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 그런 식으로 키우지 마라. 생생육아

자식, 그런 식으로 키우지 마라 소리를 들었다.

 

설날, 아들은 자정부터 동 틀 때까지 여섯 시간을 응급실에서 떼쓰고 코피 쏟고 울다 수액을 맞으며 잠이 들었다.

전날 아침만 해도 기침 조금, 콧물 조금이었다. 평소에도 달고 사는 감기라 예사로웠다. 다만 명절 시골집만 다녀오면 크게 병치레한 전력이 두 세 차례라 이번엔 긴장 좀 하자 싶은 기분은 있었다.

대전에서 시골집까지 가는 차 안에서 잘 자고 잘 놀고 중간 들른 휴게소에서 간식도 잘 먹었다. 시골집에 도착해서도 사촌형들과 장난치고 엄마의 감시가 벗어난 틈을 타 과자도 잔뜩 먹느라 신이 났다. 그러던 게 저녁 무렵 갑자기 배가 아프단다. 집에 가자고 보챈다. 몸이 뜨끈뜨끈한 게 40도가 넘었다. 옷을 벗기고 해열제를 몇 번 먹이고 기다려도 소용은 없고 아이는 배를 잡고 데굴데굴 구르면서 안 아프게 해 달라고 눈물을 쏟는데, 무슨 수가 있나, 급히 인사를 하고 대구로 나왔다.

젊은 의사는 폐 사진, 복부 사진을 찍고도 뭔지 모르겠다며 피 검사며 소변 검사를 하잔다. 충수염인지 어떤지자신은 없는 듯했다. 결국 원인도 모른 채 해열제와 수액만 맞다 아침, 친정으로 갔다.

아이 상태를 지켜보다 늦은 오후 잠이 들었다.

출생 첫 해에는 기관지염, 전 해 설에는 고열, 추석에는 폐렴 입원, 이쯤 되면 시골집 가기가 솔직히 겁이 난다.

 

2016-02-16 12;28;37.jpg

 

남편의 부모님은 두 분 다 일찍 돌아가셨다. 하여 집안 며느리 셋 중 누구 하나 아버님, 어머님을 뵌 적이 없다. 당연히 고부 간 갈등이 있을 리 없고 명절 증후군도 여느 집보다 덜할 테다.

추석과 설을 제외하고 모이는 날이래봤자 부모님 제사 2, 조부모님 제사 1, 가기 싫다 말다, 일하기 싫다 말다 할 것도 없다 싶지만 하필, 제사가 일주일에 두 번, 5일 간격으로 있다. 이게 집안의 논쟁거리다만, 그래도 세 며느리 중 둘째인 내가 합류하기 전까지만 해도 형님과 막내 동서가 10여년 이상을 그럭저럭 모셔왔다.

헌데 내가 오면서 문제가 생겼다. 제사 때 맞춰 시골집 내려가기가 내 입장에서 녹록치 않았던 탓이다.

아이와 나는 줄곧 둘이 생활을 했다. 두 돌도 안 된 아이를 들쳐 업고 기저귀며 짐을 바리바리 챙겨 대중교통도 들지 않는 시골집까지 몇 시간이나 걸려 갈 엄두가 안 났다.

시골집은 지금도 버스며 택시가 다니지 않는 곳이다.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택시를 타고 30분이면 족히 가기야 한다만 나오는 택시가 없다. 근처에 슈퍼는 물론이고 병원이며 약국이 있을 리 없다.

보일러가 있으니 바닥은 후끈하지만 시골집 특유의 외풍이 세서 밤이면 찬 공기가 들이치고 아이를 씻기고 뉠 곳도 마땅치가 않다.

죄송하지만 사정이 이러하다고 양해는 구했다만 두 사람이 이해를 하는 것도 몇 번, 당연히 감정이 쌓일 것이다.

입장을 바꿔 보면 나도 억울한 마음이 들게다.

그래도 아이가 네 살이 된 지난해부터는 나도 제사를 꼬박 챙기기 시작했다. 다만 아이는 친정에 맡겼다. 데려가 봤자 봐 줄 사람이 없으니 일하는 데 방해만 될 테고 잠자리도 불편하니 나 혼자 가는 게 편하다. 애가 좀 커 엄마랑 떨어져 있을 만 할 때 제사도 가기로 한 것처럼, 좀 더 크면 함께 데려가자는 계획이었다.

 

허나, 사람이 열이면 생각도 열, 생각이 다른 것도 당연하다. 춥다, 불편하다, 제사를 안 오고, 아이를 안 데려오고 그런 행동이 형님에게 곱게 보일리 없었던 게다.

아이가 태어나고 바라보는데 나는 이 아이가 그리 안쓰러울 수가 없었다. 이 험한 세상을 어찌 헤쳐 나갈까, 아빠 엄마 좋자고 이 늙은 나이에 너를 낳아, 이 다음에 의지할 형제 하나 못 만들어줘서 미안하다 싶었던 게다.

