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무장투쟁의 역사를 되짚다- ① 우성 박용만 기타분야

항일무장투쟁의 역사를 되짚다 ①

이루지 못한 항일무쟁투쟁의 꿈, 우성 박용만
무장투쟁으로 독립 쟁취하려 한 미 대륙의 항일무장투쟁론자

2009년 11월 8일, 갖은 고난을 딛고 「친일인명사전」이 발간됐다. 해방 이후 60여 년간 대한민국 역사의 오점으로 남아있던 친일 문제는 「친일인명사전」의 발간으로 어느 정도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게 됐다. 독재정권 치하에서 오랜 시간 친일파가 곧 기득권이었던 까닭에 연구조차 금기시되던 친일 문제는 이제 일단락 된 셈이다. 그러나 일부 역사학자들은 아직 한 가지 작업이 더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바로 항일인사들에 대한 인명사전을 만드는 것이다. 「디펜스21+」는 2월호부터 항일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항일무장투쟁을 벌였던 독립운동가들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마련했다.

김동규 <디펜스21플러스> 기자 ppankku@naver.com

우성 박용만. 「항일인명사전」 편찬을 준비 중인 재야의 역사학자 김상구 씨에게 대표적인 항일무장투쟁론자로 꼽을만한 사람이 누가 있느냐고 묻자 가장 먼저 나온 이름이다. 흔히 항일무장투쟁이라 하면 홍범도, 김좌진 등을 떠올리기 쉬운데 박용만이라는 이름이 나온 것은 의외였다.

항일무장투쟁 인사 중 가장 먼저 소개해야 할 정도의 인물이라면 국사 교과서에서도 비중있게 다뤘을 텐데 국사를 필수과목으로 배운 기자도 박용만이란 이름은 전혀 들어본 적이 없다. 심지어 국가보훈처에서 1992년부터 2012년까지 21년 동안 선정해 온 ‘이달의 독립운동가’ 명단에도 없는 이름이다. 여기에 홍범도와 김좌진은 소개돼 있다. 의아해하는 기자를 향해 김 씨가 말을 이었다.

“항일무장투쟁을 벌인 인물들은 많다. 그러나 박용만을 빼놓고 무장투쟁을 논하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한국에서 박용만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박용만은 대표적인 무장투쟁론자로 외교론을 택한 이승만과 치열하게 대립하던 인물이고 약점을 많이 쥐고 있다. 이승만이 건국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한국에서 박용만을 연구하면 이승만의 치부를 드러내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에 연구하는 것이 금기시 돼 왔다. 임시정부 노선 문제로 대립했던 김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민주화 이후 자유롭게 역사를 연구할 수 있는 시대가 왔지만 민족의 지도자로 추앙받는 김구의 업적에 치명타를 입힐 수 있는 박용만 연구는 금기시 돼 왔다.”

실제로 한 역사연구가는 대학원생 시절 석사 논문으로 박용만에 대해 연구하려 했지만 지도교수가 “김구 선생에게 누가 될 수 있다”며 연구 주제를 바꿀 것을 제안해 할 수 없이 다른 주제로 석사 논문을 마쳤다고 한다. 과거 국정 교과서에서도 박용만은 단 한 차례도 언급되지 않았다. 2003년부터 한국근현대사 과목의 일부 교과서에 언급되기 시작했지만 짧게 인용되는 데 그쳐 비중은 미미했다. 다행히 지난해부터 고교 한국사 교과서 6종에서는 박용만을 제대로 다루기 시작했다.

 

포맷변환_사진1._박용만.jpg 
▲ 우성 박용만

박용만은 누구인가?

박용만에 대한 연구가 부족했던 탓에 그에 대한 자료는 많지 않은 편이다. 소수의 역사학자들이 얼마 남아있지 않은 자료들을 끌어 모은 결과 그의 부친이 어릴 적에 사망했다는 등의 왜곡된 사실은 많이 정정됐지만 죽음에 관한 의문 등 아직 명확히 드러나지 않은 부분도 많다.  

