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부검, 조사 객관성 위해 독립 기관이 운영해야

심리부검, 조사 객관성 위해 독립 기관에서 운영해야
심리학자들, "국방부가 주도하는 심리부검 문제있다" 

김동규 기자 ppankku@gmail.com

아들의 그 고통이 느껴진다. 
도망 갈 곳이 없었던 그 곳에서의 탈출이 죽음이었음을
저 희뿌연 마음속의 안개가 혼란을 일으켜 
자신이 갈 곳의 방향을 잃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거짓말처럼 안개가 걷히듯 
우리에게도 저렇게 맑고 밝은 날이 있을까? 
아들이 돌아오지 않는 한 아마도 없겠지. 

그냥 이렇게 마지막으로 이어지는 그 곳까지 가고 싶다. 
이렇게 또 미쳐가고 있네
아들, 보고싶다… 보고싶어…

- 한 병사의 유가족이 인터넷 게시판에 남긴 글

한국군은 매년 평균 80여 명이 넘는 병사들이 자살을 선택한다. 5일에 한 명꼴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셈이다. 군사망자 유가족 단체 병영인권연대를 운영 중인 정재영 사무처장에 따르면 자살한 병사의 부모는 사고로 사망한 병사의 부모에 비해 심한 외상후 스트레스에 시달린다고 한다. 자살한 병사는 대부분 가혹행위에서 도망치기 위한 해방구로 죽음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장기간 우울증에 시달리다 아들의 뒤를 따르는 사람도 있다. 

작년 9월 15일 ‘국가유공자 등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이 개정된 후에는 유가족들이 마음의 짐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게 됐다. 법률 개정 전 ‘자해행위로 인한’ 사망자는 국가유공자 대상에서 제외됐다. 개정 이후에는 ‘자해행위로 인한 경우’ 항목이 삭제됐고 지난 5월 31일 국방부가 전공사상자처리 훈령개정안을 내놓으면서 자살한 병사들도 국가유공자가 돼 현충원으로 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그러나 개정 국방부 훈령은 '직무수행 또는 교육훈련과 관련한 구타·폭언 또는 가혹행위 등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어 자유로운 의지가 배제된 상태에서 자해행위로 인해 사망·상이 하였다고 의학적으로 인정된 경우'에만 순직자로 인정하고 있다. 한 마디로 사망 전 정신질환에 가까운 상태에 놓였다는 게 의학적으로 증명돼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미 사망한 병사의 정신질환 여부를 의학적으로 증명하기란 매우 어렵다. 유서마저 남기지 않고 떠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국방부는 현재 자살 병사의 정신질환 여부를 증명하기 위해 망자의 심리상태를 분석하는 심리부검 도입을 고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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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부대 앞에서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는 유가족 단체 회원들.
관을 들고 있는 사람들은 군에서 사망한 병사들의 어머니들이다.

자살 원인 규명은 물론 예방에도 큰 효과

유서도 없이 자살한 사람의 심리상태를 밝혀내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영화 <사랑과 영혼>처럼 무당을 통해 죽은 이의 영혼을 불러내 물어보면 간단하겠지만 영화는 영화일 뿐. 현실에서는 망자의 유품과 평소 행적, 지인들의 증언 등을 통해 사인을 추측하는 방법 외엔 별다른 방도가 없다.

국방부가 도입을 고려하고 있는 심리부검(Psychological Autopsy)은 자해행위로 인해 사망한 이들의 삶을 재구성해 자살 원인을 밝히는 과정이다. 사망자의 사체를 의학적으로 조사해 사인을 밝혀내는 신체부검과 달리 일기장과 같은 개인적 기록, 가족이나 친구들과의 면담 기록 등을 토대로 사인을 추정한다.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범죄자를 찾기 위해 사용되는 프로파일링과 비슷한 면도 있지만 신원이 뚜렷한 사망자를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심리부검은 주로 심리학자나 정신과 의사로 구성된 전문가 집단이 수행한다.  

심리부검을 세계 최초로 도입한 국가는 미국이다. 1934년에서 1940년 사이 미국 뉴욕 시에서는 총 93건의 경찰관 자살사건이 발생했다. 뉴욕시는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전문가들을 모아 심리부검을 실시했다. 1958년에는 로스앤젤레스 검시소의 수석 검시관이 원인이 불명확한 사망 사고에 대해 로스앤젤레스 자살예방센터의 전문가들에게 심리부검으로 자살 여부를 밝혀 달라고 의뢰했다. 미국은 지금도 다양한 유형의 사망 사고에 대해 심리부검을 수행하고 있으며 군인의 자살도 심리부검을 통해 사인을 밝혀내고 있다. 

