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이수혁 전 국정원 차장 인터뷰

 D&D Focus 2010년 1월호

 

 

'전환적 사건'이 될 한반도 통일,

주변국은 대비 중!


 


대담 : 김종대 편집장

정리 : 서정환 기자


북한과 미국이 다시 대화 테이블로 돌아왔다. 지난 12월10일, 보즈워스 미국 대북정책 특별대표는 평양을 순방하고 돌아 온 후 “미북 양국이 6자회담 프로세스 재개의 필요성에 관한 공통의 이해에 도달했다”고 말했고, 북한 외무성 대변인도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똑같은 문구로 협상결과를 공표했다. 구체적으로 북한이 6자회담에 언제 어떻게 복귀할 지는 여전히 미지수지만 북한과 미국 사이에 단절된 대화의 물꼬가 다시 터졌다는 것은 분명하다.


쌓인 먼지 터는 6자회담 테이블


이 같은 상황은 곧 한국에게 다가 올 6자회담에서 어떤 주장을 담고,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 지 미리 대비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과거의 경험이란 발등에 불이 떨어지기 전에 미리 복습해 놓아야 할 과목이다. 이에 <디앤디포커스>는 이수혁 전 주독대사를 만나 과거 6자회담의 상황과 한국 측 대표부의 역할, 북한핵 문제의 내용, ‘그렌드 바겐’의 허와 실, 독일통일과 한반도 평화체제의 관계 등에 관한 그의 견해를 들었다. 이 전 대사는 2003~2004년 사이 3차까지 개최된 6자회담에서 한국 측 수석대표를 맡았으며, 그 이전인 클린턴 행정부 당시에도 4자회담의 한국대표단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이와 같이 오랫동안 북한과 한반도 주변 4강을 접촉해온 경력은 외교부 내에서도 매우 드물며, 지금까지도 한국 외교계의 가장 유력한 ‘대북통’으로 명성을 날리고 있다.


한국 외교사에 희귀한 ‘대북통’ 협상가


이 전 대사는 자신이 체험한 실무협상의 경험을 바탕으로 북한핵 문제를 분석한 <전환적 사건>(2008년, 중앙북스)을 집필하는 한편, 독일 통일에 관해서도 괄목할만한 연구 끝에 <통일독일과의 대화>를 탈고했다.

이 전 대사는 “북한핵 문제는 한반도 문제의 ‘핵’”이라며 “북한의 핵 보유를 전제로 해서는 한반도의 평화통일은 불가능 하다”고 말했다. 그는 또 “경제도 중요하지만 그것은 정부의 역할이 이미 한정된 것”이라며 “한국의 지도자가 국격을 높이고 개인적으로도 명성을 얻는 방법은 남북 문제를 잘 풀어 나가는 것”이라고 밝혔다.

다음은 본지가 이수혁 전 대사화 나눈 인터뷰 전문이다.


디앤디포커스(이하 디앤디) 국가정보원 차장을 맡기도 했지만, 외교관으로서는 주독일 대사로 유종의 미를 거두고 영퇴(榮退) 하셨다. 감회가 어떠셨는가.


이수혁 전 주독대사(이하 이수혁)1984년 쯤, 그러니까 독일이 통일되기 약 5년 전에 벨기에 브루셀에서 근무했다. 한 번은 가족을 데리고 베를린 구경을 나섰는데 하노버 회랑(回廊), 그러니까 서독 땅을 관통하는 동독 관할의 고속도로를 타고 가는 거였다. 그때 하노버에서 출발할 때 ‘지침’을 받는다. 출입국 시 유의사항인 거다. 당시에 하노버에서 서베를린까지 약 두 시간 반 정도 걸렸던 것 같은데 그게 참 까다로웠다. 멈춰서도 안 되고, 시속 80km이상으로 달려도 안됐다. 그러면 동독 군이 와서 잡아 간다는 거다. 그렇게 해서 서베를린에 가서 브란덴부르크 문 근처에서 까치발을 세워  1미터라도 조금 더 동독을 보려고 했다. 그런 살벌한 것들이 모두 하루아침에 사라져 버린 독일에 대사가 되어 다시 베를린에 살아 보니 감회가 사뭇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독일 ‘그리니케 다리’와 한국 ‘자유의 다리’


사실 2차 대전의 패전국 독일에서는 통일되기 1년 전까지만 해도 ‘통일 독일’을 얘기하는 것이 금기였다. 우리는 지금 통일 문제에 대해 많은 얘기를 할 수 있으면서도 그러지 못하고 있다. 나는 진보도 아니고 통일 지상주의자도 아니지만 이 불을 꺼뜨려선 안 된다.