박용만은 1881년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중리에서 태어났다. 적극적인 성격을 지녔던 박용만은 13살 때부터 집을 떠나 숙부 박희병 슬하에서 자랐다. 의친왕 이강과 함께 관비장학생으로 미국 유학을 다녀온 개화파 인사이자 외교관리였던 박희병에게 근대 교육을 받으라며 부친이 위탁한 것. 박용만은 또 1895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숙부의 소개로 박영효 등의 개화파 인사들과도 교류하며 활빈당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그는 1905년 미국으로 망명한 후, 미국 네브래스카 주립대학에서 정치학과 군사학을 전공했다. 국제정세의 흐름에 눈이 밝았던 박용만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선 무장투쟁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판단해 해외에서 독립군을 양성하는 활동을 벌인다. 그가 미주에서 만든 한인소년병학교, 대조선국민군단 등은 일제에 대한 무장투쟁 의지가 만든 결실이었다.   

끝까지 무장투쟁론을 고수하긴 했지만 박용만은 단순히 무력만 아는 독립 운동가는 아니었다. 그는 문무를 겸비한 뛰어난 언론인이자 사상가였다. 임시정부가 박용만의 사상에서 나온 개념이란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가 1910년부터 신한민보를 통해 주장한 ‘무형국가론’은 실질적으로 최초의 임시정부라 할 수 있는 ‘대한인국민회’를 설립하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또한 1917년 ‘대동단결의 선언’과 ‘대한독립선언’에 참여하며 1919년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탄생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후일 이승만을 수장으로 선출하며 외교론을 선택한 임정과의 노선 차이로 외무총장 임명마저 거부하며 갈라서긴 했지만 박용만이 임시정부 수립에 사상적 기반을 제공했다는 점은 변치 않는 사실이다. 

 

포맷변환_사진5._소년병학교시절.jpg 
▲ 1911년 한인소년병학교 시절의 박용만(오른쪽에서 두 번째)

최초의 해외 군사학교를 설립하다

역사학자들 중에는 우성 박용만이 가장 위대한 독립운동 지도자라고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학계의 연구가 부족하고 교과서에서도 제대로 다루지 않은 인물인 탓에 박용만을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일부 학자들이 김구나 안창호도 아닌 박용만을 최고의 독립운동 지도자로 꼽는 이유는 무엇일까. 미주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며 준비론의 안창호, 외교론의 이승만과 함께 무장투쟁론을 내세우며 큰 영향력을 떨쳤던 박용만은 다양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박용만의 가장 큰 업적은 최초로 해외에 독립군 양성을 위한 한인군사학교를 세운 것이다. 그는 1909년 6월 초순 미국 네브래스카 주 커니시의 한 농장에 ‘한인소년병학교’를 설립했다. 한인소년병학교는 현재의 학군사관후보생(ROTC)처럼 학기 중에는 각자 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여름방학에 입소해 평균 8주 간 훈련을 받는 하계군사학교체제로 운영됐다. 당시 박용만의 나이는 29세에 불과했다.

박용만이 머나먼 이국땅에 한인소년병학교를 설립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장기화 될 가능성이 짙은 항일무장투쟁을 대비해 우수한 자질을 지닌 핵심 장교를 양성하는 것. 둘째는 서방의 선진 교육을 통해 국제정세에 밝고 신지식을 배운 지도자를 양성하는 것이다. 단순히 전투훈련을 통해 전투병을 만드는 군사학교가 아니라 사관학교처럼 다방면으로 뛰어난 인재를 기르는 학교를 만드는 것이 박용만이 가진 목표였다.

한인소년병학교를 설립하기 약 1년 전인 1908년 9월 15일 박용만은 네브래스카대학에 입학한다. 네브래스카대학은 미국 남북전쟁 이후 연방정부가 부지를 제공해 설립한 중부 7주 주립대학 중 하나로 유사시 간부후보생을 양성할 조건으로 설립한 학교였다. 박용만이 이곳을 선택한 이유 중 하나는 1892년 전국 간부후보생 각개교련 대회에서 이 대학이 1등을 할 만큼 전통있는 군사훈련 프로그램이 갖춰져 있기 때문이었다. 프로그램의 창시자는 다름 아닌 퍼싱(Pershing, John Joseph)이었다. 중전차 M-26으로 더 유명한 퍼싱은 제1차 대전에서 유럽 원정군 사령관으로 활약한 노련한 지휘관이었다.

크기변환_사진2._소년병학교훈련.jpg
▲ 한인소년병학교의 훈련 장면


둔전병제로 운영되던 한인소년병학교는 오전에는 농장에서 밭일을 하고 오후에는 군사훈련을 받았다. 둔전병제는 만주와 연해주에서 농사를 지으며 자급자족할 독립군을 구상하고 있던 박용만의 지론으로 학생들은 늦은 저녁까지 공부를 하는 등 상당히 고된 하루를 보내야 했다.

