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NLL 대화록’ 권력의 지도 위에서 춤췄다 남북군사력

 

 

<시사저널> [1237호] 2013.07.03 (수)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국정원의 ‘2007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공개 사건의 전 과정에서 이전 정부에서는 볼 수 없었던 박근혜정부의 독특한 권력 지도가 드러나고 있다. 여기에는 먼저 획기적으로 달라진 국정원의 존재가 돋보인다.

국정원(National Intelligence Service)은 그 명칭에서 드러나듯이 국가에 정보를 서비스하는 지원 기능이지 국가의 정책을 결정하고 정치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기관은 아니다. 그러나 최근 국정원의 행태에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막후에서 정보를 지원하는 본연의 기능을 넘어 국정원 자체가 조직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정치적 행위자이자 독자적인 정책 결정 집단에 가깝다는 비판에 직면하고 있다. 국가 기밀 지정과 해제에 대한 기존의 법리에 구애되지 않고 자의적으로 해석하면서 전광석화처럼 기밀을 공개한 행위는 민주적 절차를 중시하는 사회에서는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이처럼 특이한 현상은 ‘영원한 군인’이란 평을 듣는 남재준 국정원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라는 게 국정원 안팎의 대체적인 진단이다. 행정 관료 출신인 전임 원세훈 원장의 경우만 해도 여당 의원으로부터 고소를 당하면서까지 대화록 원문 공개를 끝내 거부했다. 최근 몇몇 언론사 기자들이 원 전 원장과 접촉을 시도하자 전화를 대신 받은 그의 부인이 “대화록을 공개하지 않았다는 사실만 보아도 우리 바깥어른이 정치적 중립을 지킨 것 아니냐”고 호통을 쳤다는 전언이다. 비록 심리전이라는 명목으로 음성적으로 대선에 개입했다 하더라도 원 전 원장 시절에는 외형적인 중립은 지켰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남 원장 시대가 열리면서 국정원의 양상은 그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 모양새다.

 

남재준, 적과 동지 이분법으로 구분

필자는 지난해 새누리당 안보 특보를 맡고 있던 남재준 원장을 장시간 접촉한 적이 있다. 여전히 노무현 정부 시절에 육군참모총장으로서 겪었던 수모를 가슴속에서 털어내지 못하고 있음이 분명해 보였다. 대선 이후 그가 국정원장으로 부임하고 난 지난 5월 국정원은 국가안보전략연구소 14명의 직원을 전격 해고했다가 취소하는 해프닝을 벌였다. 이 중에는 노무현 정부 당시에 채용된 3명의 박사급 연구원이 포함돼 있었다. 엄연히 계약 기간이 명기돼 있음에도 해고한 후 뒤늦게 계약 위반으로 법정 소송이 벌어질 가능성이 보이자 철회했다. 이 사건은 법리 검토보다 행동이 먼저 나오는 군인 특유의 단호한 결단력의 산물이다.

해고가 진행될 무렵 국정원 전 직원들과 산하 기관에는 “적을 이롭게 하는 자와 절대 함께 가지 않는다”는 원장의 ‘말씀사항’이 전파되면서 미묘한 긴장이 흘렀다. 적과 동지를 명확한 이분법으로 구분하는 남 원장은 사람을 ‘공산주의자냐, 아니냐’로 구분한다. 중간이란 없다. 그 연장선에서 남 원장은 참모총장 시절의 군 출신 부하들을 특보·국방보좌관·3차장 등 핵심 요직에 앉혔다.

