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죽음, 풀뿌리 운동 생생육아 칼럼

책꽂이.jpg » 슬픔을 겪을 때 읽었던 책들

 

두 차례 가족의 죽음을 겪으며 내가 몰두한 일은
‘이해하기 어려운 죽음’에 최대한 접근하기 위해 독서를 하는 것이었다.
죽음을 다각도로 다룬 책들을 읽으며 확실하게 알 수 있었던 건
현대의학 체제에서는 죽는 것도 참 힘들다는 사실이다.

 

의학의 발달로 수명 연장이 됐지만 ‘유병장수’를 겪으며
의료화된 고통스런 죽음을 맞는 일이 흔해졌다.
책 ‘죽음을 원할 자유’에서 저자인 케이티 버틀러는 중요한 사실을 얘기했다.
1970년대 자연분만운동이 출산을 의학의 손에서 되찾은 것처럼,
‘죽음을 의학의 손에서 되찾자’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가 노부모의 투병과 임종을 겪으며 내린 결론은 이렇다.
‘언젠가는 완화의료, 호스피스 의료진을 집으로 불러 당황한 가족을 진정시키고
죽어가는 환자의 고통을 관리하는 811이 생길 것이며
그 번호는 911, 응급실, 집중치료실로 이어지는 최후의 잔혹한 여정에 대한 대안이 될 것이다.
이런 변화는 느린 의학을 옹호하는 의사들과 간병가족들의 풀뿌리 운동이 있어야 가능하다.’

 

(참고: 완화의료- 환자의 삶의 질을 높이고
완치가 아닌 증상 조절에 초점을 둔 전인적 치료를 말함)

 

우리나라에서도 ‘웰다잉’이란 이름으로
삶과 죽음이 동떨어진 것이 아님을 알리는 움직임이 있어왔다.
시민단체가 중심이 된 오랜 풀뿌리 운동의 결실로
내년부터는 연명의료법이 시행된다.
이를 통해 임종기 연명의료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공식적으로 전산망에 등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마지막 순간이 왔을 때 무의미한 연명의료를 중단하겠다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쓰기 위해,
내가 일하는 시민단체 ‘사전의료의향서 실천모임’에는
이른 아침 상담실 문을 열기 전부터 어르신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그분들이 웃음 띤 얼굴로, 때로는 담담하게
생의 마지막을 준비하게 된 사연을 말할 때
나처럼 친화력이 떨어지는 사람도
진심을 다해 눈을 맞추고 귀를 기울이게 된다.

 

중증의 병력을 가진 분이
평온한 죽음을 준비하기 위해 의향서를 쓰겠다고 할 때
내가 주의하는 건 특별한 관심을 보이지 않는 일이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타인의 얕은 호기심이 아니라
정중한 경청이기 때문이다.

 

암 수술을 받은 노부부가 서류 작성을 하고 일어설 때
한번은 나도 모르게 진심에서 우러나온 한 마디를 전했다.
“두 분 다 정말 아름다우십니다.”
의례적 찬사가 아니라
검소한 옷차림과 품위 있는 그들의 몸가짐이
진정으로 아름다워 보였기 때문이다.

 

시설 간병의 일인자인 어떤 일본인은
‘단 한번밖에 오지 않는 존엄사에 매달릴 바에야
하루하루 존엄생을 생각하자’고 말했다.
나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존엄사는 존엄생과 동전의 양면이다.
존엄한 죽음은 일회성의 사건이 아니라
떠나는 이에게 뜻 깊은 마무리라는 의미와 더불어
남은 이에게는 살아있는 동안 되풀이되는 영속적인 현실이기 때문이다.

 

존엄사라는 말이 안락사와 혼동될 여지가 있기 때문에
현재는 ‘임종기의 연명의료 중단’이라는 중립적인 표현을 쓴다.
질병의 말기나 임종이 가까울 때 이런 언급을 하기엔 너무 어렵기에
건강할 때 미리 죽음을 숙고하는 문화를 만들자는 것이
웰다잉 풀뿌리 운동의 지향점이다.

 

1977년, 젊은 의사 Diane Meier는 첫 근무 일에
심장병으로 죽어가는 89세의 남자 환자의 소생치료를 실시하는 팀에 배속되었다.
생명 연장만이 최우선이었던 현장에서, 환자 사망 뒤 누구도 걸음을 멈추고
환자의 87세 아내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는 사실에 그는 충격을 받았다.
이날의 폭력적인 죽음을 겪은 그는 훗날 완화의료라는 의학적 반문화 운동을 이끌게 된다.

 

완화의료, 호스피스는 평온한 삶의 마무리를 위해 우리에게 새로운 철학을 요구한다.
내가 속한 시민단체도 당분간 호스피스 병동의 한 공간을 상담실로 빌려 쓰게 됐다.
그곳에 둥지를 틀게 됐다는 것만으로 많은 것을 느낀다.
복도에서 마주치는 의료진들의 친절한 태도와 웃음,
병동 앞의 정원과 고즈넉한 분위기가 내게 큰 힘이 되고 있다.

 

어제는 점심 시간 이후까지 눈물을 쏟으며 가까운 이의 죽음 준비에 대해 털어놓는
내담자를 대하면서 말이 아닌 눈빛과 몸짓으로 위로를 전했다.
내 경험으로 알게 된 것 한가지는,
죽음을 겪는 이와 소통할 때 가장 무력한 수단이 언어이며
진심을 다한 눈빛이 그들에겐 작으나마 위로가 된다는 점이다.

 

간혹 가슴 아픈 사연을 접하기도 하지만
상담실을 찾는 분들은 대부분 활기에 차 있다.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생기, 그 역설을 나누고 싶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jpg » ‘사전의료의향서 실천모임’의 상담실이 있는 호스피스 병동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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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딸이 뇌종양으로 숨진 후 다시 비혼이 되었다. 이후 아들을 입양하여 달콤쌉싸름한 육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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