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땅인데예, 말은 겡상도 식인기라” 제철여행

여행
경북·전북·충북 접한 삼도봉 자락 ‘신 나제통문’ 무주 무풍면 여행

삼도봉(1177m)은 경북 김천시, 전북 무주군, 충북 영동군에 접한 봉우리다. 민주지산에 딸린 산으로, 3개 도의 경계를 이룬다 해서 삼도봉이다. 삼도봉 남쪽 자락, 무주군의 동북쪽 끝 지역. 대덕산·삼봉산·흥덕산 등 해발 1000m 이상의 산들에 둘러싸인 조용한 고산 분지의 고장 무풍면이 있다. 전란 등 재앙을 피할 수 있는 ‘십승지’의 하나로 꼽혀온 곳이다.

하지만 무풍면은 무주구천동과 덕유산, 적상산 등 명산·명소들 위세에 가려, 찾아오는 이 드문 ‘관광의 무풍지대’다. 4개 도, 4개 시·군 어디서든 무풍면으로 들어가려면, 높은 고개나 터널을 거쳐야 한다. 외지인 발길 뜸한 곳이면서 한편으론, 외지인이 보기에 다소 혼란스럽게 느껴지기도 하는 고장이다.

“여가 전라도 땅이라예. 우리가 전라도 사람이라캐도, 말은 맹 겡상도 식이라. 고마, 그래 돼뿟다.”(무풍면 현내리 주민) 소속은 전라도요, 말씨는 경상도다. 이렇게 된 이유가 있다.

신라 때부터 영남, 조선말 호남 편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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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제통문. 무주읍내 쪽에서 무풍면으로 가려면 이 석문을 지나야 한다.

무주읍내에서 무풍면으로 가려면 나제통문(羅濟通門)을 지나야 한다. ‘신라-백제를 잇는 문’이란 뜻을 가진 석굴(높이 5~6m, 폭 4~5m)이다. 삼국시대 신라·백제의 경계를 이루던 산 능선 절벽에, 일제강점기 도로 개설을 위해 길이 10여m의 석굴을 뚫었다.

석벽이 있는 능선 동쪽은 신라 경덕왕 때부터 개령군(현 김천)에 속한 무풍현이었고, 능선 서쪽(현 무주읍내)은 백제 때 적천현이었다가 고려 때는 주계현이 됐다. 조선 시대 무풍현과 주계현을 합치며 지금의 무주군이 탄생했다. 무풍 주민들은 무주보다 가까운 김천·거창 생활권과 그쪽 말투를 유지하며 살고 있다.

이랬던 전라도 무풍면에 18년 전, 경북 김천시 부항면으로 넘어가는 ‘삼도봉 터널’이 뚫리면서 경상도 생활권이 더욱 가까워졌다. 1999년 전북도와 경북도가 ‘교통불편으로 단절돼 있던 두 지역의 교류 촉진 등을 위해’ 백두대간 길목인 부항령(가목재)에 도로를 내고 터널을 뚫은 것이다. 부항령(607m)은 무풍장·김천장 보러 양쪽 주민들이 소 끌고, 짐 지고 넘나들던 고개다. 터널 이름은 3개 도 경계를 상징한다.

삼도봉 터널 피서객 중엔 자녀를 데리고 온 가족도 자주 눈에 띈다.
삼도봉 터널 피서객 중엔 자녀를 데리고 온 가족도 자주 눈에 띈다.

눈길을 끄는 것은, 이 터널이 실제로 영호남 지역 주민들이 자연스럽게 만나 교류하고 대화하는 ‘소통의 새 나제통문’으로 이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차암 놀기 좋아요. 바람 시원하고, 이런 데 또 있나 싶으다.” “여 앉아 묵고 자고 놀다 보면 더위 모리고 여름 난다.”

무주군 무풍면 금평리와 김천시 부항면 어전리를 잇는 왕복 2차선 1089번 지방도. 길이 391m, 폭 11m의 삼도봉터널 안 보행로에 돗자리 깔고 둘러앉아 심심풀이 화투를 치던, 무풍면 현내리 상하마을 할머니들 말씀이다. 폭염이 기승을 부리던 지난달 29일 오후 터널엔, 무풍면과 부항면 쪽에서 각각 승합차·트럭·오토바이 타고 올라온 어르신들 등 20여명이 터널 안팎 곳곳의 그늘에 돗자리를 펴고 앉아 놀고 먹고 쉬고 있었다.