다른 한편으로 원세훈 원장 시절에 문란해진 인사를 군 인사처럼 3심제를 도입해, 줄 대기 인사를 청산했다. 또 정치적 창녀라는 세간의 비난에서 벗어나 실추된 직원의 명예를 회복하면서 복지를 증진함으로써 조직의 구심력을 크게 강화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대화록이 공개되고 난 후 열린 국회 정보위에서 남 원장이 “국정원 직원의 명예를 고려해서 대화록을 공개했다”고 발언한 것은 일반인의 상식으로는 납득되지 않지만 최근 그의 스타일을 고려한다면 일견 이해가 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런 남재준 원장 스타일의 국정원 운영은 앞으로 정치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우선 남 원장은 박근혜 대통령 이외에 그 누구로부터도 부당한 간섭을 받지 않겠다는 의지를 명확히 할 것이다. 다소 독선적으로 느껴지는 이런 스타일은 이미 참모총장 시절에 군 인사에 개입하던 노무현 정부 청와대 민정수석실과의 갈등에서 나타난 바 있다. 여기에서 남 원장의 국정원은 박근혜정부에서 또 하나의 안보 권력이라고 할 수 있는 청와대 김장수 안보실장과 어떤 관계를 설정할 것이냐가 관심거리다.

이번 대화록 공개 국면의 독특한 현상은 국정원이 모든 국면을 주도하고 청와대는 마치 남의 일인 것처럼 일절 입장을 표명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역시 지난해 수차례 김장수 안보실장과 장시간 대화를 나눈 적이 있는 필자나 소식통들은 김 실장이 대화록 공개에 찬성했으리라는 일부 관측을 믿지 않는다. 김 실장은 이런 식의 대화록 공개를 하지 않는, 비교적 유연하고 무난한 문제 해결 스타일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남 원장이 지휘관이라면 김 실장은 참모장에 가깝다고 할 것이다. 김 실장은 이번 대화록 국면에서는 전혀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지만 지난 4월의 개성공단 근로자 철수와 같은 남북 관계의 중요한 의사결정을 주도했다. 그러나 대화록 공개가 국내 정치에서의 갈등을 넘어 남북 관계를 좌우할 중요한 변수로 부각되면 문제가 달라진다. 이때는 안보실이 개입할 수밖에 없고, 이때 남 원장과 김 실장의 의견이 갈린다면 그 승자는 박 대통령에 대해 발언권이 강한 쪽이 될 가능성이 크다.

 

남재준과 김장수, 서로 껄끄러운 관계

 

남재준 원장과 김장수 실장은 노무현 정부 시절 육군참모총장 선후임 관계이지만 인사 문제에서는 상당한 이견으로 갈등을 겪은 바 있다. 2005년 참모총장 인수인계 당시 남 원장이 자신의 부하 ㅇ소장을 인사에서 배려해줄 것을 부탁했으나 김 실장이 거부한 바 있다. 참모총장 부임 이후 김 실장은 남 총장과 가까운 인사들을 대부분 쳐버렸다. 지난해 대선 당시에도 남 총장과 김 실장은 안보특보단과 국방안보추진단으로 각기 다른 조직을 구성해 선거운동을 했다. 둘 사이의 불편한 관계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김장수 실장이 또 달리 견제를 받고 있는 징후는 지난 3월 국방부장관 후보 인선 과정에서 나타났다. 김 실장이 지원하는 새누리당 한기호 의원은 거의 장관 후보로 내정된 상황이었으나 김 실장의 세력이 지나치게 확장될 것을 우려한 정무 라인에서 김병관 전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으로 후보를 바꿔버린 것이다. 권력의 지도가 더 복잡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대목이다.

이번 대화록 공개에서는 김장수·남재준 등 과거 ‘노무현의 남자들’이 그 주역이라는 역설에 직면한다. 그중 가장 핵심 인물은 한기범 국정원 1차장이다. 새누리당 국회 정보위원들에게 정상회담 대화록 발췌록을 직접 제공한 장본인이다. 일각에서는 발췌본 작성 자체가 한 차장 주도로 이루어졌다는 관측도 나온다. 정작 흥미로운 것은 노무현 대통령 시절 한 차장의 행적이다. 2004년 탄핵으로 직무가 정지되었던 노 대통령이 업무에 복귀하자 당시 청와대 NSC 사무처 정보관리실에서 근무하던 한 차장에게 전화를 걸어 “야, 한기범. 네가 올린 보고서에 오탈자 있다”고 말한 것이 대통령직 복귀 후 첫 번째 업무 수행이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당시 정보관리실장은 김만복 전 국정원장이었고 정상회담 당시에는 김만복 원장의 부하인 국정원 ○국장으로서 북한 정세 정보를 총괄한 정상회담 성사의 일등 공신이 바로 한 차장이었다. 이랬던 그가 이번 대화록 공개의 중심인물이라는 점이 예사롭지 않게 다가온다.