베를린 포츠담에 가면 또 ‘그리니케 다리’라는 곳이 있었다. 동서독에서 각각 체포한 스파이들을 교환하는 곳이었다. 우리로 치면 ‘자유의 다리’같은 분단의 상징이다. 월터스 주독 미국대사라는 사람이 나중에 “나는 네 번의 전쟁을 경험했지만 독일 통일이 된 그 다음 날 그리니케 다리에서처럼 많은 남자들이 눈물 흘리는 광경은 전장에서도 보지 못했다”고 회고 했다. 독일인들이 이런 절박함과 열망을 가지고 있으니까 전 세계 지도자들도 독일의 통일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미국의 아버지 부시 대통령은 1990년 12월 말타 미소 정상회담에서 고르바초프 당시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게 “독일 사람들은 통일문제를 얘기할 때 눈에 눈물을 글썽이며 말한다”고 독일 국민들의 충심을 설명했다. 그러나 지금 같아선 미국 대통령이든 일본 수상이든 중국 수상이든 “한국 사람은 통일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할 것 아닌가. 한반도 통일의 조건이 무르익었을 때면 옛 독일에게 아버지 부시 대통령처럼, 우리 한국인들도 통일에 대한 우리의 간절한 마음을 설명해 줄 지도자들을 많이 가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통일에 대한 우리의 열정은 계속되어야 한다.


디앤디 독일통일이 우리의 한반도 평화에 주는 시사점이라면 무엇인가.


이수혁 1990년 7월 서독, 그러니까 사실상의 통일독일의 헬무트 콜 총리와 고르바초프 구소련 공상당 서기장이 정상대화를 열었고 이후 독소(獨蘇) 관계가 발전했다. 콜 총리는 당시 정상회담이 “워싱턴에서 독일에 대한 불신이 일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회고한 적 있다. 탄탄한 미국과의 관계는 독소 관계 발전을 경계할 필요가 없었다. 이런 경험을 보면 남북 관계의 발전이 한미동맹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삼각 관계적 인식이 언제나 옳은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우리에게도 win-win 전략이 요구된다. 남북한 상호의 안보와 남북 간에 진행해 온 긍정적 과제를 동시에 발전시킬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 주변국 모두의 안전이 보장되면서 한반도의 통일이 동북아 평화질서의 초석이 될 수 있는 미래지향적 해결책이 강구되어야 한다.


디앤디 우리처럼 같은 분단국 처지에서 보는 것과 달리,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을 때 유럽이나 세계 지도자들이 독일의 통일이 자신들의 안보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이수혁 지난 9월 영국의 <더 타임>이 당시 구소련 정부의 문서를 보도한 바 있다. 영국이나 고르바초프 등 당시 지도자들은 독일 통일을 자유민주주의의 입증이며 평화를 증진시키는 길로 보거나 그 길을 설계하는 기회로 보지 않고 위협으로 보았다. 물론 독일이 과거에 전쟁을 일으킨 역사를 보면 이해되는 바가 없지 않지만, 결과적으로 그런 세계 지도자들의 우려는 근거가 없었다. 지금 더 넓어지고 커진 독일은 유럽연합(EU)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정직하고 믿음직한 파트너임이 입증 됐다.


‘평화체제’는 로드맵 필요한 긴 여정


디앤디 국내 문제로 들어가 보자. 보즈워스 대사가 방북을 마치고 돌아왔다. 클린턴 미 국무부 장관은 그 전부터 ‘평화협정’을 언급하기도 했다. 이런 것을 보면 오바마 정부가 이제는 확실하게 부시 노선으로부터 이탈한 것으로 보인다. 대사께서는 앞으로의 전망은 어떻고, 한국의 입장을 어때야 할 것으로 보는가.


이수혁 나는 지금 미국의 방향이 괜찮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사실 평화체제 까지는 시간이 많이 걸리고 쉬운 문제가 아니다. 또 그 과정에서 로드맵을 만들어야 한다. 평화체제를 언제부터 어떤 방법으로 하나? 핵 문제는 어떻게? 이런 것이 나오니까 로드맵으로 다시 들어와야 한다. 동결 과정을 거쳐야 하고 검증 과정을 거쳐야 하고, 사안마다 결정과 합의만으로 되는 게 있고 기술적으로 시간이 걸리는 것이 있다. 이걸 조합하려면 시간차(差)가 불가피하다. ‘이거 다 귀찮다. 한꺼번에 하자’는 단번에 풀려는 방식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건 안 되는 것이다.

