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곤드레 막걸리가 최고가 된 이유 녹색 여행자

숲 속의 아침은 어찌나 개운한지! 장성산 정산으로 향하는 길 도중 한번은 우리 둘다 “쉬었다 가자!”라는 말도 없이 그냥 앉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반가좌 자세를 하고선 눈을 감았다. 꼬리뼈에 구멍이 난 것처럼 바람이 들어와선 정수리로 나가는 느낌이었다. ‘명상’의 ‘명’자도 모르는 나였지만 자연의 기운이 내 몸을 통과해 흐른다는 것 쯤은 알 것 같았다. 유하는 혼잣말을 했다. “마음이 달콤해졌어.” 도시의 긴장됐던 얼굴근육이 다 풀어진 것 같았다.

오르막을 올랐다가 또 내려가고, 또 올라가길 몇 번 반복했지만 전날처럼 무리가 가진 않았다. 아무래도 자연의 기운을 듬뿍 받은 덕일 테다. 잣봉정상에서나 장성산 정상에서나 쌍쥐바위 전망대에서나 아름다운 풍경들도 힘을 보탰다. 산 길은 문산리에 닿으며 끝이났다. 거기서 강을 다시 만났다.

마을회관 옆 정자에서 허기를 달랬다. 강바람이 세 판초우의를 입어 보온을 했다. 마을회관으로 향하는 할아버지, 할머니, 아저씨, 아줌마들은 우리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당황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꼭 눈앞에 떨어진 외계인을 쳐다보는 것 같다. 유하가 “안녕하세요? 도보여행중이에요~”라며 말하니 그제서야 웃으며 고개를 끄덕끄덕 거린다. 끄덕거림의 의미는 ‘지구인 인증’이었을게다.

여행을 떠나기 전 ‘지역에너지학교’라는 워크샵에서 만난 김영주님께 전화를 했다. 그는 한국내셔널트러스트 활동가로 제장마을에 있는 ‘동강사랑’이라는 곳의 지킴이다. 내셔널트러스트는 동강의 아름다움을 지키기 위해 제장마을의 땅 오천평을 구매해 파괴를 막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우리 마을에 오면 잘 곳이 있을거에요.”라며 여행 중에 제장마을에 꼭 들르라고 했었다.

다행히 우리의 코스는 그곳을 지날 참이었고 잘됐다 싶었다. 며칠 전 전화를 했을 때는 “월요일에 도착할 것 같아요.”라고 했었는데 문산리까지의 경로가 험해 하루를 더 걸은 뒤 화요일에 갈 참이었다. 그런 얘길하자 그는 “월요일이 휴무”라며 우리를 기다리는 중이라고 했다. 폐를 끼치게 된 것 같아 오늘 이동하기로 급 마음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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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숲 속에서 뜨는 해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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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잣봉 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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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나무. 숲 속에서 쉴 땐 기운이 우리 몸속으로 흐르는 것 같았다.


지도 상으로 그곳까지의 길은 복잡했다. 강 길은 끊겨 있었고 돌아가려면 차로도 몇시간이 걸리는 거리였다. “우리가 왜 간다고 했지?” 스스로 반문해보았지만 한가지 방법은 있었다. 다리를 건너고 강을 따라 조금 거슬러 올라간다. 그곳에서 계곡을 들어가 오른쪽으로 난 고개를 넘는다. 고개 반대편에는 평창군 미탄면 마하리가 있고, 그곳에서 다시 동강을 따라 백룡동굴이 있는 문희마을까지 걸어간다. 그곳에서 칠족령을 넘어 제장마을까지는 그리 멀지 않다. 김영주님도 “문희마을까지만 오면 금방 올 수 있어요.”라고 말했었다.

이미 하루의 체력을 대부분 소모해버린 우리였지만 휴일날 나온 사람에게 폐를 끼칠 수는 없었다. 밥은 입 안으로 쏟아 넣듯 한 뒤 걸음을 재촉했다. 어제만해도 가장 느린걸음을 즐겼지만 이 때만큼은 가장 빠른 걸음을 선보여야만 했다. “컥~”, “헉~” 서로 경쟁하듯 격한 숨소리를 내뱉었다.

문제는 고개를 넘는 일이었다. 지도에도 길이 없었고 눈으로 보기에도 길이 없어보였다. 산길에 대한 경험이 조금 더 있는 내가 길을 살폈다. “저 능선 보이지? 주변에서는 저기가 제일 낮아보이네.” 유하는 반신반의 했지만 해는 기울고 있었으므로 지체할 시간도 없었다.

고개로 오르는 골짜기에 이르니 주변과 다르게 잡목이 우거지고 돌들이 널려 있었다. 집 터와 밭 터의 흔적이었다. “여기에 화전민들이 살았나봐. 길이 있을 수도 있겠다.”고 말했지만 끊임없이 숲을 헤치고 걸어야만 했다. 사람이 살았던 것은 분명했지만 터와 길은 남김없이 자연으로 돌아와 있었다.