한인소년병학교는 1914년 8월 8일 6기 졸업생들을 마지막으로 일본의 항의로 인해 폐교하고 말았다. 6년간 배출된 졸업생은 40여 명으로 이들은 졸업 후 만주와 러시아 등지에서 직접 독립군으로 활동하거나 미군에 입대해 유럽전선에서 싸웠다. 이들 제자 중 널리 알려진 인물로는 김용성(맹호군대대장), 이희경(대한적십자회 초대회장·임시정부 외무차장), 정한경(주일대표부 대사), 김현구(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장), 유일한(유한양행·대한상공회의소 초대회장), 구영숙(초대 보건부장관) 등이 있다.

우성 박용만 기념사업추진회 한애라 사무처장은 한인소년병학교는 네브래스카 주정부와 커니지방청의 공식 인가를 받아 설립됐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고 주장한다.

“식민지배를 받던 동양의 소국에서 강대국에 공식 허가를 받고 군사학교를 설립했다는 건 대단한 일이다. 만약 독재정권에 신음하는 어느 소국에서 한국 땅 한가운데에 저항군 양성을 위한 군사학교를 연다고 하면 쉽게 허가가 떨어질 것 같은가? 박용만 선생을 비롯한 여러 독립 운동가들의 뛰어난 외교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한 사무처장은 또 “한인소년병학교는 이후 각국에 설립된 독립군 양성기관에도 영향을 줄 정도로 항일무장투쟁을 선도했다”며 박용만의 업적을 평가했다. 실제로 많은 군사학교에서 박용만이 집필한 「군인수지」와 「국민개병설」이 교재로 사용됐고 한인소년병학교의 교육편제가 상당부분 차용되기도 했다. 

대조선국민군단과 북경군사통일회의

1914년 6월 10일 박용만은 한인소년병학교에 이어 하와이에 대조선국민군단과 대조선국민군단사관학교를 창설한다. 많은 교민들의 지원으로 부지와 자금을 제공받은 국민군단은 하와이군사령부로부터 정식 설립 인가를 받은 군사집단이었다.

국민군단은 박용만의 지론대로 한인소년병학교와 같이 둔전병제로 운영됐다. 단원들은 기숙사 생활을 하며 농장에서 노동, 군사훈련, 학습을 병행했다. 100여 명으로 시작해 많을 때는 300여 명에 달한 대조선국민군단 사령부는 모든 한인 독립군을 ‘국민군단’으로 편성하기 위해 조직된 것이었다.

그러나 제1차 대전이 발발한 후 일본이 미국과 친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미국측에 대조선국민군단의 활동 중단을 요청하는 등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박용만이 의형제였던 이승만과 노선의 차이로 대립하면서 국민군단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1915년 여름에는 일본이 미국 국무장관에게 박용만에 대해 강력하게 항의하기 시작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미 정부는 즉시 조사에 들어갔고 하와이지방정부는 하와이 한인사회의 자치권을 박탈해버렸다. 둔전병제를 바탕으로 운영했던 까닭에 파인애플 농장의 불경기와 흉작은 재정 악화를 가져왔고 대조선국민군단은 결국 문을 닫고 말았다. 

갖은 역경에도 박용만은 포기하지 않았다. 3.1 운동이 일어날 것임을 알고 있던 박용만은 1919년 3월 3일 하와이에서 ‘하와이 한인들의 복리증진과 독립운동 원조’를 기치로 걸고 조직된 대조선독립단를 창설한다. 또 같은 해 8월 말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대한국민군을 조직하고 총사령관에 조성환, 자신은 총참모로 취임했다. 한 달 뒤 박용만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무총장으로 추대되지만 이에 응하지 않고 1920년 신채호, 신숙, 이회영등 무장항쟁을 주장하는 15인과 뜻을 모아 국내외 각지에 산재한 무장단체들을 결집한 ‘군사통일회의’를 조직한다. 그의 머릿속에는 어떤 자리에 올라 의미 없는 정치를 하는 야망보다는 무장투쟁을 통해 독립을 쟁취하려는 생각만 가득했다.