심리부검은 분석을 위해 자료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유가족이나 친구들을 면담하며 자연스레 이들에 대한 심리 치료가 이뤄진다. 또한 다양한 자살 사건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유형을 분석해 자살예방에도 크게 기여하고 있다. 일례로, 핀란드는 정부 차원에서 광범위하게 심리부검 제도를 운영해 1990년 10만 명당 30.3명이었던 자살률을 2004년 20.4명 까지 낮추는 데 성공했다. 핀란드는 심리부검을 가장 성공적으로 운영한 나라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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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4년 군복무 중 총탄을 맞고 사망한 허원근 일병의 아버지 허영춘 씨(좌측 첫 번째).
국방부는 허 일병의 죽음을 자살로 결론 내렸지만 사망 후 26년 만에 사법부에서 타살로 인정했다.
   
한국은 예산·전문 인력 부족해 문제

한국에서도 심리부검을 도입해 실제로 조사를 수행한 사례가 몇 차례 있지만 핀란드나 미국처럼 정부가 주도해 제도를 운영한 사례는 없다. 2008년 12월 보건복지부가 한국자살예방협회와 함께 자살예방 종합대책의 하나로 심리부검 도입을 예고하고 이듬해 말 연구 결과와 서비스 구축방안을 발표한 사례가 있지만 소규모 연구 활동에 그친 시도였다. 

군에서도 일부 사건에 대해 심리부검을 실시하고 있지만 좁은 범위의 활동이다. 군에 관련된 심리부검 제도 도입 사례 중 장시간 체계적으로 수행했던 대표적인 예로 2009년 12월 31일 활동이 종료된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안에 구성된 심리부검소위원회가 있다. 그러나 이 위원회도 한시적 기구이고 소규모 조직이라는 한계가 있다. 당시 심리부검소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았던 현명호 중앙대 심리학과 교수는 “군의문사위원회 외에도 5.18 민주화 운동 유가족들 중 자살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심리부검을 실시한 적이 있지만 외국처럼 광범위하게 진행한 적은 없다”며 심리부검 제도를 운영하기 어려운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현재 한국에 심리부검 능력을 갖춘 사람은 극소수다. 심리부검에 대해 전문적으로 교육받은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판단으로 국내 전문 인력은 10여 명 수준에 불과할 것이라고 본다. 인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국가 예산 지원도 적어 대부분 일회성으로 끝나고 마는 것이다.”

자살에 대한 편견도 걸림돌이다. 심리부검은 사망자의 지인을 면담하는 과정이 중요하다. 그러나 한국 정서상 자살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은 탓에 주변인들이 망자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을 꺼리고 연구자가 접근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고 한다. 오랜 기간 접촉해 연구자와 친해진 뒤에나 결정적인 증언을 하는 경우가 많아 그렇잖아도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심리부검이 한국에서는 더 오래 걸린다. 작년부터 올해에 걸쳐 국방부가 수행한 한 병사의 자살 사고는 심리부검에 무려 1년이 소요되기도 했다. 

인권단체, 심리부검 기구 국방부 내에 두는 건 부적절

국방부는 지난 5월 3일 국방회관에서 ‘군 심리부검 운영 세미나’를 열어 심리부검 제도 도입의 길을 모색했다. 세미나에는 이상철 육군사관학교 법학과 교수, 한국형사정책연구원 박형민 박사, 오윤성 순천향대 경찰행정학과 교수, 조은경 한림대 심리학과 교수, 가톨릭대 이경욱 박사 등이 참가해 심리부검에 관한 다양한 연구 내용을 발표했다. 국방부 측은 세미나에 대해 “이 행사는 심리부검 제도의 도입을 전제로 연 것이 아니라 제도를 이해하고 전문가들의 의견을 수렴해보기 위한 자리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또한 “아직 제도의 도입에 대해선 어떠한 사항도 결정된 것이 없고 지금은 제도의 필요성과 제한사항 등에 대한 검토만 이뤄지고 있다”고 전했다.  

