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찾아간 한알학교, 따뜻한 인연... 녹색 여행자

부론성당 교육관은 따뜻했다. 그런 방을 나서는게 내심 아쉬웠다. 아침을 간단히 먹고선 방을 나왔다. 사제관 벨을 눌러 신부님을 부르고선 “고맙습니다” 인사를 꾸벅했다. 전날 신부님은 막무가내로 찾아온 우릴 보며 “허어.. 요즘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군요!”하며 대견 반, 걱정 반 했었다.

어제보다 바람은 잔잔해졌지만 기온은 차가웠다. 길은 강을 떠나 산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조용할거란 예상을 깨고 숲 속에서는 전기톱 소리가 날카로웠다. 얼마나 많은 전기톱이 쓰이고 있는지 벌떼가 웽웽거리는 것 같았다. 

월송리를 지나는 중이었다. 산 비탈이 통채로 날아가버린 곳이 있었다. 집을 지으려는 것도, 벌채를 한 것도 아닌 애매한 상태다. 끄트머리에 공사현황판이 있다. 섬강살리기 13공구에 쓰일 흙을 채취한다고 적혀져 있다. 대체 무얼 살리고 무얼 죽이려는 걸까. ‘우리의 국토는 조용할 날이 없군’ 이라는 푸념을 하며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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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량통행이 거의 없는 도로였지만 확장공사가 한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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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섬강살리기 사업에 사용될 토석을 산을 깎아 가져갔다. 대체 무얼 살리겠다는 건지?



“단강 초등학교에 가면 엄청 큰 느티나무가 있거든. 거기서 잠깐 쉬었다 가자!” 유하에게 말했다. 4대강 답사를 다니며 더울 땐 그 느티나무 아래서 쉬곤했었다. 단강리에서 한강과 헤어져 제천방향으로 갈 참이었다. 도로공사가 한창인 고갯길을 넘어가니 곧 단강초등학교가 나왔다.


학교 담벼락이 있어야 할 자리에 담은 없고, 젊은 남성 한 명이 뭔가를 태우고 있었다. 그의 눈길이 우리에게 한번 왔다가 다시 불길로, 다시 우리에게 오길 몇 번 반복하더니 “도보여행 하시나봐요? 차 한잔 하고 가세요”라며 말을 붙였다. 추위에 고생을 하던 우리는 두번 고민하지않고 유하와 나 동시에 “네” 하며 그를 따라 들어갔다.

“여기는 한알 학교라고 해요. 대안학교에요” 그는 걷는 중에 간단히 학교소개를 했다. 거대한 느티나무를 지나 우리를 안내한 곳은 따뜻한 난로가 있는 교무실이었다. 수업이 없는 선생님 몇 분이 앉아 있었고, 교장선생님은 일어나 우리에게 악수를 청했다. 

“유하라고 합니다.”, “저는 채색입니다.” 라며 소갤했다. 그랬더니 교장선생님도 “어? 제 호가 ‘유하’에요. 김용우입니다.” 유하의 눈이 휘동그레졌다. “저는 장일순 선생님이 말씀하신 ‘개문유하’의 유하를 따왔어요.”하며 놀라고 있는데 교장선생님은 “장일순 선생님의‘나락 한 알에도 우주가 있다.’는 말씀에서 학교이름을 따 왔어요. 그래서 ‘한알학교’에요.” 그 말에 유하도 나도 “아!”하며 감탄을 했다.

장일순 선생님은 우리의 ‘생태사상’에 깊은 영향을 준 분이다. 유하는 원주에 살며 먼저 알게되어 지금껏 유일하게 존경해 온 분이고, 나는 유하를 통해 얼마전 알게되었다. ‘왜 지금껏 모르고 살았을까’라고 한탄할 정도로 그 분의 생태사상은 대단했다. 요즘 제일 잘나가고 있는 유기농산물 생산.소비 협동조합인 ‘한살림’을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 분의 강연집을 읽었을 땐 마치 내가 나가야 할 길을 미리 알려주는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했었다. 이제는 흔해빠져버리게 된 논리인 ‘자원의 고갈’, ‘인간성 상실’, ‘반생명적 경제개발’ 등을 수십년 전에 지적을 하며 방향을 바꾸려 각고의 노력을 했었다. 

지금도 그의 외침은 정말로 유효하며, 익숙해졌을 뿐 대부분의 사람들은 반대방향으로 내달리고 있다. 더군다나 장일순 선생님의 민주화 운동에서 생명운동으로의 방향전환은 대단했다. 경제개발을 전제로 둔다면 어떤 운동도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 수 없다는 논지였다.

