.  색깔 구분이 되니 이 갈색 종이 바깥으로는 낙서할 수 없다는 걸 몇 번 주지시켜 주자, 아이는 온 팔을 휘둘러가며 갈색 종이 안에 신나게 낙서를 해댔다. 잠이 오지 않는 날 엄마와 뒹굴거리며 이 벽화에 끄적끄적 색칠을 하기도 하고, 엄마에게 별이나 기차, 자동차 등 제가 좋아하는 걸 그려달라고 주문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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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빈 상자로 집, 은행 창구(?), 터널 등 다목적 놀잇감 만들기

: 어느 날 인터넷 세상을 돌아다니다 발견한, 빈 상자로 집 만들기를 따라해 봤다. 

(참고 링크는 여기:  http://www.ambrosiagirl.com/blog/collapsible-cardboard-playhouse-diy/   )

하지만 집에 있는 재료라고는 별로 튼튼하지도, 크지도 않은 상자 하나와 은회색 덕테잎, 그리고 몇 장 안 되는 색지 뿐. 

어찌어찌 만들어 봤지만 케이티는 이 '집'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결국 이 첫 번째 집은  일주일만에 쓸쓸히 폐기처분되었다.  


다시 다른 상자를 하나 더 가져와 이번엔 좀 다르게 시도해봤다. 케이티는 움직이는 걸 좋아하니까, 애초에 들어가 앉아 노는 것 말고는 별로 활용할 수가 없는 '집'이라는 형태가 안 맞았던 게 아닐까. 그래서 이번엔 그냥 박스에 창문을 하나 뚫어 줘 봤다. 처음엔 위에서 덮어 씌워주니 박스를 살짝 들어 올려 걸어다니더니, 나중엔 바닥에 앉아서 창문을 열었다 닫았다 하며 엄마와 까꿍놀이를 시도했다. 그러고 나서는 엄마와 마주 앉아 공이며 동전, 퍼즐 조각 등 각종 잡동사니를 주거니 받거니 하며 마치 은행 창구 놀이를 하듯 놀았다. 창문을 닫아 놓고 '똑똑' 노크를 하면 아이가 창문을 여는데, 그러면 나는 손을 넣어 앉아 있는 아이의 겨드랑이며 옆구리를 마구 간지럽혔다. 그러다 앉아 노는게 시들해지면 아이는 상자를 옆으로 길쭉하게 세워놓고 터널 놀이를 해댔다.  터널을 통과하려다 말고 창문으로 몸을 돌려 빠져나오기도 하고, 자동차를 밀며 터널을 통과하기도 했다. 상자 위에서 자동차를 굴리며 놀다 창문 틈으로 차를 추락시켜놓고는 재미있다고 깔깔댔다. 아이는 빈 상자 하나로 실로 다양한 활용법을 찾아가고 있었다. 


3. 지겨워진 퍼즐, 자석 장난감으로 활용

: 한동안 퍼즐에 꽂혀 그렇게 열심히 퍼즐 맞추기를 하더니, 이제 식상해졌는지 퍼즐에는 눈길도 안 준다. 이것들을 어떻게 써먹을 수 있을까 생각하다 인터넷 쇼핑몰에서 약 7천원을 들여 잘라 쓸 수 있는, 한면에 양면 테잎 처리가 되어 있는 종이 자석 한 롤을 샀다. 유아용 나무 퍼즐에는 손잡이가 달려 있는 경우가 많아서, 그 뒷면에 종이 자석을 붙여 냉장고에 붙여주면 좋은 자석 장난감이 된다. 식사 준비를 하거나 설거지를 할 때 옆에서 엄마 다리만 붙들고 있지 말고 갖고 놀라고 만들어 줬건만, 정작 그런 시간엔 안 하고 그냥 내킬 때 아무 때나 갖고 논다. 오븐에서 냉장고로, 냉장고에서 오븐으로 하나씩 옮겨 붙이거나, 냉장고에 제 나름대로 모양을 만들어 가며 붙이고 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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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화장지의 위대함! 극강의 화장지 놀이!


