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당댐과 두물머리,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 녹색 여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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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횡단보도에서 가방을 걸치고 있는 유하를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는 아이들.


아침의 하남은 등교하는 학생들로 붐볐다. 직장인들로 붐비는 서울의 아침과는 대조적이었다. 아이들의 부모들은 대도시로 새벽같이 출근한 것일까? 큰 가방을 메고 가는 우리를 아이들이 멀뚱멀뚱 쳐다본다. 아파트 숲이라고 불릴만한 그곳을 종종걸음으로 빠져나왔다.

팔당대교를 건널 땐 당황스러웠다. 다리가 시작되기 전에 인도가 끊겨버린 것이다. 분명 포털사이트 지도의 로드뷰로는 다리위에 인도가 있었다. 로드뷰를 믿고 자동차 진입로 한 쪽 흰 차선을 따라 올라갔다. 아니나 다를까 진입하는 인도는 어느 곳에도 없었지만 교량에는 인도가 있다. 이런경우가...

다리를 내려오는 길도 마찬가지로 인도가 없었다. 굉장히 위험했지만 차량들이 내려가는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 길에서 25톤짜리 대형 트럭이 우리 옆을 스쳐갔다. 1m도 안되는 간격이었다. 간담이 서늘하다는 표현으론 부족할 정도. 편하게 걸을 수 있는 길이 간절했다. 방법은 수도권을 빨리 빠져나가는 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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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당대교를 건너려고 다가갔다. 인도가 사라져버렸다. 팔당대교 위에서 다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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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대강 사업으로 만들어진 강변 자전거도로. 이 길이 없었다면 오른쪽 축대 위 위험한 도로로 걸어가야 했다.


다행히 내리막이 끝나는 지점에는 4대강 사업으로 만들어 놓은 도보겸용 자전거 길이 나 있어 안전히 걸을 수 있었다. 4대강 사업을 그토록 반대하던 나였지만 부득이하게 이 길에 감사해야만 했다.

팔당댐으로 향했다. 그곳으로 가는 길 옆 축대에는 “누구야 사랑해”, “나랑 결혼하자” 등 갖가지 사랑고백들로 가득했다. 어떤 것은 희미해 글자를 알아볼 수도 없었고, 어떤 것은 불과 며칠 전에 그려놓은 것도 있었다. 우린 그곳을 처음 본 것이었지만 누군가에게는 사랑고백의 명소로 이용되는 듯 했다. 팔당댐을 목전에 둔 이곳에 왜 이렇게 사랑고백을 했는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팔당댐이 가까워지자 바람이 거세진다. 수문은 굳게 닫혀있다. 대신 댐 오른편 여수로로 물이 부글부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댐을 바라보며 오르막을 서서히 오르자 강은 눈 닿을데 없는 호수로 변해 있다. 거센 바람이 불고 있었지만 호숫물은 이상하리만치 잔잔했다.

수도권의 식수원 목적으로 건설됐다고는 익히 들었지만, 그래도 이 거대한 인공물을 만들었어야 했는지 의문이 들었다. 두꺼운 콘크리트, 강철 수문은 어쩐지 강한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이 거대한 인공물을 전후로 강한 바람이 부는 건 자연조차도 이것에 대해 강한 부정을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이 댐이 생기기 전에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었을까? 호수 중간 중간에 솟아나 있는 것들은 언덕의 마루였을까? 대체 이 많은 물을 어떤 용도로 쓰려는 것일까? 왜 우리들은 저렇게 많은 물을 필요로 하는 것일까? 물 속 생명들은 댐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댐 위로 난 공도교를 건너며 댐의 위용?을 느껴보려 했지만 문은 굳게 닫혀있다. ‘주말에만 통행가능’이라는 팻말이 붙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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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당대교 아래쪽 축대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고백이 그려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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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당댐. 우리는 왜 이렇게 많은 물을 가두고 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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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은 끝나버리고 호수가 되어버렸다. 흐르는 물은 녹은지 꽤 됐지만 가둬진 물은 아직도 얼어있다.


