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를 안고 산으로 들어가는 뜻은? 무위태극선 교실

민웅기의 무위태극선/현묘한 하나됨/포호귀산 抱虎歸山  

 

 

여봉사폐의 초식을 행한 후에 좌루슬요보가 전개되고 그리고 이어져나오는 식이 포호귀산抱虎歸山이다. 두 발은 마보자세로 벌려선 채, 왼손은 가슴 앞에 나와 장심이 중단전을 향해있고, 오른손은 하단전 앞에 나와서 장심이 하단전을 향해 감싸고 있다.

무게중심이 두 발에 나누어 실려있는데 그 간격은 어깨넓이의 1배 반 정도로 벌려 서있다. 하단전에서 완전하게 균형을 잡고 미려정중尾閭正中이 잘 되어있는 자세이다. 포호귀산抱虎歸山호랑이를 안고 산으로 돌아간다는 말뜻이다. 그래서 자세가 안정되이 호랑이를 안은 듯한 형세이다.

 

태산같이 묵중한 자세가 호랑이를 안았다. 호랑이는 태극太極의 화신化身이다. 태극을 보듬고 있는 기세이다. 태극을 안았으니 천하를 다 품에 안았다. ‘를 비움으로 호랑이를 안을 수 있고, ‘가 내려섬으로 그 자리에 백수의 제왕인 호랑이가 들어서 있다. ‘무아지경無我之境이다. 무아無我는 몰아沒我이며 망아忘我이며 상아喪我이다. 나를 비우니 내가 없는 지경으로, 나를 잃어버리는 경계로 들어선다. 그리하여 얻는 것이 호랑이다.

 

호랑이가 무엇이던가? 하늘 아래의 제왕이다. 태극의 현현인 만물만생을 주름잡는 제왕인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 사람은 그 호랑이를 얻고자 한다. 백수의 제왕인 호랑이와 쟁투를 하려 해도 힘이 부친다. 턱도 없이 힘이 달린다. 그리고 그 호랑이를 본성이 살아있는 채로 생포해야 한다. 그것이 문제다. 호랑이를 죽이거나 호랑이의 본성을 억압하지 않으면서도 호랑이를 얻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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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호귀산抱虎歸山를 비우고 희생시킴으로써 그 자리에 호랑이를 모시는 뜻의 초식이다. 태극의 화현化現인 물의 형상을 잊음으로써 태극의 본체를 얻음이다. 여러 갈래로 나누어진 물길이 제 각각을 고집하지 않고 아래로 향하니, 큰 강으로 들어섬이다. 그 물길의 시원인 바다로 들어섬이다. 개아個我를 내려놓음으로써 온우주를 얻음이다. 다자多者가 일자一者로 귀의歸依함이다.

호랑이를 안고 호랑이 굴에 들어간다. 그래서 귀산歸山이다. 호랑이 굴에 들어간다는 말을 대승불교의 뜻으로 풀면, 이미 해탈의 도를 이룬 아라한의 성자가 스스로는 생사윤회를 벗어났으나,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일부러 생사의 세계 속에 들어가서 중생과 동고동락함이다. 그래서 대승보살도를 이룬다.

 

회소향대 유혹도생回小向大 留惑度生이라는 말이 있다. 작은 뜻을 돌이켜서 큰 뜻을 향하여 보살이 된다. 그래서 열반에 들지 않고 (번뇌, 생사)’을 남겨두어 중생의 생사 속에 들어가서 그들을 제도한다는 뜻이다. 그것을 노자의 말로 바꾸면 현동玄同’, 즉 현묘한 하나됨이 된다.

 

아는 자는 말하지 아니하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

그 감정의 구멍을 막고,

그 욕정의 문을 닫으며,

그 날카로움을 무디게 하고,

그 엉킴을 풀며,

그 빛을 부드럽게 하며,

그 티끌과 함께 하나가 되도록 한다.

이것을 일컬어 현묘한 하나됨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는

친할 수도 없고

멀리할 수도 없으며,

이로울 수도 없고

해로울 수도 없으며,

귀할 수도 없고

천할 수도 없다.

그러기 때문에

하늘 아래 귀하게 되는 것이다.

 

知者不言, 지자불언

言者不知, 언자부지

塞其兌, 색기태

閉其門, 폐기문

挫其銳, 좌기예

解其分, 해기분

和其光, 화기광

同其塵, 동기진

是謂玄同, 시위현동

故不可得而親, 고불가득이친

不可得而疎, 불가득이소

不可得而利, 불가득이리

不可得而害, 불가득이해

不可得而貴, 불가득이귀

不可得而賤, 불가득이천

故爲天下貴. 고위천하귀 (56)

 

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知者不言),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言者不知).”말하다()’는 언어적 규정이나 언어적 체계화를 뜻하는 것으로 읽고, 그렇게 언어적 규정이나 체계화를 통해서는 진정한 앎의 세계를 드러낼 수 없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으로 읽는다. 여기서 앎의 세계란 이다. “를 도라고 말하게 되면 상도常道가 아니게 된다.(道可道 非常道, 1)”의 의미와 상통하고, “말하지 않는 가르침(不言之敎, 2)”의 의미와도 일맥상통한다.