-----------------------------------------------------------------------------------------------------------------------------------

사진. 이용화 선생.JPG
▲ 백원 이용화(1890.9.9~1980.9.24 건국훈장 애국장)

충북 음성 출신 이용화 씨는 박용만의 사위로 박용만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는 1911년부터 1920년까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보스토카ㆍ인스티튜트대학 도서관에서 한국관계정보 러시아어 번역 및 서류정리 책임을 맡았다. 어릴 적부터 프랑스인 신부 밑에서 신식학문을 익힌 덕분에 영어와 프랑스어에 능통하던 그는 러시아어도 쉽게 배워 러시아인들과 관계가 깊었다. 이러한 이유로 무기를 구입하려는 독립군들이 그를 자주 찾았다. 그는 주로 체코제 무기를 취급했는데 당시 시베리아에 주둔하고 있던 체코군과 교섭해 독립군에 무기를 넘겼고 이 체코제 무기가 청산리 전투에 쓰였다고 한다.

-----------------------------------------------------------------------------------------------------------------------------------

의형제 이승만의 탐욕과 배신
 

박용만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바로 이승만이다. 미국에서 박용만과 이승만은 극렬하게 대립했다. 원래 의형제의 연을 맺을 정도로 친분이 두터웠던 이들이 원수가 된 데는 이승만의 탐욕이 한 몫 단단히 했다.

두 사람의 인연은 박용만이 주한일본공사의 황무지개척권 반대투쟁으로 한성감옥에 투옥됐을 때 시작됐다. 이때 만난 이승만과 박용만, 정순만은 의형제를 맺으며 ‘3만’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박용만은 출소 후 이승만이 옥중에 집필한 「독립정신」원고를 트렁크 바닥에 숨겨 미국에 몰래 들여와 출판하는 등 이승만을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이승만을 대신해 아들 봉수를 미국으로 데려오고 오갈 데 없던 이승만을 하와이로 초청해 앞길을 열어준 것도 박용만이었다.

그러나 하와이로 온 이승만은 그 은혜도 잊은 채 탐욕의 마수를 은인 박용만에게까지 뻗쳤다. 이승만은 하와이의 한인사회의 재정을 장악하기 위해 갖은 수단을 동원했다. 무고한 사람을 공금횡령죄로 고소해 자살기도까지 하게 만드는가 하면 자신의 정적들을 무자비한 폭력으로 다스렸다. 박용만은 이러한 이승만의 만행에 일단은 침묵했다. 그러나 무장투쟁을 위해 동포들을 단결시키기에 바쁜 박용만에게 한인 사회를 분열시키는 이승만의 행동이 곱게 보일 리 없었다. 

1918년 1월 이승만은 자신이 독직혐의로 적발 당하자 외려 박용만을 “한국인 군단을 설립하고 일본군함 이즈모호가 입항하면 파괴할 음모를 가진 자”라고 고소한다. 이 고소건은 증거불충분으로 기각되고 그간 이승만의 만행에 침묵하던 박용만은 시국소감을 발표하며 이승만과 완전히 갈라선다. 사실 애초부터 이승만과 박용만은 노선이 다른 인물이었다. 

 

포맷변환_사진4._이승만박용만.jpg

▲ 이승만(좌)과 박용만(우)


대표적인 일화로 일제의 한반도 지배를 옹호하던 스티븐스 대사 암살사건이 있다. 1908년 3월 23일 스티븐스를 암살한 장인환, 전명운 의사의 변호를 위해 미국에 살고 있던 동포들은 7,390달러에 이르는 기금을 마련하고 이승만에게 재판 통역을 요청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한국인의 정서보다 미국인의 여론을 중히 여겨야 한다는 요지의 말을 전하며 통역을 거부한다. 윤봉길, 이봉창 의사의 의거에 대해서도 “어리석은 짓”이라고 비난하며 의열투쟁에 대해 거부감을 나타냈다. 무장투쟁론을 고수하던 박용만과는 애초에 맞지 않은 인물이었던 것.   

이승만이 가장 힘겨운 정적으로 여겼던 인물은 김구가 아닌 박용만이었다. 혁명 이후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하와이로 망명하기 직전 그는 비서에게 “나의 일생에서 가장 큰 정적은 우성이었다”고 고백한 바 있다. 이 말을 통해 볼 때 하와이에서 벌어진 박용만과의 갈등은 이승만에게는 매우 힘겨웠던 것으로 보인다. 해방 이후 박용만이 제대로 연구되지 않았던 데는 이렇게 이승만에게 있어 최악의 정적이었던 인물이라는 이유도 크게 작용했다는 게 항일역사학자들의 주장이다.    