“이건 여행이 아니라 고행같다.”

유하가 말했다. 어깨는 짓눌리고 어제 잡혔던 물집에서 강한 고통이 느껴진다고 했다. 비도 부슬부슬 내리는 데다가 팔당댐을 지나며 강한 바람을 쐬었기 때문일거라 생각했다. 나는 열흘정도는 단련이 되어야 나을 거라며 위로했다. 도시에서 과욕으로 축적한 지방덩어리들이 떨어져나가며 고통도 함께 줄어들 것이다.

양수대교를 건너기까지 도로는 위험의 연속이었다. 생각보다 추워진 날씨 때문에 무거운 가방을 메고 걷는데도 으슬으슬 떨렸다. 양수리에 도착하자 마자 나타난 식당에서 밥을 떼우곤 두물머리로 향했다. 두물머리로 향하는 길은 확포장 공사를 하고 있었다.

입구에는 ‘주민일동‘이 걸어놓은 현수막들이 즐비했는데, ‘한강살리기 추진하여 아름다운 우리고장 만들자’, ‘천혜의 땅! 두물머리 정비사업 적극찬성한다’ 같은 것이었다. 대체 그 개발사업들이 어떻게 이곳을 아름답게 만들겠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대개의 공원 개발사업은 콘크리트를 붓고 천편일률적인 나무와 정자를 둔다. 심지어 그런 ‘아름다움’은 대도시 도심에서도 찾아볼 수도 있다. 지지대를 끼고 있는 소나무에 멋 없는 정자, 곧 녹조가 낄 작은 연못, 의도적으로 구불구불하게 만든 산책로, 땡볕 아래의 벤치 등으로 만들어져 있다. 어찌 그런 공원을 두고 생태니 자연이니 하는 수식어를 달고, 심지어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을까?! 진짜 아름다움은 그곳만의 자연이 스스로 뽐낼 수 있을 때라 생각한다.

도착한 두물머리엔 미사를 드리러 사람들이 모이고 있었다. 녹색연합에서 활동하며 서너번 와 본 곳이었지만 개인적인 참가는 처음이었다. 주변 분들께 대강 인사를 드리고는 미사에 참여했다.

이날 두물머리 미사는 745번째를 기록하고 있었다. 매일매일 미사가 끊이지 않았으니 무려 745일동안 이 장소에서 생명과 평화를 위한 기도회가 열린 것이다. 그들의 열정에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의식은 낯설었지만 이 땅, 이 강을 위해서 함께 기도를 드렸다.

‘창조주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4대강 사업’은 이곳을 공원으로 바꾸려고 하고 있다. 앞서 말한대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그런 공원말이다. 자전거 도로와 산책길도 들어서고, 멋없는 벤치나 의자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공원이 들어서려는 곳에는 유기농업을 해 온 농민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생명을 살리는’ 농업 대신 생명을 파괴하고 메마른 공원이 들어서는 것을 농민들도, 성직자들도 반대하는 것이다.

사실 이 땅은 국가소유로 되어 있어 농민들은 지금껏 ‘점용허가’를 받아 농사를 지었다. 한 때는 유기농업을 적극 육성하겠다며 이명박 대통령이 후보시절 방문하기도 했었다. 이곳 비닐하우스 입구에는 아직도 그 때의 사진이 붙어있다. ‘이명박 대통령님 팔당농민과 약속을 잊으셨나요?’

불과 몇 년 전만해도 유기농업의 선도지역이라며 적극 육성한다는 정책을 뒤집고 점용허가를 일방적으로 취소하려고 한다. 반발을 살 수밖에 없다. 유기농업이라고 하는 것이 하루아침에 할 수 있는게 아니기 때문이다. 보상받는 액수로는 타지에 땅을 구하기도 어렵거니와 만약 구하더라도 농약에 찌든 땅을 깨끗한 땅으로 돌려놓는데에는 최소 3년에서 5년은 걸린다고 한다.