그는 이미 자연으로 돌아갔지만 우리같은 사람을 정신적으로 이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곳 한알학교 같은 학교를 세우는 원동력이 된 것이다. 그의 운동은 대단한 성과를 이뤄낸 것 아닌가? 교장 선생님이 학교에 대한 설명이 없었어도 ‘장일순 선생님의 ‘한알’‘이라는 말만 들어도 대강 짐작이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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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알학교 교정에 있는 거대한 느티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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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짧은 시간이었지만 좋은 기억으로 가득 채워졌다.



차만 간단히 마시고 떠나려던 걸 “식사하고 가세요”라는 말만 여러 선생님으로부터 몇 번을 듣고서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다. 한시간여의 여유를 두고서 우릴 불러세웠던 노청규 선생님과 이야길 나누었다. 그는 다른 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한 뒤 이곳에 온 것은 올해 초라고 했다. 

“아이들하고 기숙사에서 살아요.” 라는 그는 서울출신이라고 했다. 대안학교 교사를 직업으로 선택한 뒤부터 귀촌생활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가 가르치는 과목은 ‘삽질’이다.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묻진 못했지만 ‘삽질’을 가르치는 시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신기’했다.

교무실의 시간표를 보니 더 흥미진진했는데 ‘한알의 삶’, ‘네 주제를 알다’, ‘채소정원’같은 시간이 비중있게 편성되어 있었다. 물론 정규학교에서 가르치는 영어나, 수학, 과학같은 과목도 들어 있었다. 

그리고 학교에서 우리를 반가워했던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일년에 한번은 꼭 걷기여행을 한다는 것이다. 걷는 것만큼 세상을 배우기에 좋은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우리와 비슷한 셈. 학년별로 떠나는 지역이 좀 달랐는데, 올해 중학생은 네팔 트레킹이었고, 고등학생은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것는다고 했다. 고등학생 고학년은 알아서 떠나는 걷기여행을 계획하고 있었다.

나는 네팔에서 안나푸르나 트레킹과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 트레킹을 해 본 경험이 있어서 더욱 공감이 되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언제든 꼭 걸어보고 싶은 길이다. 어려서 걷는 길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 좋은 배움으로 작용할 것이다. 다만 그 비용을 학부모가 부담하기엔 힘든 점이 있을 것 같았다.

선생님들과 함께 점심을 먹었다. 주변엔 아이들도 가득했다. 중.고등과정의 전교생이 다 모였지만 교실 하나 크기의 방도 가득 채우진 못했다. 즐거운 모습의 아이들이 부러웠다. 시루에 박혀있는 콩나물 마냥 ‘깝깝한’ 교육을 받은 나로써는 부러울 수밖에. 그 속에서도 여러 고민들과 문제들이 많겠지만 입시위주의 교육보다는 백번 나아보였다.

강상현 선생님은 옆자리에 앉은 신세균 선생님을 소개했다. “들으셨어요? 신세균 선생님도 75일동안 우리나라 도보여행 했었어요. 본인은 직장 그만두고, 아들은 학교 그만두고...” 신 선생님은 미소를 지었다. 우리는 눈이 두 배는 커져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아들도 이 학교에 다니고 있단다. 참 훌륭한 교사에 그 학생이다. 

점심을 먹은 뒤 교무실에서 차를 한 잔 더 마셨다. 교장 선생님은 곧 떠나려는 우릴 앞에두고 핸드폰을 뒤적거렸다. 제천의 신부님, 동강의 지인, 함백의 화가 등 우리가 걸어가는 경로상의 지인들을 알려주었다. “제가 소개시켜줬다고 그러면 재워주실거에요.”라며 밝게 웃었다. 그의 따뜻한 마음씨에 바깥 추위까지 날아가버리는 것 같았다. 

모두에게 인사를 하고선 학교를 나섰다. 선생님들은 바깥까지 나와서 배웅했다. 불과 두어시간 머물렀을 뿐인데 대접은 며칠을 머문 사람처럼 받았다. 고마웠다. 기념사진을 찍고선 손을 흔들며 헤어졌다.

길에서 다시 한강이 보였다. 여울에서 물소리가 은은하게 들렸다. 부론까지의 한강에서는 들을 수 없던 소리다. 강원도의 단강리와 충청북도의 덕은리를 경계를 두고 작은 하천이 한강과 만나고 있었다. 우린 그 작은 하천을 거슬러 올라갔다. 

충분한 쉼 뒤였지만 추위는 더 심해져 힘들었다. 다행히 하천따라 둑방길과 차가 거의 안다니는 지방도가 이어져 있었다. 멀리서 걸어오는 두 사람에게 평소대로 인사를 건넸다. 그런데 두 분은 우리에게 말을 걸었다.

