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몽드 디플로 기획-북핵 20년과 3차 핵실험: 합의와 퇴행(중) 북핵 20년

르몽드  54호  2013.03.10 본지   특집 6422자 29면 임수호








북한 핵문제가 대두된 이래 북한과 국제사회 간에는 모두 세 번의 비핵화 합의가 있었다. 첫 번째 합의는 1991년 12월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이하 공동선언)이다. 남과 북이 핵무기를 시험·제조·생산·접수·저장·배치·사용하지 않음으로써 한반도를 비핵지대로 만들자는 약속이다. 공동선언은 북한의 핵실험으로 사문화된 상태다. 

이에 따라 한국 사회에서도 공동선언 폐지론이 대두되고 있다. 그러나 공동선언 폐지는 북한 비핵화를 포기하는 것이고 국제사회에 의해 잠재적 핵무장 선언으로 받아들여질 개연성이 높다는 지적이 많다. 

1991년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 

공동선언은 한반도 비핵화의 준거 규정이지만, 문제와 한계도 있다. 우선 재처리·농축 시설을 포기함으로써 평화적 핵 이용권을 스스로 제한한 점이다. 재처리·농축 시설은 핵무기 제조에 필수적이지만, 핵의 평화적 이용 주기 완성에도 필수 시설이다. 핵확산금지조약(NPT) 회원국의 권리이기도 하다. "목욕물을 버리면서 아기까지 버린 격"이라는 비판이 제기되는 이유이다. 

다음으로 핵보유국들의 핵전력 운용을 제한할 규정이 없다는 점이다. 한반도가 온전한 비핵지대가 되려면, 남과 북이 핵무기를 포기할 뿐 아니라 주변 핵보유국들이 남과 북을 핵으로 공격하거나 위협하지 않는다는 '소극적 안전보장'이 제공돼야 한다. 그런데 이것이 빠져 있다. 물론 이는 공동선언만의 문제는 아니다. 비핵지대 조약 중에서 핵보유국들이 '소극적 안전보장 의정서'(NSA)를 비준한 경우는 '중남미 비핵지대조약'(1968)이 유일하다. '남태평양 비핵지대조약'(1986)은 미국이, '아프리카 비핵지대조약'(1996)은 미국과 러시아가 비준을 거부하고 있고, '동남아시아 비핵지대조약'(1997)은 모든 핵보유국들이 서명조차 거부하고 있다. 공동선언의 경우 아예 관련 논의조차 없었다. 

소극적 안전보장 의정서가 없더라도 핵전력 운용을 제안할 방법은 있다. 조약에 외국 핵무기의 '출입·통과'를 금지하거나 제한하는 규정을 두는 것이다. 현재까지 금지 규정을 둔 조약은 없지만, 제한 규정을 둔 조약은 있다. 

1994년 북-미 제네바 합의 

두 번째 합의이자 '미국이 산 첫 번째 말(Horse)'은 1994년 10월 북-미 제네바 합의다. 북한이 1992년 이전에 추출한 핵물질('과거 핵')과 1994년에 인출한 폐연료봉('현재 핵'), 그리고 영변 핵시설('미래 핵')을 폐기하는 대가로 미국은 북한에 소극적 안전보장과 북-미 수교, 그리고 2003년까지 200만kW급 경수로를 건설해준다는 약속이었다. 

문제는 합의 이행의 정치적 의지였다. 합의 직후 미국은 '공화당 혁명'(공화당의 상·하원 장악), 북한은 '선군혁명'에 직면한다. 보수주의 세력이 대두되면서 합의 이행에 제동이 걸렸다. 빌 클린턴 행정부는 공화당과의 갈등 사안이 산적한 상황에서 굳이 북한 문제 때문에 정치적 자본을 소진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김일성 사망 이후 북한 붕괴에 대한 기대감이 팽배하면서 합의 이행은 불필요한 일로 간주되기도 했다. 김일성 사망 이후 유례없는 위기('고난의 행군') 속에서 김정일 정권의 관심도 대내 안정에 쏠렸다. 대외관계는 전략적으로 관리되지 못했고, 그 결과 선군정치와 함께 급부상한 군부 강경파의 분파적 이익에 포획되고 말았다. 

제네바 합의를 낳은 것이 전쟁 위기(1994년 6월)였다면, 죽어가던 합의를 되살린 것은 대포동 위기였다(1998년 8월). 대포동 시험 발사는 제네바 합의를 결정적 좌초 위기로 몰아갔다. 합의 파기 목소리가 한·미·일 정계를 지배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윌리엄 페리 전 국방장관에게 대북정책 재검토를 지시한다. 의회 및 관련국과 조율을 거쳐 페리가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다. 

