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아이의 엄마로 살며 '나'를 잃지않기 생생육아

나는 참 균형 감각이 없다. 

어릴 적 체육 시간에 앞구르기를 하면 똑바로 구르지 못하고 꼭 모로 굴러 매트 옆으로 나가 떨어졌다. 

달리기를 해도 바닥에 그어진 분필가루 선대로 뛰지 못해 꼭 옆 레인으로 삐져나갔고, 

수영장에서 배영을 할 때 엄마가 시키는대로 천장에 일렬로 박힌 전구를 본다고 하는데도 어느새 옆 레인에 머리를 박고는 했다. 

동아리에서 설장구를 칠 때도, 무용 시간에 회전 동작을 익힐 때도, 나는 늘 균형이 흐트러져 어질어질한 상태로 동작을 마무리해야 했다. 

그 뿐인가, 하다못해 길을 걸으며 물 마시기, 커피 마시기 같은 것도 나는 하지 못한다. 

손에 그런 음료를 들고 쏟지 않고 걷는 것 자체가 내겐 어려운 일이어서 여간해선 손에 커피를 들고 다니는 일이 없다.


신체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서적으로도 그런 편이어서, 

한 번 어떤 사람이나 일에 몰두하면 정신없이 빠져들기도 하고 

어떤 일, 또는 누군가에게 크게 실망하거나 분노하면 좀체 그 감정에서 헤어나오지를 못한다.  

특히 나는 타인에게는 물론이고 나 자신에게도 꽤나 엄격한 편인데, 

내가 내 스스로 세워 놓은 기준에 못 미친다고 판단 될 때면 나에 대한 실망이 분노로 이어져 끝없는 자괴감에 빠지기도 한다. 


이렇게 균형감각이 모자라 때로는 극단적이기까지 한 내가 다행히 나를 완전히 놓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내가 '끊임없이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내게 이런 자질마저 없었다면, 케이티를 낳고 나는 무너져버렸을 지도 모른다. 

실제로 많은 희소난치성 질환 가정의 엄마들이 자책과 무력감으로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나는 케이티를 낳고 이 아이 덕분에 삶을 대하는 균형감을 조금씩 더 얻고 있다. 

손재주가 없어 평생 생각도 못해 본 '재봉'이라는 분야를 독학으로 깨치고 있는 것이나, 

평생 문과형 인간으로 살았으면서 생물학, 생리학, 유전학 같은 분야의 기초 서적을 들추며 공부하는 것, 

스스로에게 엄격하고 개인주의적인 내가 타인의 애정어린 관심과 도움을 덜 부담스러워하며 받고 살게 된 것, 

이 모두 케이티가 KT를 갖고 태어났기 때문이 아니던가. 

내가 케이티의 KT에만 몰두해 거기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면 하루하루 고통 속에서 살았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 운명을 내 일생의 과제로 삼아 배워나가기로 했고, 

무엇이든 공부하기 좋아하는 천성 덕분에 이 배움 자체를 즐기며 

'아이'만이 아니라 '나'도 함께 생각하며 살아가는 균형감각을 얻을 수 있었다. '


엄마로 살면서 '나'를 유지하며 사는 것이 참 어렵다고들 한다. 

아픈 아이의 엄마라면 더더욱 그렇다. 

아이가 아프게 태어난 것이 엄마 탓인것만 같은데, 어찌 엄마가 '나'를 찾으며 살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럴수록 엄마가 '아이와 나' 사이에서 균형을 잘 유지하며 살아야 한다. 

엄마가 아픈 아이에게만 몰두할수록 엄마의 자존감은 떨어지게 마련이고, 

엄마의 낮은 자존감은 결국 아이에게도 악영향을 미치게 된다. 

장애/질환을 겪는 아이들의 경우 앞으로의 성장/발달에 이 자존감이 특히 중요하게 작용하기 때문에 

엄마의 자존감이 더더욱 중요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래서 요즘 나는 '엄마'라는 나의 역할과 나 자신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려고 더 노력하고 있다.  

한창 실내에서 놀기를 좋아하는 아이와 어떻게 하면 재미나게 놀까, 고민해서 새로운 놀잇감을 고안하는 한편, 

새로운 취미, 새로운 일거리를 발굴해 아이와는 전혀 관계없는 일도 벌려본다. 

(그래서 주말에는 미국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수업을 진행하고 있고,  1월엔 동네 아카펠라 중창단에도 들어가볼까 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내 아이를 위해, 또 다른 아이들과 그 부모들을 위해 KT와 관련된 모임을 꾸려보려고 분주히 움직이기도 한다. 

어떤 날엔 아이 엄마로서 몬테소리 교육법과 관련된 책을 읽고, 어떤 날엔 시를 읽고. 

어떤 날엔 아이를 무릎에 앉혀 애니메이션을 보고 또 어떤 날엔 친구와 함께 성소수자 영화제 개막작을 보러 간다. 

이런 다양한 활동을 통해 나는 나의 내/외적 균형감을 확보하며 자존감을 쌓아가고 있다. 


그런데 내가 이렇게 살아갈 수 있는 건, 나 자신의 의지만큼이나 충분한 사회적 지지가 확보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마 한국에서는 지금처럼 엄마로서의 역할 외에 다른 일이나 취미, 나만의 시간이라는 것을 가지며 살기가 힘들 것이다.  

아픈 아이를 보고 "엄마가 태교를 잘못해서 그런거 아니야"' 하는 사회, 

아픈 아이를 데리고 외출하는 엄마에게 "저런 걸 뭐하러 낳아서는 데리고 나와?" 하는 사회. 

그런 사회에서 이 엄마들이 어찌 감히 아이와 관계 없는 취미생활이나 외부 활동을 하며 살 수 있을까?

그리고 이런 사회에서 자란 아픈 아이들은 성인이 되어서도 함부로 집 밖에 나갈 수가 없다. 

엄마는 오랜 무력감과 죄책감에 평생 아이를 책임지느라 지쳐버리고, 

그런 엄마와 살아온 아이는 거꾸로 '나 때문에 엄마가 평생 힘들다'는 죄책감에 빠진다.  

어쩌다 혼자 집 밖에 나가면 "몸도 성치 않은 사람이 보호자도 없이 뭐하러 나와?" 하고 시비거는 사람들만이 있을 뿐이다. 


이렇게 한국 사회에서 아픈 아이와 그런 아이의 엄마는 어디서나 죄인이다. 

공공장소에서는 물론이고 심지어 가정에서도 엄마는 죄인이어서 무조건 아이를 위해서만 살아야 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최근 알게 된 한 엄마는 아이가 병을 갖고 태어난 것은 모두 엄마 탓이니 평생 죄책감 느끼며 살라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화재사고로 얼굴과 온 몸에 중증 화상을 입고 겨우 목숨을 건진 아이 곁을 지나가며 

내 아이에게 "너 불장난 하면 저렇게 된다, 알았지?" 하고 다짐을 받으며 종종걸음 치는 우리의 모습은 또 어떤가. 

우리, 정말 이렇게까지 엄마들에게, 아이들에게 모질어야 하는걸까? 


아픈 아이의 엄마가 죄인 취급을 받지 않아야, 

그런 엄마가 '엄마'로서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서도 살 수 있어야, 

아이들을 조금이라도 더 건강하게 키워낼 수 있다. 

아이가 아픈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통스러운 이 엄마들을 더 이상 벼랑 끝으로 내몰지는 말자. 

엄마가 행복해야 아이도 행복하다는 그 귀하고 좋은 말 한마디, 아픈 아이 엄마들과도 함께 나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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