영호남 어르신 함께 터널 안에서 ‘피서’

양쪽 보행로(폭 1.5m)는 화투 치거나 장기 두는 어르신들, 주무시는 어르신들, 자녀를 데리고 와 앉고 누워 이야기 나누는 가족들, 음료·막걸리 자시는 어르신들까지 북적댄다. 삼도봉터널은 한마디로 양쪽 주민들의 피서지요, 놀이터요, 공동 마을회관이었다. 상하마을 할머니들이 준비해온 것들을 살펴보자. 밥솥과 냄비와 프라이팬에, 칼·도마와 휴대용 가스레인지에, 과일·채소가 담긴 커다란 양푼에, 참기름에 모기약까지…. 터널에 아주 한 살림을 차린 형세다.

삼도봉터널 안에서 더위를 식히며 화투놀이를 즐기는 어르신들.
삼도봉터널 안에서 더위를 식히며 화투놀이를 즐기는 어르신들.

김천시 구성면 임천리 노인회관에서 열댓명과 함께 왔다는 문동열(82)씨는 “무풍 넘어가 왕갈비탕 한 그릇씩 묵고, 놀다 가려고 터널에 들렀다”고 했다. 어르신들 일부는 부항령 소공원의 그늘진 정자에서 낮잠을 즐기기도 했다.

차는 20~30분에 한두대씩 오갈 정도로 뜸한데, 속도를 늦추고 터널 안에 모인 사람들을 신기해하며 구경하는 이들이 많았다. 할머니·할아버지들은 준비해온 음식·과일을 서로 권하고 나누어 먹고 마셨다. 심지어 차 타고 구경하며 지나가는 사람들에게도 “부침개 좀 먹고 가소” 하며 권했다.

무주-김천 잇는 삼도봉터널엔
놀러온 주변마을 사람들 가득
함께 먹고 웃으며 ‘동서 화합’
구경꾼에 베푸는 인심도 푸짐

삼도봉터널 안에서 부침개를 부쳐먹기도 한다. 무풍면 현내리 상하마을 주민들.
삼도봉터널 안에서 부침개를 부쳐먹기도 한다. 무풍면 현내리 상하마을 주민들.

“오늘은 즉네. 말또 마요. 터널 생기고부터 얼마 전까지도 여름마다 터널 안이 드글드글했다꼬. 무풍서도 오고 부항서도 오고, 더 멀리서도 와요. 바람이 참 시원하그등.”

더위 피해 자주 터널을 찾는다는 현내리 주민 이상문(76)씨는 “한 3년 전까지도 터널 양쪽에 국수·부침개·막걸리 등을 파는 노점이 두 곳 있어서 참 좋았다. 그런데 위험하다며 노점 영업을 금지한 뒤로 터널 찾는 사람도 많이 줄었다”고 했다. 전엔 국수 먹으러 일부러 찾아오는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국숫집도 없고 찾는 주민이 줄긴 했어도, 동굴 바람 쐬며 쉬려는 영호남 마을 어르신들 발길은 요즘도 여전하다. 한여름 무주·김천 여행길에 부항령 넘을 기회가 있다면, 그리고 삼도봉터널 입구에 트럭·승합차·오토바이 들이 줄지어 서 있다면 잠시 내려보는 것도 좋겠다. 함께 어울려 ‘피서’ 즐기는 정 많은 영호남 어르신들을 만날 수 있으니.

선인 발자취 깃든 ‘사선암’ 탐방 해볼만

무풍면의 볼거리도 짭짤하다. 가장 큰 자랑거리는 설천면 벌한마을과 경계를 이루는 철목리 뒷산, 해발 800m 능선에 자리잡은 사선암이다. 높이 15~16m쯤 되는 한 무리의 수직 바위벽에, 무풍 일대에 세거해 살던 하씨·이씨·권씨 등의 이름이 곳곳에 새겨져 있다. ‘사선암’은 신라 때 4명의 화랑이 수련하던 곳이어서 붙은 이름이란 얘기도 있지만, 무풍에 살며 이곳을 자주 찾던 권철로·하현·하재만·이해교 등 4명의 선비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바위 한 면에 ‘사공장구지소’(四公杖?之所)란 글씨가 새겨져 있다. ‘네 명의 선비가 지팡이와 신발을 벗어두던 곳’이란 뜻이다. 대개 학식 높은 인물의 제자나 후학들이 스승이 머물던 곳임을 나타내기 위해 새기는 글인데, 전국 곳곳 경치 좋은 곳 바위에 새긴 ‘○○선생장구지소’ 글씨가 많이 남아 있다. 바위에 새겨진 이름 중엔 ‘이시발’이란 이도 있다. 임진왜란 때 활약한 조선 중기 문인 이시발과 동명이인이다.

