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자들의 마을, 산자들의 여행지로 부활 마을을 찾아서

옛 일본인 공동묘지 위에 들어선 부산 아미동 ‘비석문화마을’ 탐방

부산 서구 아미동 ‘비석문화마을’ 골목길의 축대. 비석·상석 등 묘지에 쓰였던 다양한 석재들이 박혀 있다.
부산 서구 아미동 ‘비석문화마을’ 골목길의 축대. 비석·상석 등 묘지에 쓰였던 다양한 석재들이 박혀 있다.

인구 350만명의 항구도시 부산은 전체 면적의 70%가 가파른 산이다. 도심도 변두리도 산비탈이거나, 아니면 그 사이 어디쯤에 형성돼 있다. 산이 많으니, 터널도 많고 고가도로도 많고, 가파른 비탈길·굽잇길도 부지기수다. 그중에 산복도로도 있다. 산중턱을 따라 굽이치는 복잡하고 비좁은 도로를 말한다. 최근 부산의 명소로 떠오른 산동네 계단식 서민촌들을 두루 꿰며 이어지는 축이 되는 도로다.

일제강점기 28만명이었던 부산 인구는 광복 뒤 36만명으로 늘어났고, 한국전쟁 당시엔 100만명 가까운 피란민들이 부산으로 몰려들었다고 한다. 산비탈을 따라 촘촘히 판잣집들이 지어지며 피란민촌이 형성됐다. 전쟁 뒤 이들이 일부 빠져나간 빈집들은 신발·섬유·봉제공장 노동자들이 메웠다. 이렇게 만들어진 산동네 서민촌이 초량동·감천동·아미동 등 산복도로 일대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가파르고 비좁은 골목을 따라 작은 집들이 다닥다닥 이어지거나, 계단식 논처럼 닦은 터에 옆으로 길게 지어진 집(이른바 기찻집)들이다. 화려한 항구도시 부산의 속살이자, 끈질기게 이어져온 서민들 삶의 터전이다. 낡고 초라했던 이들 동네가 이제는 여행객들이 앞다퉈 찾는 명소가 됐다. 견뎌온 세월이 준 선물이다.

‘비석문화마을’과 고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감천동 문화마을’.
‘비석문화마을’과 고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감천동 문화마을’.

아미동 ‘구름이 쉬어 가는 전망대’에서 본 부산시내.
아미동 ‘구름이 쉬어 가는 전망대’에서 본 부산시내.

산동네의 독특한 경관이 유명해지면서, ‘감천동 문화마을’은 이미 외국인 여행자들까지 몰려 붐비는 부산의 대표적 관광지가 됐다. 사하구에 속하는 감천동과 고개(반달고개) 하나를 두고 서구 아미동 산동네(비석문화마을)가 있다. 카페·식당·액세서리 가게가 즐비한 감천동 문화마을에 비해 탐방객이 적어 붐비지도 않고, 옛 모습도 비교적 그대로 간직한 동네다. 옛 동네의 정취도 즐길 수 있으면서 번잡하지 않아서 좋다.

“뭐가 무섭노. 굶어죽는 게 무섭지 귀신이 무서워?”

아미동은 일제강점기에 조성된 일본인 공동묘지 위에 형성된 마을이다. ‘아미동 국수집’에 모여앉은 할머니들은 하나도 안 무섭다고 했다. 도시재생사업을 벌이며, 벽화 그리고 탐방 코스를 만들어 ‘비석문화마을’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자고 일어나면 끼니 걱정, 물 걱정하는 게 일이지, 귀신 걱정은 무슨.” 무덤 위에 집 짓고, 무덤 사이 골목길을 오르내리며 평생 살아온 분들이다.

탁자 두개와 연탄난로 하나가 전부인 한평 남짓한 크기의 국숫집은 어르신들 사랑방 중 한 곳이다. 푸짐하고 따스하고 맛있는 국수 한 그릇 시켜 먹고 있자니, 혹독했던 피란살이 이야기가 쏟아져나온다.