심리부검을 도입하려는 국방부의 움직임에 대해 인권단체 관계자들은 “취지는 좋지만 국방부 내부 조직으로 운영하는 것은 문제”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정재영 병영인권연대 사무처장은 “군 관계자에 따르면 심리부검위원회 같은 형태로 심리부검 조직을 만들 예정이라고 하는데, OECD 가입국 중 자살률 1위로 범국가적 차원의 자살 예방 정책을 수립해야 할 중대한 시점에서 군대 내 자해사망자들에 국한해 단독으로 추진하는 건 효율성 측면에서 문제가 있다”며 우려를 표했다. 정 처장은 덧붙여 “유가족들의 근본적 불신이 군의문사 문제의 배경인데 심리부검 기본조사에 외부 인사를 앞세워 국방부 소속 조사관이 개입하면 조사 객관성도 떨어진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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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4년 동료 병사 15명을 사살하고 북으로 넘어간 김 일병 사건에 관련된 지휘관 확인서.
당시 사망한 병사들의 유가족이 도착했을 때 이미 이들의 시체를 연병장에서 태우고 있었다고 한다.
지휘관이었던 최석주 대령이 언론에 공개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이 확인서를 써주고 일인당 244만원의 보상금을 지급했다.


일부 심리학자들도 인권단체들과 마찬가지로 국방부의 시도는 긍정적으로 평가했지만 내부 운영에는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최대헌 서강대학교 평생교육원 교수는 “심리부검이 필요한 건 분명하지만 군의 통제를 받는 내부 조직이 수행하는 건 문제”라며 대안을 제시했다.

“신체부검은 망자의 몸이라는 명확한 증거가 있다. 그러나 심리부검은 면담과 남겨진 문서들에만 의존해 망자의 심리 상태를 알아내야 하기 때문에 한계가 크다. 이 때문에 객관성을 확보하는 과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국방부 산하 조직이 독립성과 객관성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을까? 국가인권위원회나 국민권익위원회처럼 독립적인 조직 아래에 두거나 별도의 기구를 만들어 심리부검 제도를 운영해야 한다고 본다.”   

현명호 중앙대 교수도 조사의 공정성을 강조하며 외부에 조직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어디서 하는가 보다는 얼마나 공정한 체계가 구축돼 있는지가 중요하다. 국방부와 적절한 협조관계를 유지하며 동등한 위치에서 심리부검에 임하도록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같은 형태가 좋을 것 같다. 심리부검을 통해 유가족들의 마음을 풀어주는 것도 중요한 기능인데 국방부가 이를 총괄할 경우 불신이 더 쌓일 수 있다. 자살을 군만의 특수한 문제로 보지 말고 사회적 문제라는 큰 틀 안에서 해결할 수 있도록 국가 차원에서 위원회를 구성해 운영하는 게 더 나은 방법이라고 본다.”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법무팀장 출신인 강석민 변호사는 “군에 기구를 둘 경우 유가족들의 깊은 불신이 외려 국방부의 취지를 탈색시킬 것”이라고 지적했다.   

군기사고 90% 자살, 심리부검 통해 자살 예방 대책 수립해야

군에서 사망한 병사들의 숫자는 70년대 이후 지속적으로 감소해 왔다. 70년대까지만 해도 연평균 1,500명에 달하던 사망자는 2011년 143명으로 10배 가까이 줄었다. 그러나 전체 사망원인 중 자살이 차지하는 비중은 1993년 37%에서 2011년 67%로 더 늘었다. 2000년 이후 사망자가 가장 적었던 해인 2009년에는 전체 사망자 113명 중 자살이 81명으로 71%를 차지했으며 그해 군기사고 사망자는 모두 자살이었다. 매년 발생하는 군기사고 사망자의 90% 이상이 자살이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심리학자들은 자살한 병사들에 대한 심리부검을 통해 사인을 규명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살 예방 대책 수립을 위한 양질의 자료를 축적할 수 있는 체계를 만드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심리부검은 핀란드 사례처럼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이들의 심리를 분석해 자살예방에 기여하고자 하는 목적이 크기 때문이다. 정재영 병영인권연대 대표는 정부 기관들 중 가장 보수적인 성향을 지닌 국방부가 심리부검을 도입하려는 시도만큼은 박수를 받을만한 일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그는 “시도보다 더 중요한 건 제도의 올바른 운영”이라며 반드시 국방부 밖에 심리부검 담당 조직을 설치할 것을 재차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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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가진 거라곤 ‘안보의 민주화’에 대한 열정밖에 없던 청년실업자 출신. 〈디펜스21+〉에서 젊음과 차(茶)를 담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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