 

‘대화록 공개 정국’ 최고 스타는 김무성

윤병세 외교부장관 역시 2007년 당시 외교안보수석으로 남북정상회담 실무를 준비했던 핵심 인물로 정상회담 성사에 직접 관련돼 있다. 김관진 국방부장관은 2007년 당시 합참의장으로서 그해 8월18일 청와대에서 열린 정상회담 대책회의에 김장수 국방부장관을 대리해 참석했다. 회의 종료 후 국방부로 돌아온 그는 김장수 장관에게 “청와대의 NLL에 대한 인식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전달한 인물이다. 정승조 합참의장은 2007년 당시 남북 장성급회담 수석대표이고 그해 11월 남북 국방장관회담 당시 실무대표로 김장수 장관을 수행했다. 그는 북한 김영철(천안함 사건의 주범으로 지목된 인물로 4군단장, 총참모장을 역임한 북한 군부의 핵심 인물) 실무대표와 군사회담을 진행한 후 김영철과 함께 21개조의 합의문을 만들었다. 2박3일의 장관급회담 마지막 날 만찬에서 김일철·김영철이 참석한 자리에서 폭탄주와 함께 장관급회담 성과를 축하하고 돌아온 인물이다. 막상 대화록 전면 공개로 고인이 된 노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이 재차 시도되고 있는 지금, 박근혜정부의 핵심 인물들이 오버랩되는 묘한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이번 대화록 국면의 또 다른 포인트는 전격적인 공개 이전에 ‘누가 대화록 전문을 읽었는가’로 모아진다. 대화록 존재를 폭로한 새누리당 정문헌 의원이나 서상기 정보위원장이 대화록 전문과 다소 다른 뉘앙스의 내용을 먼저 언급했다가 야당 쪽으로부터 공격당하고 있는 것과 달리 대선 당시에 전문을 토씨까지 정확하게 유세장에서 읽어내려간 김무성 당시 선거대책본부장은 이번 대화록 공개 정국에서 가장 주목받는 인물로 떠오르고 있다. 그가 왜 실세 소리를 듣는지를 스스로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형님 전 아닙니다’라는 새누리당 김재원 의원의 문자메시지는 실세 권력을 향한 애절함이 절절히 묻어나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런 김 의원의 등을 쓰다듬어주는 김무성 의원.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다.

대선 당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국가 핵심 정보의 유통과 소비는 권력의 지도 위에서 움직였다. 그러나 여기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국가 정보기관의 엄격한 중립성과 공정한 운영 그리고 우리가 과연 어떻게 민주적 절차를 지켜낼 것인가에 대한 새로운 숙제가 주어진 것이다. 적어도 이 점에서 국가 정보기관을 어떻게 개혁할 것인가에 대한 의미 있는 대안이 도출되지 않으면 다음 대선에서도 지금과 같은 현상이 반복될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이러한 악순환은 안보라는 절대 가치를 명분으로 권력의 비정상적인 확장이 용인되는 결과를 빚는다. 여기서 가장 단순하고 기본적인 원칙은 정치권과 정보기관의 연결 고리를 끊는 것이다. 그 바탕 위에서 상호 견제와 균형이 달성되는 최적의 모델을 다시 모색할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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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월간 군사전문지 <디펜스21+> 편집장, 한겨레 군사사이트 <디펜스21> 전문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