나아가 이 로드맵에서 우리가 지금 간과하고 있는 것이, 미국 외교의 관례(practice)를 알아야 한다. 자꾸 ‘수교, 수교’ 하는데 여기는 큰 함정이 있다. 미국은 여하한 경우에도 현안 문제를 미제로 두고 수교한 전례가 없다. 리비아도 핵문제 다 끝나고 검증까지 했는데도 미국과 수교를 맺는데 2년이 걸렸다. 핵 문제가 전부가 아니라는 거다. 그런데 하도 ‘수교, 수교’ 하니까 미국은 전체적인 협상의 로드맵에서 북한과의 수교를 맨 끝에 두었다. 내가 이것 때문에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모른다. 수교를 앞당기는 건 기대하기 어렵더라도 수교 협상의 개시시점을 앞당기는 것마저도 힘들어 했다. 예를 들어 ‘북한 인권문제’라고 하면 북한의 국내 문제다. 말도 못 꺼내게 하는 건데 거기다 대고 미국이 ‘너희(북한)가 인권문제 해결하면 수교 하겠다’고 하면 아무것도 안될 것 아닌가. 그런데 그런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수교를 하면 상원이 또 가만있겠나. 이런 걸 북한도 알고 있다고 보는데 그래서 함부로 수교 문제를 논할 게 아니다.


디앤디 아직도 6자회담에 관한 회의론, 무용론과 외교의 한계를 말하는 견해들이 있는데 그런 여론을 보면 어떤 느낌인가?


이수혁 ‘이게 과연 협상으로 해결되는 문제냐’는 근본적인 의문을 붙이는 거다. 92년에 1차 핵 위기가 발생해서 지금 20년 가까이 끌어 왔고 여기에 장거리 미사일 실험까지 하는데 협상가지고 되느냐 한다. 그런데 이건 무용론이라기보다 ‘불평’이다. 아직도 협상을 통해 북한 핵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는. 그렇지만 협상을 안 하면 무슨 방법이 있나. 협상 이외의 방법이라면 전쟁? 지금 뭐 어떤 사람들이 이스라엘이 이라크를 옛날에 한 번 쳤듯이 쳐버리자 하지만, 말뿐이다. 일어나지 않을 일이기 때문에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나이브한 거다. 그런 사람들 말을 귀담아 들을 필요는 없고 ‘협상이 왜 안 풀리느냐’에 천착하고 들어가야 한다.


디앤디 북한핵 문제를 경시하는 경향이 있어서 그런 것 아닌가.


이수혁 6자회담 협상 초기만 하더라도 2년 이내에 북한핵 문제가 해결되기 바랐다. 그런데 핵무기 만들겠다는 나라가 그저 ‘바겐’같은 ‘단기 흥정’을 목적으로 투자를 할 수 없다. 물적, 정치적, 외교적 리스크를 온 몸으로 받아야 하는 구조적인 문제지 일개 사건이 아니다. 나는 ‘북한 핵 문제는 한반도 문제의 핵’이라는 지론을 가지고 있다. 북한핵 문제라고 해서 핵 하나만 풀어서는 되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랜드 바겐’이라고 쓰는 거면 맞는데 그런 의미인 것 같지는 않다. 북한핵 문제는 북한이 핵이라는 기술을 가졌냐 아니냐로 접근하면 간단하고 금방 풀릴 것 같지만 굉장히 복잡한 안보 문제의 핵심이다. 한반도의 전반적인 문제 해결의 큰 틀에서 봐야 한다.


인간적 관계로 북측에 쓴소리


디앤디 외교에서 복잡한 내막에서 4차 6자회담 진행하면서 비공식적인 관계도 굉장히 중요하다. 초기 6자회담에서 한국 측 대표로서 김계관(북한 외무성 부상)이나 리근(북한 외무성 북미국장) 등 다른 대표를 봤을 때 그 사람들과의 인간적 관계가 직무 수행하는데 어떤 영향이 있었나.