해방되기 27년 전 박용만은 이승만에 대해 “만일 조국이 광복된 후에 이와 같은 인도자와 이와 같은 민기가 있으면 국가와 민족의 비운을 초래할 것이다”고 예측했다. 이 예측은 섬뜩할 정도로 잘 들어맞았다. 남한을 이념 분쟁과 친일 논란의 구렁텅이에 몰아넣은 장본인이 다름 아닌 이승만이었기 때문이다. 이승만이 남긴 상흔은 지금도 대한민국을 분열시키고 있다. 

의문의 죽음, 초라한 이름 석 자

1928년 10월 17일 박용만은 중국 베이징에서 이해명(본명 : 이구연)의 흉탄에 쓰러지고 만다. 그가 피살당한 이유는 국내 밀입국설과 조선총독 밀회설로 알려져 있는데 여기에는 많은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 우선 그가 정말 민족을 배신한 인물이었나 하는 점이다.

백범 김구가 1928년 11월 20일 이승만에게 보낸 편지, 소설가 박태원의 글 등에는 박용만이 일제의 스파이고 중국인 첩까지 두며 호화 생활을 했다고 증언하는 내용들이 있다. 그러나 박용만을 연구하는 학자들에 따르면 이들 박용만 비판 세력은 공통적으로 상해 임시정부와 연결고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외교론을 펼친 상해 임시정부에 적대적인 입장을 고수하던 박용만은 무장투쟁에 하등 도움이 안 되는 임정에 대한 무용론까지 펼쳤다. 임시정부파들에게는 박용만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정적이었던 것.

박용만에 대해 일제가 작성한 300건이 넘는 기밀문서에도 그가 스파이라는 증거는 전혀 찾을 수 없다. 외려 박용만은 정보 문서에서 ‘배일선인의 영수’, ‘불령선인’으로 표현되는 등  요주의 인물로 여겨졌다. 문서에서는 박용만과 독립운동 세력 간 이간책도 언급하고 있다.

임시정부의 사상적 틀을 제공했음에도 임정과 등 돌린 채 끝까지 무장투쟁을 고수했던 그의 행적을 고려하면 일제에 박용만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나 다름없었다. 이해명의 암살은 일제에게는 예상치 못한 선물이나 마찬가지였던 셈이다.

 

포맷변환_사진3._박용만_피살지.jpg

▲ 박용만이 이해명에게 피살당한 장소


또한 암살자 이해명에 대해서도 논란이 많다. 황포군관학교 출신과 의열단원이라고 알려지기도 했던 이해명의 경력은 근래 들어 대부분 허위로 밝혀졌고, 그의 암살시도는 상부의 지시가 아닌 우발적 범행이라는 증언과 증거가 속속 드러나고 있다. 당시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박용만의 죽음에 대한 논란은 계속되고 있지만 최근 박용만을 연구한 역사학자들에 따르면 격동하는 시대적 상황에 따른 비극적인 사건으로 보는 게 옳다고 한다.

독립운동계의 가장 큰 손실이라 할 수 있는 그의 안타까운 죽음 이후 뒤늦게나마 1995년 정부는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으나 아직 그의 유해조차 찾지 못했다. 미주 한인들이 이승만, 안창호와 함께 3대 지도자로 꼽는 그의 생가는 텃밭이 됐고 소수 역사학자들이 흔적을 찾으려 할 뿐 대부분의 한국인은 이름 석 자 조차 모른다. 항일 역사를 연구하는 역사학자들은 “비록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박용만에 대한 대대적인 연구활동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군인으로서, 사상가로서, 언론인으로서 평생을 독립운동에 바친 박용만의 이름 석 자라도 제대로 알려야할 때가 아닌가 싶다.   

 

 

 

 

참고자료
▲「미대륙의 항일무장투쟁론자 박용만」, 김도훈
▲「다시 분노하라 -친일파 이승만의 독립운동-」, 김상구
▲「재미한인의 독립운동」, 방선주
▲「박용만과 한인소년병학교」, 안형주
▲ 다음 까페 ‘독립지사 우성 박용만’(cafe.daum.net/woosung18810702)



 

TAG

Leave Comments


profile월간 <디펜스21+> 박수찬 기자 블로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