사선암 바위벽에 새겨진 ‘사공장구지소’. 네 선비가 지팡이·신발 등 차림을 풀어놓았던 곳이라는 뜻이다.
사선암 바위벽에 새겨진 ‘사공장구지소’. 네 선비가 지팡이·신발 등 차림을 풀어놓았던 곳이라는 뜻이다.

사선암 꼭대기까지는 설치된 밧줄을 잡고 잠시 오르면 닿는다. 꼭대기엔 10여명이 앉을 수 있는 평평한 바위가 있고, 한가운데 바둑판이 새겨져 있다. 여기서 무풍면소재지와 반대편의 벌한마을이 훤히 내려다보인다. 철목리에서 사선암까지 3시간이면 걸어서 다녀올 수 있는 2.8㎞의 탐방로(신선길)가 개설돼 있다.

사선암 꼭대기 너럭바위엔 바둑판이 새겨져 있다.
사선암 꼭대기 너럭바위엔 바둑판이 새겨져 있다.

철목리에선 과일따기 등 체험행사 다채

철목리 소마실 골짜기엔 높이 7m가량의 아담한 폭포 소마실폭포가 있다. 옆 산에서 토사가 밀려 내려와 소를 메워버린 모습이지만, 물은 매우 깨끗하다. 폭포 왼쪽 바위에 ‘세심대’란 각자(새김글)가 보인다. 무풍면소재지 북리마을엔 진주 하씨 가문의 인물들을 모신 백산서원이 있다. 이 서원엔 조선 세종 때 영의정을 지낸 하연 부부의 초상화(‘문효공과 정경부인 영정’·도유형문화재)가 보관돼 있다.

무풍면소재지 북리의 백산서원.
무풍면소재지 북리의 백산서원.

철목리 마을 체험행사장이자 숙소가 있는 ‘무풍승지 방문자센터’를 찾으면, 블루베리·복숭아·사과 수확 체험, 산야초떡 만들기 체험, 목장 치즈 만들기 체험 등을 할 수 있다. 김원수 철목리 마을위원장은 “한 가족이라도 예약하면, 회관에서 먹고 자며 삼도봉터널이나 사선암 탐방, 갖가지 농촌 체험을 즐길 수 있다”고 말했다.

무주/글·사진 이병학 선임기자 leebh99@hani.co.kr

삼도봉터널 안에서 저녁식사까지 해결하고 돌아가는 어르신들도 있다.
삼도봉터널 안에서 저녁식사까지 해결하고 돌아가는 어르신들도 있다.

무풍면 철목리 뒷산 사선암의 일부. 철목리에서 사선암까지 탐방로(신선길)가 조성돼 있다.
무풍면 철목리 뒷산 사선암의 일부. 철목리에서 사선암까지 탐방로(신선길)가 조성돼 있다.

사선암 바위벽엔 이곳을 찾았던 선인들 이름이 새겨져 있다.
사선암 바위벽엔 이곳을 찾았던 선인들 이름이 새겨져 있다.

더위를 피해 삼도봉터널로 모여드는 주민. 김천시 부항면 쪽 입구 모습이다.
더위를 피해 삼도봉터널로 모여드는 주민. 김천시 부항면 쪽 입구 모습이다.

삼도봉터널 안에서 바라본 무풍면 쪽 입구.
삼도봉터널 안에서 바라본 무풍면 쪽 입구.

철목리 소마실 골짜기의 소마실폭포.
철목리 소마실 골짜기의 소마실폭포.

무풍면 철목리의 400년 된 느티나무.
무풍면 철목리의 400년 된 느티나무.


무주 무풍면 여행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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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을 곳 

무풍면소재지에 경상도식 돼지국밥, 한우곰탕 등을 내는 식당이 몇 곳 있다. 철목리 ‘무풍승지 방문자센터’에 미리 예약하면 2층 식당에서 비빔밥(7000원)·시골밥상(8000원) 등을 차려준다.

묵을 곳 

무풍면소재지에 민박집이 몇 곳 있다. 철목리 ‘무풍승지 방문자센터’에도 4인실·단체실 등 숙소가 있다. 방문자센터에서 민박집 안내도 받을 수 있다. 무주일성리조트(일성콘도)도 무풍면에 있다.

여행 문의 

무주군 관광안내소 1899-8687, 철목리 ‘무풍승지 방문자센터’ (063)324-5129, 김원수 철목리 마을위원장 010-5157-1759, 무풍면 주민센터 (063)320-5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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