길이 아닌 숲 속은 발을 깊숙히 빨아들였다. 무거운 짐을 진 탓에 더 그랬다. 종아리와 허벅지에는 불끈 불끈 힘이 들어갔다. 경사는 얼마나 가파른지 눈 앞의 나무를 잡지 않고서는 안될정도였다. 유하는 장갑을 낀 상태로 팔을 짚으며 기듯 걸었다. 배고프고 분노한 살쾡이가 어슬렁거리는 모양새다.

나는 “이제 다왔다.”하며 힘내라는 뜻으로 여러차례 말을 했지만 유하는 ‘네가 다 왔다는 건 가나다...타파하 중 다까지 왔다는 거냐?’라는 식으로 노려보았다. 능선에 이르렀을 땐 사람이 다니는 길이 나 있다는 것에 기뻤지만 후들거리는 유하의 다리는 ‘이곳을 넘는건 아니었다’는 후회가 밀려오게 만들었다. 한숨을 돌리는 유하는 뭔가 중요한 말을 하듯 낮고도 힘있게 내뱉었다. “다왔다는 말은 언제할 수 있는건지 개콘 애정남에 물어봐야겠어!”

능선은 동강의 다른 지역처럼 날카로웠는데 중간중간엔 ‘시멘트’ 빛깔의 석회암이 드러나 있었다. 나만 생각했던 것일까, 유하의 불안한 걸음걸이를 보니 미안한 마음이 솟구쳤다. 시간은 느려지고 있었지만 결코 재촉할 수 없었다. 거의 입을 닫은 채 걷고 기다리길 반복했다. 

능선을 조금 돌자 ‘평창군 미탄면 마하리’가 보였다. 능선을 따라 길은 나 있었지만 계곡 아래로 내려가는 게 더 나을 듯 싶었다. 오르막을 더 오를 힘이 없었기 때문. 또다시 완만한 부분을 찾아 그리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옆으로 미끄러지듯이 내려가. 중심을 절대 앞으로 두지말고.”라며 앞장섰다.

나무 사이로 느린 스키를 타듯 미끄러져 내려갔다. 부드럽고 무른 숲 속의 흙은 미끄러지는 대로 흘러내렸다. 구르더라도 아프지 않을 것 같았다. 약간 걱정스런 표정으로 서 있던 유하는 “채색이 먼저 가서 미끄러질 흙이 없어.”라는 푸념에 “그 옆으로 똑같은 식으로...”라고 답했다. 한번 미끄러져 보더니 “내려가는건 재밌네!” 라며 금방의 고생을 잊었다. 나는 속을 ‘다행이다’ 하며 쓸어내렸다.

점점 완만해 지더니 숲이 끝나고 밭이 나왔다. 그리고 밭 사이에 난 길을 밟았다. 딱딱한 길이 그리 반가울 수 없었다. 둥실거리는 파도위를 떠다니는 배를 타고 먼 육지에 도착해 다시 땅을 밟는 느낌이다. 바지와 신발을 신나게 털고는 걸음을 재촉했다.

그곳에서 문희마을까지는 시멘트로 된 1차선 도로가 나 있었다. 그 길을 경보하듯 빠른 속도로 걸었다. 지는 해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내게 유하는 평소와는 다른 눈빛을 보냈다. 그녀를 한번 쳐다본 뒤 “어, 이것만 찍고.” 라고 말했다. 내 말에 “어? 아무말 안했는데?” 한다.

어스름이 시작될 쯤 문희마을에 도착했다. 도로를 더 내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마을에는 일반적인 집보다 펜션이 더 많았다. 아무래도 백룡동굴을 개방하며 관광지화 하려는 듯 보였다. 마을 벤치에 앉아서 기운이 쏙 빠진 서로를 바라봤다. “아무래도 뭐라도 먹어야겠다!” 

민박에 딸린 작은 가게가 있었다. 불이 꺼져있어 아무도 없는 줄 알았건만 문 옆의 ‘벨을 누르시오’가 사람을 불렀다. 주인도 나도 깜짝 놀랐다. 쵸코바 두 개랑 이온음료 두 개를 샀다. 아저씨는 “등산을 하기엔 너무 늦었는데...”라며 나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알려주셨다. “칠족령 넘어 제장마을 가려구요.” 조심하라는 두 분의 걱정을 뒤로하고 유하에게 돌아갔다.

초코바를 우적우적 씹으며 말했다. “이거 없었으면 우린 여기서 끝이었어.” 정말이었다. 그녀도 나도 움직일 힘이 없었다. 더군다나 땀을 많이 흘려 물만
으로는 수분보충이 안되는 상태였다. 꿀맛같은 불량음식을 다 처리한 뒤 칠족령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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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이 없는 가파른 산길. 나무의 도움 없이는 오르기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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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힘든 상황에서도 강은 언제나 아름다웠다.