이수혁 난 사실 김계관이나 리근은 6자회담 아닌 4자회담, 뉴욕 채널에서 만났다. 그 당시(1997년)에는 첫 남북 간 채널을 만든 다는 스릴을 느끼던 중이었다. 최초의 남북 간 공식 채널을 만들면서 김계관을 처음 만났고, 리근 같은 경우는 그 전, 1992년 1차 핵위기 당시 유엔에서 일하면서 북한 사람들을 많이 보아 오다가 그 대표단에 있던 그를 처음 (직접 접촉 없이)봤다. 나중에 오래 사귀다 보니까 서로를 잘 알고, 어느 때부터인가 별의 별 농담을 다 하며 편하고 솔직하게 만났다. 특히 차석대표 리근은 나랑 절친하게 지냈다. 개인적인 인간관계가 있으니까 신뢰도 얻고 우리 쪽에서는 바른 얘기도 많이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북한(측 대표단)이 나를 많이 이용한 듯하다. ‘이용’이라는 게 다른 것이 아니고, 이 사람들이 평양에 뭔가를 보고하면 평양이 잘 안 믿을 수도 있었고, 미국을 늘 접촉해온 사람들은 평양에서 ‘친미주의자’라는 라벨을 붙이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다. 북한은 외교관의 입지가 상당히 좁았다. 그런데 자기들이 어떤 보고를 직접하기 보다는 “남조선의 이수혁 대표가 이런 얘기를 하더라”고 보고를 하는 것이 훨씬 평양을 설득하는 것에 도움이 됐던 것이다. 예를 들어 북한에서 ‘북미 간 불가침 조약’ 얘기를 잠시 했는데 지금은 그런 얘기가 없지 않나. 나는 그것이 내 공이 굉장히 크다고 본다. 내가 당시 북측 대표들에게 “미국 역사를 공부해 봐라. 국제연맹 만들자고 해서 미국이 다 만들어 놓고 미국 상원이 비준 안 해서 자기들이 만들어 놓은 연맹에 들어가지 못했다. 미국은 행정부가 한다고 해서 의회가 받지 않는다. 더구나 미국은 다른 나라와 불가침 조약을 맺은 적이 없다. 그런 미국이 북한 때문에 불가침 조약을 맺겠느냐. 그랬더니 2차 회담 때인가부터 불가침 조약이 빠진 것이다. 북한이 미국을 우습게 본다거나 하지 않고, 좋게 말해 미국의 영향력과 힘을 인정하게 하는 등 국제 정치의 현실을 많이 이해시켜 주는 기여를 많이 했다고 나름대로 생각한다. 그런 기조에 대해선 지금도 북한이 그런 문제에 근본적 이의를 달거나 하지 않는다.


디앤디 그런 면에서는 북한의 외교가 나름대로 발전해 왔다고 보는 게 맞는가?


이수혁 적어도 북한 외교부에 있는 사람들은 알 것 다 알고 하지만 또 정부의 훈령이라는 게 있으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지만... 그런 것이 비합리적이라기보다 개개의 외교관의 생각하고 조직의 특성과 계층 등 전체적인 면에서 보는 것은 또 다를 수 있지 않나. 민주주의 국가는 그런 갈등이 비교적 적지만 아무래도 북한은 더 클 것이다.


디앤디 대사님의 책 <전환적 사건> 중, ‘전술적 거짓말’편(tactically lie, 295쪽)이 참 재밌는 대목인데, 북한이 섬세하지 못한데서 오는 문제에 대해 대사께서 북한의 코치 역할을 맡기도 했다.


이수혁 이게 당시에는 그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 협상 안에서는 너무 큰 사건1)이었다. 미국이 너무나 화를 냈다. 근데 그 ‘거짓말(lie)’이라고 했느냐 안했느냐는 사실 좀 헷갈린다, 김계관은 “나는 거짓말이라고 하지 않고 ‘전술이었다’라고만 했다”고 그랬다. 그래서 나중에 또 당시 미국 관리한테 “북한은 ‘lie’라고 안했다는데?”라고 물어 봤더니 그 관리는 또 “거짓말이라고 한 건 아니고 전술적이었다고 말을 했다”는 거다. 다만 “그렇게 해석 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뿐이었다는 것이다. 미국도 (남북을 포함한)한국 사람들의 사고를 잘 이해를 못했고 북한도 ‘거짓말’에 대한 미국인들의 거부감을 제대로 이해 못했다. 그래서 내가 김계관한테도 “미국이라는 나라는 초등학교 때부터 ‘거짓말’에는 정학을 줄 정도로 ‘정직(honesty)’이 중요한 덕목이다. 미국 사람들한테는 ‘그때는 입장이 그래서 이렇게 얘길 했다’고 설득을 해야한다”고 얘기했다. 그렇게 해서 미국 사람들 설득해 줘야지 또 어떻게, 그걸로 싸워서 협상이 진행되면 안되지 않나. 그런 미국과 북한 간의 문화의 차이, 그래도 우리는 한 민족이니까 우리의 속성을 아는데, 미국 사람들은 모르니까.


디앤디 그럼 미국 쪽은 괜찮았나.