 

그것은 천지의 시원, 즉 도를 무명無名으로부터 찾는 사유법이다(無名, 天地之始, 1). 진정한 도(常道)는 언어적 명칭이나 언어적 개념규정이 닿을 수 없는 그 자리(無名)에 있다는 말이다. 아니 언어적 명칭 이전에 있거나, 언어를 넘어서 있거나, 언어적 상대성을 끊는 절대의 지점에 있다는 말과도 같다. 그렇게 되니 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 한다.”고 하는 노자의 말은 다시 한 번 우리의 주의를 환기시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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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어떻게 하여 노자가 말한 도에 도달할 수가 있는가? 노자는 그 구멍을 막으라(塞其兌)고 한다. 그 문을 닫으라(閉其門)고 한다. 구멍이란 감각으로 통하는 열린 구멍이니 불교식으로 말하면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육근六根이다. 여섯 개의 감각의 구멍은 우리가 세계를 지각하고 인식하는 뿌리이다. 이로부터 감정이 생기고 앎이 생긴다. 그런데 노자는 이러한 감각의 구멍으로는 진정한 알음알이에 도달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보아도 볼 수 없으니 (視之不見, 名曰夷), 들어도 들을 수 없으니 (聽之不聞, 名曰希), 붙잡을래야 붙잡을 수 없으니 (搏之不得, 名曰微), 이 세 가지로는 헤아릴 수 없으니(此三者, 不可致詰), 그러므로 원래 상태의 혼돈(혼연)으로 되돌아가서 하나로서 존재해야 함(故混而爲一, 10)”을 역설했다.

 

그 감정의 구멍을 닫을 때, 그리하여 본래의 혼돈으로 되돌아가서 그 하나로서 오롯하게 현존現存하게 될 때만이 진실을 알 수 있고, 진리 안에서 하나 됨을 체득할 수 있고, 언어적 분별지를 통한 상대적 진리로부터 참으로 자유로울 수 있음을 설파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그 감정의 구멍을 닫으라(塞其兌)고 한 것이다.

 

그 욕망의 문을 닫으라(閉其門)는 말의 뜻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욕망의 문을 불교식으로 말하면 몸과 입, 그리고 생각(身口意)’의 세 가지 문에 해당할 것인 바, 이 세 가지의 행으로 지어진 업을 삼업三業이라 하여 경계해 마지않는다. 그 문을 좁게 보면 욕정의 문에 해당되는 것으로, 이 문을 통해서 생명의 기운을 발산하고 배출한다.

 

생명을 지키고 가꾸는데 필요한 원기元氣의 중심은 하단전이고 원기가 보존된 장부는 신장이다. 생각과 입과 육체의 세 문은 욕정(욕망)을 추구하고 배출하는 주요 통로이고, 이 통로를 함부로 열어 생명에너지를 낭비하게 되면, 애초에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천수를 다 누릴 수도 없을뿐더러, 도의 문을 통과하는 데 필요한 원기를 훼손하고 신기를 더럽히게 되므로, 맑고 밝은 상도常道의 자리에 다가설 수가 없다. 이런 까닭으로 그 욕망의 문을 닫으라(閉其門)고 한 것이다.

 

계속해서 노자가 말한다. 그 날카로움을 무디게 하고(挫其銳), 그 엉킴을 풀며(解其分), 그 빛을 부드럽게 하며(和其光), 그 티끌과 함께 하나가 되도록 하라(同其塵). 그리하면 도와 하나 됨의 상태로 존재할 것이다(是謂玄同). 언어적 규정과 개념으로 아는 알음알이는 갈고 닦으면 닦을수록 그 예리함이 더해진다. 그리고 그 알음알이의 저변에 깔린 사의 추동에 의해서 의 이데올로기는 더욱 날카롭고 견고하게 자기를 무장하고 타인들과 대립하게 되어있음으로, 그 예리함을 무디게 하라는 노자의 법문은 다시 한번 더 우리를 성찰하게 한다.

 

날카로움을 꺾고, ‘의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의 끊임없는 준동과 도발을 제거할 수 있게 되면,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엉킨 을 풀 수가 있다. 이 분이 모든 분노와 원한의 뿌리가 됨으로 이것을 풀게 되면, 우리가 하늘 아래 관계 맺고 있는 모든 인연들 간에 대립과 적의가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그 을 풀어 평화의 다리를 건너가게 된다.