헌데 이런 이야기를 하자 형님은 그런 생각으로 애를 키워 그 애가 제대로 되겠느냐 화를 냈다. 자신은 아이들에게 이 엄마 몸을 통해 나와, 너희가 세상을 보게 됐으니 항상 엄마한테 감사하라고 아이에게 가르친단다.

그 또한 일리가 있긴 하다 싶지만 견해차이다.

그 때도 형님은 아이를 그런 식으로 키우지 말라했다.

 

아마 그때부터 그 말이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내 진작부터 말하려했다, 애를 그런 식으로 키우지 마라.

그런 식이란 건 추운 날 마스크 씌우고 목도리까지 해 가며 꽁꽁 싸매 포시랍게 키우는 것하며, 밥 안 먹으면 굶길 것이지 간식을 먹이는 것, 결국 형님 보기엔 귀하게 키우는 것처럼 보이는 행동들이다.

나는 그렇게 안 키웠다, 겨울에도 얇은 티 한 장 입혀 개똥밭에 굴리듯 키웠다, 이 집 사람들 다 그렇게 키웠다, 동서 엄마한테 물어봐라, 동서 엄마도 동서 그렇게 키웠을 게다. 왜 동서만 유난이냐, 애는 혼자 키우냐, 누구 애는 폐렴 안 걸려봤냐, 굶기면 다 먹게 돼 있다, 밥 안 먹는다고 간식을 그렇게 주는데 누가 밥을 먹느냐.

그렇게 키우니 면역력은 하나도 없고 허구한 날을 아프지 않느냐, 이런 이야기다.

   

이런 이야기를, 정초부터 들었다.

항변을 하고 싶긴 했다. 밥을 안 먹어 간식을 먹인 것은, 말하기도 지루한 이야기다만, 아이가 1년 반을, 고형 음식을 거부하고 혀에 닿기만 하면 뱉기 바빠 간식이라도 먹여 씹는데 거부감을 줄이려던 고육지책이다. 고형의 간식을 먹이게 되기까지도 험난했다. 그리고 아이는 마침내 밥을 먹는다. 밥을 먹으면 간식을 주느냐 협상을 하긴 하지만 다섯 살이 되고, 밥을 먹어야 한다는 걸 분명히 인지하게 됐다.

1월부터는 어린이집에서도 밥을 먹기 시작했다.

이런 과정을 밖에서 보는 사람들이 알 리 없다.

아들에겐 다른 아이들과는 다른 시간이 흐르고 그 시간을 강압적으로 앞당길 수 없다는 걸 짧은 몇 년 동안이지만 엄마인 나는, 알게 됐다.

어쩔 수 없이 기다려야 한다면,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밤 기저귀도 2월이 시작되고서야 뗐다. 다른 아이들에 비하면 아주 늦지만 아이는 이제 마음의 준비가 된 게다.

아무튼 그런 과정을 바깥의 다른 이들에게 구구절절 설명할 수도 없다.

 

하지만 형님 말이 아주 틀린 것도 아니다.

자주 아파 과보호를 하게 된 건지, 과보호를 해 자주 아프게 된 건지는 보기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어느 순간, 나는 아이가 아플까 봐 더럭 실제보다 심하게 겁을 먹고 앞서 나가는 경우가 잦아졌다.

비겁하게 변명하자면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선 도시에서 40도까지 열이 오르는 아이를 어떻게도 하지 못해 울고 싶던 초보 엄마의 트라우마가 오래오래 남은 탓, 하지만 이제 엄마 5년차, 달라지긴 해야 한다. 

 

앞날에 내 애가 어떻게 될 지도 모르는데, 타인에게 육아 그런 식으로 하지 마라 자신에 차 말하는 건 어떤 엄마도 쉽게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인생 1년 후배다만 엄마 경력 20년 차, 형님 이야기가 고까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육아방식을 돌아보는 계기는 됐다.

그 후 어쩐지 아이의 기침소리 듣는 마음이 좀 편해졌다.

전에는 밤에도 기침이 심하면 어쩌지, 기침 때문에 잠도 못 들면 어쩌지, 폐렴까지 가면 어쩌지 전전긍긍이었는데 이젠 병원 가면 되지, 정도로 마음이 가벼워졌다.

물론, 육아 그런 식으로 하지 말라고 용감하게 외친 형님에게 감사의 마음은 없다. 고까운 건 고까운 거다, . 허나 듣고 새길 바가 있어 내 좀, 고쳐나가기로 육아노선을 수정은 하였다.

 

3일 밤을 새우게 했던, 결국 엄마까지 몸살 나게 만든 아이 복통의 원인은 노로 바이러스 장염이었다.

이 면역력 제로제로의 아들아, 아프지 좀 마라.

 

 

 

 

 

 

 

 

 

 

 

 

 

 

 

 

 

 

 

 

 

 

TAG

Leave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