“우리는 귀농한 사람들이에요. 윗 마을에 생태공동체가 있는데 그곳에 살고 있어요.” 라며 말을 이었다. “명상을 하는데요. 종교 같은건 아니지만 자연스러운 삶을 지향하는 곳이에요.” 한 분은 우리를 초대하고 싶은 마음을 내비쳤지만 다른 한 분이 막아섰다. 아무래도 우리가 도보여행을 하고 있는 탓에 그들도 우리와 통하는 게 뭔가 있지 않을까 싶었던 것 같았다.

“우리도 자연스러운 삶을 꿈꾸고 있거든요. 가능하다면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요.” 내가 말했다. 떠나기 전 ‘생태마을’이라는 검색어로 여러 마을들을 찾았었다. 그곳 중 진짜 ‘생태’를 추구하는 곳에는 꼭 가보자고 했던 참이었다. 하지만 그 분이 말하는 ‘생태공동체’는 검색 밖에 있었던 것. 어떤 곳인지 꼭 보고 싶었다.

“마침 내일 일반 사람들의 방문 프로그램이 있거든요. 우리의 생활을 영상으로 보여주고, 산책하는 것도 있어요. 식사도 하구요.” 그 분의 호의적인 반응에도 우리는 섣불리 결정할 수 없었다. 잠자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혹시 주변에 텐트를 칠만한 곳이 없을까요?” 내가 물었다. 안타깝게도 그 주변엔 그런 자리가 없다고 했다. 그 분은 잠깐 집을 비운 집이 있을 수도 있다며 부탁을 해본다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보고 먼저 그 마을에 가 있으면 자신들은 산책을 끝내고 뒤따라 가겠다고. 

얼마가지않아 그 마을에 도착했다.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조립식 주택이 몇 채 있었다. 혹시나 다른 곳일까 싶어 주변을 돌아보는데 마침 그 분들이 모퉁이를 돌아 다가오고 있었다. “여기가 맞아요. 그런데 그 집은 사람들이 와 있대요.” 그러면서 제안한 것이 마을회관을 소개시켜주는 것이었다. 이내 그것들도 안되는 것으로 확인. 일단 귀래면에서 우리가 알아서 자고 다음날 그 분들의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귀래면까지는 그 분들의 차를 타고 이동했다. “우리는 자연과 소통하는 명상을 해요.” 차 안에서 그가 속한 곳에 대해 설명을 했다. 종교는 아니라고 말했지만 마치 종교 공동체처럼 생활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물론 세상과 완전 단절한 채 ‘수도’하는 종교시설 같지는 않았다. 그러면서도 자연과 소통하는 그 명상에 대해서는 매우 궁금해졌다. 조립식 주택과 자연과의 소통, 두 단어의 연결고리가 모호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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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강리에서 귀래면으로 향하는 제방길. 도로를 벗어나 이런 길을 걸을 때면 자연스레 걸음이 느려진다.



인적드문 마을 앞 공원에서 밤을 보냈다. 이른 새벽부터 일어나 누운 상태로 새벽을 즐겼다. 날이 밝아오는 걸 보고 텐트를 철거하고 아침을 해 먹었다. 떠날 채비를 다 하고도 8시가 안되었다. ‘그 분’과의 약속은 10시 쯤이었다. 

유하와 나는 고민에 빠졌다. 그곳에서 두시간 이상을 기다려 그곳 프로그램에 참여할 것인가. 이대로 떠날 것인가? 또한 그 프로그램이 끝난 뒤 오후부터 걷게 될 경우 고개를 넘어갈 수 있을 것인가? 무엇보다 이런 모든 고민을 다 떨쳐버릴 정도로 그 프로그램이 가치가 있을까!?

결국 전화를 걸었다. “저희가 시간이 애매해서요. 그냥 갈게요.” 전화를 받는 그 분은 아쉬워하는 눈치였다. 미안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실은 전날 있었던 작은 사건이 결정적이었다. 차를 타고오며 ‘채식을 하고 생명을 존중한다’는걸 매우 강조했었다. 그런데 우리가 잠자리를 찾으러 가려는 찰나 “치킨 먹지 않을래요?” 라고 묻는게 아닌가. 우리가 “저희도 채식을 해서요...”라는 말에 “우리도 원래 안하는데 몸이 안 좋아서요...”라며 민망해 했던 것이다.

통하는 사람들끼리는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대번에 알아보고 끌린다. 그들은 ‘생명’에 대해 우리와 똑같은 식으로 말을 했지만 전혀 끌리지 않았다. 귀래면을 등지고 떠나는 것이 크게 아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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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안녕하세요. 채색입니다. 봄마다 피어나는 새싹처럼 조화롭게, 아름답게 살아가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