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덕 위 마당 넓은 집이 기적처럼 생생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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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에 맞는 평수의 아파트에 사는 것이 성공의 척도라는 말이 있다.

즉 30대는 30평, 40대는 40평, 50대는 50평 아파트에 살고 있으면 성공한 인생이란 것이다.

그만큼 어느새 아파트는 우리 삶의 기준이 되어 버렸다.

하긴 내 형제들도, 내가 아는 사람들도 대부분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이니 이상할 것도 없다.

나 역시 열살 때부터 아파트에 살기 시작해서 꼬박 30년째 아파트 생활을 하고 있다.

아파트는 이제 너무 익숙해서 새로울 것도 없지만 아파트를 늘 떠나고 싶었다.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은 후로는 더 그랬다. 맘 놓고 뛸 수도 없고, 놀러 나가려면 꼭

아이 손을 잡고 같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나가야 하고, 내 집에 들어와 문 닫으면 이웃과 인사할

일도 없는 곳이 싫었다. 내 집에 아이와 단 둘이 있으니 아이 키우는 일은 모두 내 몫이었다.

심심하고, 지루하고, 놀고 싶고, 움직이고 싶은 아이는 그때마다 엄마만 찾았다.

아이와 놀아주는 것이 일이 되는 생활이었다. 이런 것이 힘겨운 엄마들은 돈을 주고 아이가

놀 수 있는 프로그램과 선생님과 또래 집단을 찾곤 했다.

이중으로 닫혀진 창 안에 있으면 계절도 낯설었다. 아파트에서 태어난 큰 아이는 조금만 지저분한

화장실에선 볼 일도 못 보았다. 아이들을 데리고 엘리베이터를 탈 때마다 불안했다.

엘레베이터가 멈추고 그 안에 나와 아이가 갇히는 상상이 떠나지 않았다.

놀이터에는 같은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만 있고, 단지 안에 있는 학교에는 그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만 다니는 획일적인 환경이 숨 막혔다. 늘 떠나고 싶었다.



마당 있는 집에서 살고 싶었다.

뛸 수 도 있고, 개도 기를 수 있고, 봄 되면 아무 곳에나 풀꽃이 피는 그런 집을 꿈꾸었다.

그런 집이 있으면 아이들은 더 이상 엄마에게만 매달리지 않고 제게 흥미로운 것을 찾아

집 안팎을 뛰어 다닐 것 같았다.  

창 열면 알싸한 바깥 공기가 바로 들어오는 집, 비가 내리면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물로

땅이 패이는 풍경을 볼 수 있는 집이 그리웠다.

큰 눈이 내린날 자매들과 마당에서 연탄재를 눈에 굴려 커다란 눈사람을 만들었던 내 유년시절이 얼마나

행복했었나 깨달으면서 그런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는 아이들이 가여웠다.



작은 학교를 찾아 신도시를 떠나올 때부터 마당이 있는 집을 찾아 다녔다.

단독은 전세가 드물었고, 어쩌다 나오는 집들은 모두 마땅치 않아서 번번히 실망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난주 그렇게 우리 가족이 살 집을 기다리고 찾으며 지내온 8년 만에 마침내 우리가 원하던 집을 만났다.

우연히 알게된 이웃이 소개해준 그 집은 처음 보는 순간 내가 찾던 그 집이라는 것을 알았다.

무엇보다 마당이 넓었다. 담도 없이 언덕 위에 세워진 이 집은 옆으로 산자락이 이어져 있었고

넓은 텃밭도 붙어 있었다. 지금 사는 곳에서 차로 5분만 더 가면 되는 곳이지만 풍경은 아주 달랐다.

작은 저수지를 끼고 20여 호의 집들이 모여 있는 작은 마을에 있는 집이다. 조용하면서도

너무 외지지 않아 세 아이가 마음껏 뛰고 소리지르며 놀 수 있는 집이었다.

아직 세입자를 구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부동산을 통해 확인한 후 나는 카메라를 들고

이 집 구석구석을 사진 찍어 사무실에 있는 남편에게 전송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퇴근한 남편과 아이들을 데리고 집을 둘러 보았다. 남편은 내켜하지 않았다.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가 더없이 편했기 때문이다. 남편은 그 집이 너무 크고, 낡고, 관리하고 어렵다고

반대했다. 그보다 1년이면 9개월은 출장을 다니는 남편 대신 나 혼자 어떻게 이 집에서 어린

아이들과 지낼 거냐고 물었다. 지하철역도 멀고, 시내도 더 멀어지는데 편한 아파트에 살면서도

아이 돌보는 일이 바쁘고 힘들어서 청소도 제대로 못하고 살면서 넓은 집은 어떻게 치우며

살거냐고도 했다. 다 맞는 말이다. 사실 그런 것까지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지 않았다.