두물머리를 좀 더 가까이에서, 오랫동안 느껴볼 요량으로 주변에서 야영을 하려했다. 이곳 이장이신 윤종일 신부님께 여쭈니 “저쪽에 컨테이너가 있어요. 저곳에서 주무시는 게 더 나을거에요”라고 하신다. 우리들의 의중을 알아차린 다른 분들도 한결같이 “아직 밖은 추우니 그곳에서 주무세요. 그곳에서 생활하시는 분이 한 분 계시긴 한데 괜찮을거에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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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물머리에서는 매일 오후 3시에 생명평화미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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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류하는 지점에는 나무로 된 십자가가 있다.


찾아간 컨테이너는 두 개가 포개져 있었다. 윗 층은 신부님께서 단식을 하실 때 이용하고, 아랫층은 우리가 잘 곳으로 두물머리에서 활동하시는 분들이 쓰는 숙소였다. 안에 있으니 곧 우릴 불러냈다. 두물머리에서 아직까지 농사를 짓고 있는 농부인 임인환님과 김병인님, 그리고 컨테이너에서 생활하고 있는 강한방울님이 서 있었다.

우린 강한방울님과 한 패가 되어 식사를 하러갔다. 두물머리 끝에 위치한 비닐하우스 한 동에 회의실과 임시주방이 설치되어 있었다. 다소 너저분하고 복잡했다. 나와 유하도 식사준비를 돕고 싶었지만 분위기가 쉽게 익숙해지지 않았고 그곳에는 이미 한결님이 먼저 와 열심히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저녁식사는 또 다른 비닐하우스에서 하게 됐다. 2중 비닐하우스였는데 지하수를 끌어올려 비닐 사이에 뿌려 난방을 했다. “지하수 때문에 비닐하우스 안은 따뜻하게 되는거에요” 라고 강한방울님이 말했다. 여름철 폭우 속에 갇혀있는 듯한 묘한 느낌을 받으며 식사를 했다.

강한방울님과 한결님, 두 분이 어떻게 이곳에 와 있는지가 무척 궁금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딘가에 소속된 사람이 아니라 마음이 동해서 그곳 일을 돕고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강한방울님은 묘한 매력의 소유자였다. 아니, 마력이라고 하는 게 더 좋을 듯 하다. 자연스레 태양에 그을린 피부하며 덥수룩하지만 느낌있는 수염이 그런 느낌을 더했다. 목소리엔 느리고 굵지만 곱다는 느낌을 받을정도였다.

청주가 원래 고향이라는 그는 컴퓨터 강사일을 하다가 제주에 내려갔었다고 했다. 그곳에서는 ‘머리쓰는 일’을 그만두고 몸으로 하는 일을 하고싶어 막일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결국 컴퓨터 강사일을 하게됐는데, 어려운 가정에 방문해 가르치는 등 가치있는 일을 해 보람이 있었다고 했다. 그 외에 오랫동안 어딘가를 걸어다니거나, 강을 따라 걷기도 했었다는 그, 강을 위해 뭔가를 하고 싶어 이곳 두물머리에 머물고 있다고 했다.

그는 땅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 항상 ‘어머니 대지’란 단어를 썼다. ‘땅’이라는 단어 대신 ‘어머니 대지’라는 단어를 쓰는 것이다. 그 단어를 자연스레 쓰는 사람은 설악산에서 활동하시는 박그림선생님 이후 처음봤다. 그와 관련해 이야기를 하나 해 주었다.

“얼마전 몸이 좋지않아 청주의 어머니댁에 얼마간 가 있었어요. 마흔이 넘도록 손찌검 하신적이 한번도 없었던 어머니였는데 그 때 한번 뺨을 맞았어요. 제 생활이 마음에 안들었던거에요.”