“아무것도 없이 피란 나와, 살 데가 어딨노. 빈 땅 찾아 자꾸 산비탈로 올라가 집을 지었지.”(75·철원 출신) “왜놈들 무덤 헐어내삘고 돌 모아서 움막 짓고 가마니 깔고 살았다.”(80·목포 출신) “매일 물동이 이고, 저 까치고개 넘어가 물 떠와서 시래기죽, 밀가리풀떼기죽 끼리묵었다.”(77·함평 출신)

어르신들 사랑방인 아미동 국수집.
어르신들 사랑방인 아미동 국수집.

출신 지역은 달라도, 힘겨웠던 시대의 고통스런 기억을 공유한 가족 같은 이웃이다. 오래 살다보니 부산 사투리도 익숙해졌다. “풀떼기죽이라도 아들 마이 멕일라고 어른들은 허리띠 졸라맨 다음에 숟가락을 들었다”고 했다.

비석문화마을의 중심은 아미동 산19번지다. 꼬부랑길 따라 올라 전망대 구실을 하는 길 옆에 서면, 고층빌딩 즐비한 부산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피란수도였던 시절, ‘불순분자’를 찾아내기 위한 까다로운 검문 절차를 거쳐, 천막 한 장씩을 받아든 피란민들이 터를 잡은 곳이 바로 아미동 산19번지, 일본인 공동묘지다. 1876년 부산 개항으로 일본인들이 모여들며 용두산 자락에 일인 마을이 형성됐고, 일인 거주지가 확대되면서 용두산·복병산에 있던 일인 공동묘지가 1907년 이곳으로 옮겨왔다.

아미동 주민들 삶이 죽은 이들의 공간에 덧씌워져 있다는 흔적은 곳곳에서 드러난다. 한 사람 간신히 지날 정도의 좁은 골목길을 따라 이리 돌고, 저리 꺾여 거닐다 보면, 이곳이 묘지였다는 걸 피부로 느낄 수 있다. 골목 축대와 계단에도, 담벽에도 대문 앞에도, 어린이 놀이터 계단까지 잘 다듬어진 사각형 석재들이 마구 박혀 있다. 묘지에 쓰였던 상석과 비석, 경계석과 장식용 석재들이다.

옆으로 누운 비석들엔 묻힌 이들의 이름과 생몰연대까지 선명하게 남아 있다. 비석을 들여다보면 일본인 개인묘, 가족묘도 있고, 창씨개명한 조선인 묘도 있음을 알 수 있다. 한두 평짜리 납골묘 위에 고스란히 담을 쌓고 올라앉은 집도 있다. 골목길 담 밑에 세워놓은 가스통의 받침돌, 대문 앞의 댓돌로 쓰인 석재들에도 묘지석이 많이 보인다. 정화조 공사 중에 나왔다는 일본식 불상도 골목에서 볼 수 있다.

아미동 골목 한 주택 문앞의 디딤돌. 묘지석이다.
아미동 골목 한 주택 문앞의 디딤돌. 묘지석이다.

일본식 납골묘 위에 고스란히 올라앉은 집.
일본식 납골묘 위에 고스란히 올라앉은 집.

아미동 최민식 갤러리.
아미동 최민식 갤러리.

아미동엔 산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준 일본인 사자들을 위로해주는 곳도 있다. 반달고개 밑의 사찰 대성사다. 아미동에서 나온 비석들 일부를 모아 탑처럼 쌓아놓고, 해마다 백중날(음력 7월15일) 위령제를 지내준다.

아미동 골목 탐방길에 꼭 들러볼 곳이 있다. 아미문화학습관에 있는 최민식 갤러리다. 최민식(1928~2013)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1세대 다큐멘터리 사진가다. 평생 부산 서민층의 고단한 일상과 가난한 산동네 풍경 등을 사진에 담았다. 그의 인간을 향한 애정 어린 시선이 가득 담긴 흑백사진들을 감상할 수 있다.

학습관 부근 기찻길 카페에선 아미동 일대 탐방정보를 얻고, 액세서리·비누·쿠키 만들기 등의 체험도 할 수 있다. 아미초등학교 학부모 모임인 ‘아미맘스’에서 비롯한 마을기업에서 운영하는 카페 겸 예술체험장이다.

좁고 습하고 서늘한 아미동의 묘지석 골목길. 부산 산복도로 주변에 산재한 산동네 골목들 중에서도, 근현대사의 쓰라린 상처와 서민들 애환을 가장 진하게 느껴볼 수 있는 곳이다.



부산/글·사진 이병학 선임기자 leebh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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