지극히 현실적인 남편에 비해 나는 늘 낭만이 앞서는 사람이라서 그저 그 집에 살면서

누릴 수 있는 것들만 혹해 있었다. 뒷 마당에 앵두나무를 심고 모래 놀이터도 만들고

겨울이면 벽난로에 장작도 지피고, 눈 내리면 마당에서 아이들과 눈사람을 만들 일만

내 마음을 채우고 있었다. 살면서 손 볼 곳들이야 집수리에 재주가 있는 남편이 해결하려니 믿는

구석도 있었다. 아파트보다 더 춥고, 불편하고, 할 일도 많겠지만 그 모든 것보다도

그 집에서 해볼 수 있는 일들에 맘이 끌렸다. 피아노를 하루종일 뚱땅거려도 이웃집 눈치 볼 일

없고, 집안에서 축구를 해도 상관 없고, 마당에서 친구들을 불러 고기를 구워 먹을 수 있는

집이 아닌가. 꽃 피고, 비 오고, 눈 내리는 모든 풍경을 현관문 열면 바로 누릴 수 있는 집이다.

그것만으로 어떤 불편함이라도 감수하고 싶었다.

이틀을 울어가며 남편을 설득했다. 청소와 설걷이도 모두 내가 하겠다고 호언장담을 했다.

남편은 내가 장담한 내용을 각서로 쓰면 허락하겠다고 했다. 나는 그러마고 대답했다.

그리하여 이 집을 본지 3일만에 우리는 계약을 했다. 지금 사는 아파트는 내년 8월이 2년 계약만기지만

큰 아이가 다니는 학교로 전학을 시키고 싶어하는 이웃이 들어오기로 했다.

이사 날짜는 12월 31일로 결정되었다.

이 모든 일이 불과 일주일 사이에 일어난 것이니 생각해보면 그저 놀라울 뿐이다.



게으르고, 겁도 많고, 체력도 그다지 강한 편이 못 되는 내가 한살, 네살, 여덟살 세 아이와 함께

수시로 남편이 출장을 가는 넒은 집에서 어떻게 살 것인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남편이 없을 때 아이들이 갑자기 아프거나, 누전이라도 되거나, 보일러라도 고장이 나면

어떻게 대처할지도 잘 모르겠다. 겁내고 걱정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좋다. 어떤 일이든 다 잘 될 것 같다.

다행히 집 앞으로 마을 버스가 지나가고, 아랫마을에 필규네 반 친구가 이사를 와서 서로

의지할 수 있게 되었다. 다른 어려움들은 마을 사람들과 진정한 이웃이 되어 지내다보면

서로 도와가며 해결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나이 마흔에 세 아이와 함께 30년 간의 아파트 살이를 정리하고 단독주택으로 들어간다.

적어도 10년은 살 집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우리도 집 주인도 오래 살기를 바라고 있다.

막상 엄동설한에 덜컥 이사를 하고 보면 여러가지로 불편하고 어렵겠지만 그래도 기대되고

설렌다. 우리 아이들의 어린 시절이 마당있는 집에서 마음껏 놀았던 추억들로 채워질 수

있은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학원도 멀어지고, 마트도 멀어지고, 심지어는 TV도 난시청 지역이지만

우리에겐 책이 가득한 책장이 있고, 문 열면 바로 펼쳐지는 자연이 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 집엔 ‘삼락재’라는 이름도 있다. 이 집을 지으셨던 어르신들이 세가지 즐거운 기운이 깃들기를

바라며 지었다는 이름으로 석판에 새겨져 현관 위에 걸려 있다.

내게는 ‘필규, 윤정, 이룸’이란 세 아이가 있다. 내 삶의 가장 큰 즐거움을 주는 세 아이들이니

우리에게도 이 집은 ‘삼락재’가 된다.



앞으로 삼락재에서 세아이와 더불어 살아가는 이야기를 자주 올릴 것 같다.

우리의 새 출발을 축하해주시라...

우린 이제 ‘삼락재’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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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집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경험이 주는 가치, 병원과 예방접종에 의존하지 않고 건강하게 아이를 키우는 일, 사교육에 의존하기보다는 아이와 더불어 세상을 배워가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고 있다. don312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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