마지막 아이템, 화장지는 최근 우리에게 가장 놀라운 '재발견'의 순간을 가져다 준 놀잇감이다. 

몇 달에 한 번, 친구에게 부탁해 구입하는 모 대형마트 표 대용량 화장지 세트.  

한 봉지에 9개씩 포장되어 있는 이 화장지 뭉치를 던져주면 아이는 혼자 한 시간, 한 시간 반 동안 그야말로 열심히 논다. 

처음엔 그냥 쌓아 올리고 무너뜨리며 놀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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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떨 땐 줄줄이 이어붙여 '뚜뚜' 기차 흉내를 내며 밀고 다니고, 

어떨 땐 그 위에 올라가 징검다리 건너듯 걸어다니며 혼자 박수까지 치며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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낱개로 흩어진 두루마리 휴지들은 탑처럼 쌓아 올린 다음 가운데 뚫린 구멍으로 동전이나 크레용, 작은 주사위 등을 떨어뜨리며 놀기도 한다. 

가운데 들어 앉은 다음 사방을 휴지로 막아 쌓아 올리면 성인지 요새인지가 되고, 3층짜리 하나, 2층짜리 하나, 1층짜리 하나를 연결시키면 계단이 된다.  

화장지를 다 꺼내고도 모자라 안 뜯은 종이기저귀 묶음이며 새 물티슈 묶음까지 꺼내와 쌓고 연결하고 옮기고 나르기에 열심이다. 

강아지마냥 헥헥거리며 휴지를 들었다 놨다 거실에 갔다 방에 갔다 하는 모양새를 보고 있으면 고개가 절레절레 저어진다. 

그게 뭐라고 그렇게 재미있나, 싶다가도 그래, 니가 즐거우면 됐다, 하며 같이 움직이고 같이 깔깔 웃고 같이 박수친다. 


아, 물론 요 휴지 때문에 힘들 때도 있다. 

9개 들이 포장 휴지를 두 개 겹쳐 올려 놓고는 그 위에 턱하니 앉아서 썰매 끌듯 밀어달라고 떼를 부릴 때는 

"엄마 허리 아파...ㅠㅠ 이런 건 아빠랑만 하면 안되겠니?!" 하고 우는 소리를 하게 된다. 

하지만 에너지 넘치는 아이에게 이만한 놀잇감도 없다. 

잠자리에 들기 전엔 함께 하나씩 제자리에 갖다 놓는데, 실컷 논 다음 치우고 정리하는 법도 재미나게 배우게 되어 나름대로 교육 효과(!)도 있다. 


아이와 재미있게 놀기 위해, 꼭 비싸고 예쁜 걸 갖출 필요는 없다. 

여유가 있다면 얼마든지 좋은 장난감을 사다 안겨도 좋을테지만, 

그럴 형편이 못 된다고 해서 아이에게 미안해하기만 할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중요한 건 얼마나 많이 가졌느냐, 특히 남 보기에 얼마나 그럴듯한 걸 가졌느냐가 아니라 

내 아이에게, 내 처지에 맞는 것을 가졌느냐, 내 아이와 내가 즐겁게 함께 놀 수 있느냐이다.   


잘 둘러보면, 지금 가지고 있는 것들, 장난감이 아닌 일상의 용품들을 활용해 아이에게 맞는 놀잇감을 선사해 줄 수도 있다. 

나는 알고 있다. 세상에는 나보다 훨씬 더 눈썰미 있고 손재주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그들이 아이와 노는 방법, 그들의 놀잇감이 궁금하다. 


많이 모자라지만 내 아이만큼은 신나게 갖고 놀아 주었던, 

혹은 거꾸로 판매용 뺨치게 예쁘고 멋진 '엄마표 장난감'을 경험해 보신 분들, 

지금 얼른 덧글 써 주세요! 길고 긴 겨울, 케이티와 엄마표 장난감으로 버텨 볼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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