인상도 좋고 성격도 좋은 그 였는데 무슨 연유로 맞았는지 궁금해졌다. 그것도 마흔이 넘은 아들을 때린 이유가. 그가 곧 말을 이었다.

“저는 어머니 대지를 위해 살아가기로 결심을 했는데, 저를 낳아주신 어머니는 그걸 원하지 않아요. 그렇다고 낳아주신 어머니를 위해 사는 것은 어머니 대지에 반하는 것들이거든요. 어머니 대지와 낳아주신 어머니 사이에 고민이 크답니다.”

폭소를 터트렸다. 그러면서도 한 쪽은 깊은 공감을 하며 “아...” 하는 탄식이 절로 나왔다. 왜냐하면 나 역시 낳아주신 어머니께서 살길 원하는 삶의 방식은 ‘어머니 대지’를 파괴하는 식이기 때문이다. 도시노동자로 사는 길은 엄청난 경쟁 속에서 큰 소비를 해야만 하기 때문에 파괴를 수반하기 마련이다.

밤이 깊어갈 무렵엔 그곳 농부인 임인환님께서 술을 사들고 오셨다. 안주로는 비닐하우스 안에서 자라고 있는 딸기를 먹었다. 직접 가서 땄는데, 싱싱한 딸기가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임인환님이 “해 뜨기 전에 먹는 딸기가 제일 맛있어요!”라며 지금은 덜 맛있는거라 했다. 두물머리에 대한 이야기, 농업에 대한 이야기, 환경운동에 대한 이야기들을 이어갔다.

술기운이 무르익을 무렵, 강한방울님과 한결님이 기타와 우쿨렐레 들고 노래를 불렀다. 즉석 공연인 셈이다. 저음의 강한방울님, 중고음의 한결님의 목소리가 어울려 컨테이너 안을 채웠다. 거슬렸던 양수대교의 자동차 소음도 사라졌다. 술기운에 몸을 기우뚱 기우뚱 흔들며 듣는 ‘생’음악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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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닐하우스 안에서 먹은 저녁식사. 왼쪽부터 유하, 강한방울, 한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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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닐하우스에서 딸기를 따 건네시는 임인환 농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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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즉석에서 딴 딸기를 안주로 삼았다.


다음날은 밭의 비닐을 뜯어내고, 비닐하우스 안에서 김매기를 했다. 일종의 ‘농촌봉사활동’을 한 셈이다. 그 때는 더 많은 분들이 모여서 이야기 꽃을 피웠다. 록빠의 블루님과 지원님, 소속이 없는 초록주의님과 디온님, 한결님 친구분 등이 오셨다.

밤이 늦도록 이야기가 이어졌지만 유하와 나는 다음날 일찍 떠난다는 핑계를 대고 마지막까지는 함께하지 못했다. 우리가 잠자리를 펴는 동안 그들은 기타를 들고 비닐하우스로 갔다. 그곳에서 소공연을 할 셈이었던 것이다.

도시에서 산다면 가끔씩 야유회를 가서 하는 놀이를 그들은 매일같이 반복하고 있었다. 반복되지만 언제나 즐거운 것들이다. 주말에는 더 많은 분들이 와서 낮에는 일하고 저녁에는 함께모여 논다고 한다. 음악과 함께, 이야기와 함께.

두물머리는 개발이 될지도 몰라 아직도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지만, 피터지는 싸움이 아니라 즐거움으로 이곳을 지키고 있었다. 이런 즐거움으로 더 많은 젊은이들이 모이게 될 것이고, 농업의 가치는 더 널리 퍼질 것이다. 개발의 가치보다 농업의 가치는 ‘당연히’ 높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깨닫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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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안녕하세요. 채색입니다. 봄마다 피어나는 새싹처럼 조화롭게, 아름답게 살아가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