이수혁 정말 미국도 답답했다. 숙제를 안 해 오는 거다. 북한에게 제시할 더 구체적인 안을 가지고 만나자고 하면 우리는 밤새 연구를 해서 뭐라도 만들어 갔는데 미국은 연구가 없었다. 그래서 내가 6자회담 대표를 할 당시 북한에 제안하는 것은 전부 우리 안이었다. 그때는 미국에 끌려가는 외교를 한다거나 그런 일은 없었다. 미 국무부와 백악관 내에서도 우리의 입장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모처럼 우리가 안도 만들고 하니까 우리 국민들도 또 좋아했다. 그래서 초창기에는 신이 났다. 미국 내부에서 네오콘(신보수주의자, 강경파)하고 온건파들이 참 갈등이 많았던 틈새에서 그래도 발언권을 얻고 하는 것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게 없다.


뭘 모르던 북한, 숙제 안 하던 미국


디앤디 우리에게도 그런 어려움은 있다. 대북정책을 담당하는 통일부와 다자회담을 담당하는 외교부로 이원화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예를 들어 ‘평화체제’의 주무부처가 어디냐 하는 문제가 있다. 이런 면에서 어려움을 많이 겪는 게 사실이다.


이수혁 독일 통일을 보면 철저히 내부 문제와 외부 문제를 구분했다. 내부 문제는 어느 나라도 개입하지 못하게 한 반면 외교 문제는 철저히 국제 공조를 이뤘다. 예를 들어 통일독일의 군이나 NATO군을 동독에 배치하는 문제와 같은 경우는 주변국과 충분한 협의를 거쳐서 결정을 하고 대신 통일 독일의 경제나 제도 정립 문제는 내부에서 스스로 결정했다.

한반도에서 ‘평화체제’라는 것도 결국 한국 전쟁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보면 이것은 외교문제로 본다. 한국 전쟁 당시 유엔군도 들어오고, 중국군도 들어와서 많이들 죽고 또 그들 간에 정전협정도 맺고 하지 않았나. 그러므로 한국 전쟁은 국제 전쟁인 만큼 이는 외교의 문제로 봐야 한다. 통일부는 남북 간의 통일을 대비하고, 촉진하는 역할만으로도 벅찰 것이다. 독일이 40년 간 분단된 후에 통일을 이뤘더니 서독에 연간 1천억 유로 정도(약 1400억 달러)를 쏟아 부어서 20년이 지난 이제야 경제적, 사회적 통합을 겨우 3분의2정도 이뤘다. 한반도의 통일은 그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다.


디앤디 끝으로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면?


이수혁 CNN에서 일하던 한국인 기자에게 들은 얘기다. 자기가 한국 대통령 선거 때 “한국 대선을 보도 하겠다”고 하니까 데스크에선 “한국 대통령 선거가 무슨 의미냐. 미국인이 CNN을 통해 한국 대통령 선거를 보아야 할 이유를 설명해 보라”고 되물었다더라. 그러니까 처음에는 순간적으로 당황스럽고 창피한 감도 들다가 언뜻 생각난 게 핵문제라서 “한국의 대통령이 누가 되느냐에 따라 한미관계와 남북관계에 대한 접근법이 달라지고 이는 북한 핵문제, 나아가 미국의 이익에 영향을 줄 것”이라고 말하니까 데스크에서 수락하길 “그렇다면 그런 식으로만 보도를 하라”고 했다더라. 즉 한국의 지도자가 뭘 해야 ‘국격’을 높일 수 있냐 하면 바로 ‘남북 문제’를 잘 풀어야 한다. 경제 잘한다고 국격이 높아지는 것은 아니다. 경제는 기본적으로 기업들이 하는 것이고, 정부가 경제에서 차지하는 역할이란 어느 나라 지도자나 다 하는 것이다. 사실 경제 문제가 이슈화를 하고 아젠다를 선점하기에 제일 편한 문제다. 그러나 지도자라면 하기 어려운 일,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일을 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한국에서는 남북 문제를 잘 풀어가는 일이다. 더러 차기 대선주자로 꼽히는 인사들을 만날 때마다 지도자 개인의 명성을 위해서라도 통일 문제에 대해서 진지하고 획기적인 아젠다를 가지고 추진해야 한다고 말하곤 한다.


1) 2004년6월24일, 이틀 째 열린 제3차 6자회담에서 제임스 켈리 차관보가 “2003년4월23일 베이징 남․북․중 3자회담에서 리근 미국 부국장이 핵무기 보유를 주장했는데 이 핵무기가 동결의 대상에 포함되느냐”라고 물었다. 이에 북한의 김계관 부상이 “그때 리근 부국장은 핵보유를 전술적 이유에서 거짓 주장했다(tactically lied)”며 “당시 핵보유는 사실이 아니다”라고 말하여 파문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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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월간 군사전문지 <디펜스21+> 편집장, 한겨레 군사사이트 <디펜스21> 전문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