첫째, 제네바 합의가 파기될 경우 북한은 핵무장을 재개할 것이다. 국제사회가 제재를 취하더라도 북한정권이 무릎을 꿇기 전에 동아시아에 지정학적 지진(Geopolitical Earthquake)이 발생할 개연성이 높다. 둘째, 따라서 기존 '제한적 관여정책'을 버리고 '전면적 관여정책'을 취하는 수밖에 다른 대안은 없다. 셋째, 북-미 수교를 포함한 과감한 정치·경제적 보상을 제공함으로써 북한의 핵·미사일 문제를 일괄타결 방식으로 해결한다. 넷째, 대북 관여는 효과가 나올 때까지 장기간 인내심을 가지고 추진한다. 

'페리 프로세스'는 급속도로 추진됐다. 사전 조율의 힘이었고, 한국 정부의 정책 변화와 북한의 재안정이 큰 도움이 됐다. 경수로 공사와 미사일 협상에 속도가 붙으면서 북-미 수교에 바짝 다가섰다. 2010년 10월 북한 군부의 실력자 조명록 차수가 워싱턴을 방문해,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과 '북-미 공동 코뮈니케'를 발표한다. 핵·미사일 문제와 북-미 수교, 평화협정을 일괄타결한다는 것이 골자였다. 올브라이트는 평양에 가서 김정일을 면담한다. 북-미 수교를 확정짓기 위한 클린턴 대통령의 방북 일정이 잡혔다. 지구적 탈냉전의 완성이 임박했다. 

2002년 다시 터진 북핵 위기 

클린턴 방북을 앞두고 공화당 부시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다. 클린턴은 방북을 포기했고, 페리 프로세스는 추진력을 상실한다. 제네바 합의는 다시 표류했고, 2002년 10월 북핵 위기 재발과 함께 폐기된다. 클린턴 행정부는 비확산(non-proliferation) 관여정책 차원에서 북핵 문제에 접근했다. 북한 핵개발이 비확산 체제의 안정성을 훼손할 뿐 아니라 동북아에 핵무장 경쟁을 촉발시킬 수 있다고 보고 주고받는 협상을 통해 핵개발을 저지하려 했다. 반면 부시 행정부는 반확산(counter-proliferation) 강경정책 차원에서 북핵 문제에 접근했다. 협상을 통한 핵개발 저지는 어렵다고 보고 외부 확산 방지에 초점을 두는 한편, 북한의 핵위협은 미사일 방어망이나 선제공격 능력 강화와 같은 억지력 증강을 통해 대처하려 했다. 

물론 비핵화 협상을 배제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협상은 어디까지나 북한의 비협력성을 공개 입증함으로써 '처벌을 위한 국제연대' 형성을 뒷받침하는 수단으로 간주됐다. 비핵화는 정권 붕괴나 그것이 임박한 상황에서 북한의 백기투항으로만 가능하다고 봤다. 따라서 양자회담보다는 다자회담(탈출구 봉쇄)을, 동시행동에 따른 점진적 비핵화보다는 '선(先) 핵포기, 후(後) 보상'의 일방적 비핵화를 선호했다(비협력성 입증). 그 결과 부시 행정부 1기 동안 한 차례의 3자회담과 세 차례의 6자회담이 열렸지만 아무런 성과도 도출하지 못했다. 

2005년 들어 북한과 미국은 정책 전환을 시도한다. 2005년 2월 10일 북한은 핵보유를 선언한다. 그러고선 핵무기를 포기하게 하려면 미국의 대남 '핵우산'도 함께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핵 프로그램은 북-미 수교, 평화협정, 경수로 등과 교환할 수 있지만, '이미 만든 핵무기'는 수교나 평화협정 체결 이후 핵우산 폐기와만 교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기존 비핵화 프로세스를 비핵화 프로세스와 핵군축 프로세스로 나누어 접근하겠다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부시 행정부 2기를 맞아 네오콘에 억눌려 있던 현실주의자들의 목소리가 분출했다.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으로 대표되는 이들 역시 대북 강경론자들이고 반확산 정책 지지자들이지만, 반확산에만 매달려 북한의 핵능력 증강을 방치하는 것은 미국의 국익에 바람직하지 않다는 입장이었다. 반확산 정책과 함께 문제 해결을 위한 진지한 협상이 다시 시도돼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체제 수립이 병행돼야 한다고 보았다. 2005년 9월 제4차 6자회담에서 채택된 '9·19 공동성명'은 미국 정책 전환의 결과물이다. 