 

그 빛을 부드럽게 하여(和其光), 그 티끌과 하나가 되게 하라(同其塵).”는 이미 누 차례 강조해 마지않았던 경구이다. 빛이 더 이상 빛나지 않도록 그 눈부심을 감추어서, 티끌이 더 이상 어둠의 구석에서 빛을 잃어 소외됨이 없도록 환한 빛으로 비추어 들임이니, 빛과 티끌의 현묘한 하나됨이다(玄同). 진리의 빛 안에 모든 생명체들을 환하게 거두어들임이니, 곧 도와의 합일合一을 말함이다. 화엄경의 작은 티끌 하나에 시방세계가 들어있다.(一微塵中含十方)”를 음미해보는 것이 더 알기 쉽다. 작고 작은 하나의 티끌 속에 온우주가 들어있다는 말이니, 티끌이 무너지면 온우주가 무너지고, 티끌이 깨어나면 온우주가 깨어난다는 말과도 같은 의미로 통한다.

이렇게 도와 하나됨의 존재상태가 되면(玄同), 만유만생을 혼돈混沌의 눈으로 보아 차별함이 없으므로, 그 존재 안에 있는 어느 것들을 특별히 가까이 할 수도 없고(不可得而親), 멀리 할 수도 없고(不可得而疎), 이롭게 할 수도 없고(不可得而利), 해롭게 할 수도 없으며(不可得而害), 귀하게 여길 수도 없고(不可得而貴), 천하게 여길 수도 없다(不可得而賤). 그러므로 도와 하나인 존재상태, 즉 현동玄同이 하늘 아래에서 가장 귀하게 된다.(故爲天下貴)

 

포호귀산抱虎歸山의 수련은 이제 현동玄同의 경계에 들어가는 법문이 된다. 호랑이를 안고 산으로 돌아가는 신성한 행위는 티끌을 온화한 밝기의 빛으로 비추어 가물하게 하나되는 경계에 현존現存하게 한다. 거기에는 빛을 비추임의 주체도 사라지고, 비추임의 대상인 티끌의 존재도 사라지고 말아, 빛과 티끌의 현묘한 하나됨’, 혼돈 속에 동거함만 존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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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엄화상이 말했다.

만일 사람이 나무 위에 올라가서 입으로 나뭇가지를 물고 손에 가지를 붙잡지도 않고 발로 나무를 딛지도 않고 대롱대롱 매달려있는데, 어떤 사람이 나무 아래에서 달마가 왜 왔느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할 것이냐? 대답을 못하면 묻는 이에게 미안하고 대답하면 떨어져 죽을 것이니 이럴 때에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향엄은 당나라 말기의 위산영우의 제자다. 위산은 향엄의 박학다식이 도리어 깨달음에 방해가 될 것을 염려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향엄에게 이르기를 나는 네가 아는 것을 듣고 싶지 않다. 나는 네가 모르는 소리를 듣고 싶다. 네가 세상에 나오기 전 이야기를 한번 말해보라고 했다.

이 말에 향엄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향엄은 꼼짝 못하고 위산의 도움을 청했으나 위산도 도와줄 길이 없다. 향엄은 하는 수 없이 자기의 지식을 총동원해 보았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는 자기의 지식을 모두 포기하고 그 곳을 떠나 남양충 국사가 살던 절간을 찾아가서 식모살이를 하였다. 아침 저녘 밥을 짓고 낮에는 청소하고 빨래하고 부지런히 일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산에 풀을 베고 밭을 만들 작정으로 땅에 있던 돌을 캐어 내던지던 중, 우연히 돌 하나가 대나무에 가닿아 대나무가 하는 소리를 내었다. 그 순간 갑자기 자기가 태어나기 이전의 소리를 알게 되었다.

이것이 향엄의 격죽오도擊鬻悟道라는 것이다. 마치 얼음이 녹아 싹이 트듯이 지금까지의 모든 의심이 녹아 풀리고 깨달음의 싹이 트인 것이다. ‘째각하는 소리에 이제까지 나를 가득 채우고 있었던 알음알이의 세계는 다 잊어버리고 다시는 수행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향엄은 진리를 깨달은 것이다. 그는 목욕재계하고 위산을 향하여 큰절을 올렸다.

스님의 은덕은 부모 이상이십니다. 그때 저에게 말씀해주셨 어찌 오늘이 있었겠습니까?”

 

은 교외별전敎外別傳이다.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깨닫게 하는 것뿐이다(自悟自得). 남을 가르치려고 입을 열면 나뭇가지를 입에 물고 매달린 사람처럼, 천길만길 지옥에 떨어지고 만다. 말로 가르치려 들면 다른 사람만 지옥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자기도 지옥에 떨어지고 만다. 그래서 금강경에 석가모니도 49년 동안 한 번도 가르친 적이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글 사진/민웅기(<태극권과 노자>저자,송계선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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