등에 벽돌을 가득 진 일꾼처럼 한 발 한 발 힘겹게 옮겼다. 흘릴 땀도 없을 것 같았지만 금세 땀범벅이 되었다. 바닥만 쳐다봤다. 잣봉에 장성산, 길없는 고개에 이어 네번째 산을 오르는 길이다. 하루동안 이토록 걷는 건 처음이었고, 마지막이길 바랐다. “백두대간 타기 전에 훈련하는 거라고 생각하자.” 서로를 응원했다.

칠족령을 앞두고 한 사람이 하산하고 있었다. 어둑어둑한 나머지 잘 보이지 않았는데 누군가 싶었다. 우리 앞에 이르러서야 그가 김영주님인걸 알게되었다. “아.. 안녕하세요!?” 반갑게 인사했다. 그는 “올 때가 됐는데 안와서 나와봤어요. 아까 문자받을 때도 칠족령에 있었거든요.”라며 우리가 힘든만큼 걱정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문희마을에 도착했을 때 그에게 금방 가겠다고 문자를 보냈었다.

그는 유하의 가방을 뺏어메고, 유하는 내 카메라 가방을 뺏어 들었다. 몸이 반이나 가벼워진 것 같았다. 그리고 속도도 두 배나 빨라졌다. 김영주님은 더이상 늦어지면 안된다는 뜻인지 빠르게 우릴 앞서갔다. 어둠보다 더 빠른 것 같았다.

잠깐씩 잠깐씩 숨을 돌리고 걸음을 재촉했다. 김영주님은 “칠족령에 가면 전망대가 있거든요. 거기서 오래 쉬어요.”라며 이유를 붙였다. 가벼웠던 걸음도 조금 지나니 다시 무거워졌다. 손으로 무릎을 짚으며 오르막을 오를 때 쯤 칠족령에 닿았다. 

먼저 도착한 김영주님은 툭 붉어져 나온 전망대에 서서 “가방 내려놓고 이리 내려오세요.” 라고 외쳤다. 가방을 던지고는 계단을 빠르게 내려갔다. 난 전망대에 서자마자 “와! 우리나라 최고의 풍경이네요!” 라고 했고, 영주님은 빛이 남아있을 때 온 게 다행이라며 뿌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강은 왼쪽에서 부터 반바퀴를 돌아 우리 발 아래에서 한바퀴 또 돌고, 길고 높은 뼝대를 오른쪽에 끼고 남쪽으로 쭉 뻗다가 다시 돌아 나갔다. 절벽을 이곳말로 뼝대라고 한단다. 그러니까 눈 앞에서 강이 세 번이나 돈 셈이다. “독수리 발 톱 모양이에요.” 영주님이 말했다.

검푸른 하늘 빛밖에 없었지만 가슴에 ‘팍!’하고 꽂히는 풍경이었다. 이곳까지의 고생이 하얗게 사라져 버렸다. 맹 하고 바보같은 목소리로 “오~”, “와~” 이런 소리를 반복했다. 코와 입으로 동시에 그곳의 풍경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러는 동안에 어둠이 넓게 내려앉았다. 쓸 일이 없을거라 생각했던 손전등을 배낭을 뒤적거려 꺼냈다. “바로 옆이 절벽이라 조심해서 내려오세요!” 영주님의 주의령에 긴장이 됐다. 슬금 슬금 뒷걸음 치듯 내려갔다. 서로 갈 길을 비춰주길 반복하다보니 금세 내려설 수 있었다.

짐은 영주님이 소개시켜 준 민박집에 풀고 식사는 ‘동강사랑’에서 했다. 동강사랑은 우리나라 제1호 스트로베일 집이다. 볏짚과 황토를 섞어 벽체를 만드는 것이 특징이다. 앞으로의 꿈 중에는 우리 스스로 집을 짓는 것도 포함돼 있었으므로 다르게 다가왔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몇 안되는 감탄사가 연신 나왔다. “와~” 

우리가 만든 카레와 밥을 영주님이 미리 사 놓은 막걸리와 함께 먹었다. “곤드레 막걸리는 이 지역 막걸리이에요. 정말 맛있어요.” 그의 말을 귓등으로 듣고는 마셔보기도 전에 이 막걸리를 그저 ‘맛있는’정도가 아닌 ‘최고’라고 단정지었다. 땀이 더이상 흐를 수 없을 때까지 흘리고, 다리가 풀릴 수 없을 때까지 걸은 상태여서 어떤 형태, 맛을 가진 것과는 상관없이 시원한 액체는 뭐든지 최고가 될 수 있는 때였다. 후에 내가 곤드레 막걸리에게 ‘최고의 막걸리상’을 수여한다면 그는 ‘그저 다 차려진 밥상에 밥숫가락만 얹었을 뿐입니다.’라는 소감을 말할지도 모르겠다.

“반갑습니다!”하고 큰 소리로 인사를 나눈 뒤 막걸리 한사발을 한번에 털어넣었다. 플라스틱 밥그릇을 아랫니에 툭툭치며 마지막 한방울까지 넣고선 “진짜네요!”라고 말했다. 뭐가 진짠지는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은 채 웃음만 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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