2013년 북한 3차 핵실험 

공동성명은 한반도 비핵화 관련 세 번째 합의이자 '미국이 산 두 번째 말'이다. 북한이 핵무기와 모든 핵 프로그램을 폐기하는 대가로 미국 등 6자회담 당사국은 소극적 안전보장, 북-미·북-일 수교, 평화체제 수립, 경수로를 제공한다는 약속이다. 제네바 합의와 달리 공동성명에는 합의 이행 로드맵이 없다. 로드맵에 대한 합의는 2007년에 가서야, 그것도 부분적으로만 이루어졌다. '9·19 프로세스'의 1단계에 대한 합의가 '2·13 합의'(2007년 2월)다. 북한이 3개 플루토늄 핵시설을 폐쇄·봉인하는 대가로 미국 등 관련국은 중유 5만t을 제공하고 관계 개선 논의를 시작한다는 내용이다. 1단계는 2007년 8월 완료됐다. 2단계에 대한 합의는 '10·3 합의'(2007년 10월)다. 북한이 3개 핵시설을 불능화하고(핵심 부품 제거 후 북한 내 특별관리) 우라늄 농축을 포함한 모든 핵 프로그램을 신고하는 대가로 미국 등 관련국은 중유 95만t을 제공하고 테러지원국 지정 및 적성국교역법 적용을 해제하며, 평화체제 협상틀을 가동한다는 내용이다. 2단계는 80%가량 진행된 상황에서 핵사찰 준비 협상이 최종 결렬되면서 중단됐고(2008년 12월), 이후 북한은 불능화한 핵시설을 복원했다. 따라서 현재 공동성명 자체는 살아 있지만, 로드맵에 대한 합의들은 파기된 상황이다. 

그 이후 단계는 합의된 바 없다. 핵심 쟁점은 핵무기 폐기 시점과 경수로 건설 시점이다. 북한은 북-미·북-일 수교, 평화협정, 경수로와 핵 프로그램 폐기를 맞바꾼다는 입장이지만, 미국은 핵무기 폐기도 포함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반면 북한은 핵무기는 수교 및 평화협정 체결 이후 핵우산 폐기와 연계해 폐기한다는 입장이다. 또한 미국은 비핵화 완료 이후 경수로 건설을 시작한다는 입장인 반면, 북한은 핵 프로그램 해체 완료와 함께 경수로가 완공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향후 9·19 프로세스가 재가동되더라도 합의가 쉽지 않은 이유이다. 

종말을 고한 비핵화 프로세스 

북한은 2009년 4월 장거리 로켓을 발사하고 연이어 6월에는 2차 핵실험을 실시한다. 미국을 자신이 원하는 방식의 협상장으로 끌어들이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오바마 행정부는 "같은 말을 세 번 사지 않겠다"며 '전략적 인내'(Strategic Patience) 기조로 대응했다. 북한이 먼저 비핵화에서 성의를 보이기 전에는 도발이나 유화에 일희일비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전략적 인내는 아시아 재균형 시대의 대북 반확산 전략이다. 국제 공조를 통해 북핵의 외부 확산을 막는 한편, 북한의 핵위협을 명분으로 동아시아 미사일 방어망과 군사동맹을 강화해 중국 견제에 활용하려는 구상이다. 따라서 북한의 위기 조성 행위는 부시 행정부 1기 때와 마찬가지로 반향을 얻을 수 없었다. 

이에 북한은 한층 강화된 도발로 정면 돌파를 시도한다. 2010년 말 우라늄 농축 시설을 공개하고 한국전쟁 이후 처음으로 한국 영토에 포격을 감행한 것이다. 미국은 상황 관리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2011년 여름부터 북-미 협상을 재개한다. 그러나 전략적 인내 기조를 바꾼 것은 아니었다. 미국의 관심은 문제 해결이라기보다는 오바마 재선 때까지 한반도 상황을 관리하는 것, 특히 장거리 로켓 발사와 3차 핵실험을 지연시키는 데 있었다. 오바마 행정부는 두 차례(2012년 4월과 8월)나 특사를 북한에 보냈다. '재선 때까지 도발을 자제하면 재선 이후 협상을 재개한다'는 언질을 줬을 가능성이 높다. 

북한은 오바마 재선 때까지 김정일 유훈 집행사업(위성 발사)까지 미뤘다. 그러나 재선에 성공한 오바마는 예상을 깨고 채찍을 휘둘렀다. 위성 발사(2012년 12월)에 대해 의장 성명을 예상했으나 제재 결의안(2013년 1월)이 채택된 것이다. 중국도 동참했다. 북한은 미국이 현 상황을 즐기고 있고, 중국도 같이 놀아나고 있다고 판단한 듯하다. 제재 결의안 채택 직후 북한은 핵정책 전면 전환을 실행에 옮긴다. 외무성(1월 23일)은 김일성의 유훈인 '조선반도 비핵화 노선'을 포기한다고 발표했다. 국방위(1월 24일)와 조선평화통일위원회(1월 23일)은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과 9·19 공동성명의 전면 백지화를 선언했다. 그리고 3차 핵실험(2월 12일)을 감행했다. 비핵화 프로세스에 종말을 고한 것이다. 




글 / 임수호 서울대 정치학 박사. 민주평통 상임위원 역임. 현재 삼성경제연구소 글로벌연구실 수석연구원. 저서로 <북미대립> <계획과 시장의 공존> 등이 있다. 핵문제와 북한 정치경제, 남북관계 등을 주로 연구하고 있다. 

[북핵 20년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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