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 주민은 제압과 통제의 대상? 정세

강정 주민은 제압과 통제의 대상?
기무사와 해군의 서로 다른 갈등 관리법


제주 강정마을이 5년째 갈등에 신음하고 있다. 갈등의 원인을 제공한 것은 다름 아닌 해군. 해군이 기지건설을 이유로 강정에 발을 디딘 후부터 마을은 둘로 쪼개지고 주민들의 평화로운 삶은 무너졌다. 해군은 그러나 갈등을 해결하려 하기는커녕 주민들과 부딪힐 때마다 갈등을 증폭시키는 행동만 보여 왔다. 걷지도 못하는 노인에게 반대 시위에 참가했다며 고발장을 날린 해군과 갈등대신 대화를 선택했던 기무사는 그래서 비교될 수밖에 없다.

김동규 디펜스21플러스  기자 ppankku@naver.com

현재 과천시 주암동에 터를 잡은 국군기무사령부는 우여곡절이 많은 곳이다.

원래 서울시 종로구 소격동에 위치해 있던 기무사는 건축한 지 80년이나 지난 건물인 탓에 1998년 실시한 안전진단결과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다는 판정을 받았다. 기무사는 낡은 건물을 허물고 신청사를 지으려 했지만 예술계와 주민들의 반발에 부딪혀 이전을 검토하게 된다. 예술계에서는 기무사가 경복궁과 가까운 곳에 있어 청사를 다른 곳으로 이전한 뒤 그 자리에 경복궁과 연계한 문화예술 벨트를 조성하자는 건의가 나오고 있었다. 이밖에도 소격동 주민들의 이전 건의, 8,000여 평의 좁은 부지 문제 등 이전 필요성이 계속 대두되면서 2001년 1월 대통령 재가에 따라 기무사는 이전이 확정됐다.

당초 이전 부지로 선정된 곳은 내곡동이었다. 산림과 자연을 훼손할 가능성이 가장 적고 청와대, 국방부와 가까워 업무협조에도 용이하기 때문이다. 기무사가 물색한 이전부지는 구룡산 남쪽으로 국가정보원과는 1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위치였다. 그러나 곧 국정원에서 자신들과 거리가 너무 가깝다며 제동을 걸어왔고 결국 2011년 11월 이전 계획은 백지화 돼 버린다. 국정원 측은 내곡동 이전이 확정된 직후부터 “정보기관이 밀집해있으면 적의 공격 목표에 취약해진다”는 이유로 반대의사를 내비쳤다. 결국 이 힘겨루기에서 기무사가 백기를 들고 다른 이전 장소를 물색하기 시작한다.

경기 과천과 성남 등을 후보로 두고 이전 장소를 물색하던 기무사는 과천 주암동을 최적의 입지로 선정했다. 2002년 4월 기무사는 과천시 주암동 일대의 땅 22만여평을 확보해 2006년까지 청사를 신축하고 이전을 완료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한다. 당시 기무사 관계자는 이전 부지로 주암동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 “우면산 터널을 통하면 국방부에 20분이면 도착할 수 있고 부대 방호에도 유리한 위치다”고 밝혔다.

그러나 순조로울 줄만 알았던 이전안은 곧 격렬한 반대에 부딪히며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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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군제주기지사업단 홈페이지에 게시된 제주해군기지 조감도(http://jejunbase.navy.mil.kr/)

기무사 대 과천시의 무한 갈등

주암동 이전이 결정된 지 두 달이 지난 2002년 6월 선출된 신임 여인국 과천시장은 기무사 이전에 강력하게 반발하며 단식 투쟁까지 벌였다. 그는 80년대 초반 기무사의 전신인 보안사령부의 장교로 근무한 이력이 있지만 “기무사 부지에 문화관광시설이 들어와야 한다”며 기무사 이전에 반대했다. 당시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나온 여 시장의 말.

“기무사가 옮겨올 부지 길 건너편에는 서울대공원, 국립현대미술관, 서울랜드 등이 문화휴식 공간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그런 곳에 군부대가 들어온다고 생각해보라. 반대할 명분은 충분하다고 본다.”

기무사 이전안은 이성환 전 시장 때 결정된 사항으로 여인국 시장과 기무사 간에는 대화가 없었다고 한다. 그는 “기무사에서는 이미 과천시가 동의해 재검토가 불가능하다고 하는데 그건 임기를 3개월 앞둔 전임 시장이 검토차원에서 이전 계획을 경기도에 제출한 것일 뿐”이라고 밝히며 반대 의지를 천명했다.
 
당시 기무사가 이전할 부지는 22만평으로 전체면적이 55만평인 과천시 면적의 절반에 가까운 넓이였다. 기무사는 이곳에 700억원을 들여 청사, 생활관, 아파트 등의 건물을 지을 목적으로 6만 2천평, 순찰로, 경계지역, 배수시설용 5만 1천평, 교육훈련장 및 기타시설 용으로 11만 4천평을 계획했다. 과천시는 기무사가 소격동에서는 8천평 정도의 부지를 사용했으면서 무려 22만평이 넘는 부지를 주암동에 사들인 데는 명분이 부족하다며 강력히 반발했다. 2003년 7월에는 106개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기무사 과천시 이전반대 공동대책위원회(공대위)‘가 조직돼 수년간 탄원서를 제출하는 등 반대운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공대위는 2003년 7월 21일 "국방부는 청와대와 중앙정부의 근거리에 기무사령부를 포진시켜야 한다는 논리로 과천 이전 계획을 발표했으나 정부의 행정수도 충청권 이전공약으로 기무사 이전의 당위성이 상실됐다"는 요지의 성명을 발표하며 본격적으로 반대운동에 들어갔다. 이들은 또 “부대 이전 시 20만평 규모의 그린벨트 훼손이 불가피하며 교통문제, 지역발전 저해 등의 피해가 우려된다”고 주장하며 이전안의 철회를 요구했다.

이에 대해 기무사는 “이전안은 국책 사업이기 때문에 철회는 불가능하며 이미 85%에 이르는 토지 보상이 진행돼 10월에는 착공에 들어가야 한다”고 밝히며 강행입장을 고수했다. 이러한 기무사의 태도에 과천시 전체 여론이 들끓으며 이전 반대운동은 더욱 심해졌다.

2003년 8월 12일 공대위는 반대운동을 펼친 지 한 달 만에 과천시 전체주민 71,000명의 75%에 달하는 53,174명의 반대 서명을 받아 진정서와 함께 국방부, 기무사, 건설교통부, 경기도 등에 전달했다. 진정서는 “과천은 도시 전체 면적의 91.5%가 개발제한구역으로 지정돼 30년 동안 피해를 보고 있었는데 일방적으로 개발제한구역관리계획 변경절차를 진행하면서까지 군부대를 이전한다는 것은 묵과할 수 없는 처사”라며 과천시를 철저히 배제한 채 벌어지고 있는 이전 계획에 분노를 드러냈다.

더욱이 기무사와 반대 측의 대화 채널이 열려있지 않은 상황이라 대립은 시간이 지날수록 첨예해져 갔다.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반대운동이 펼쳐졌지만 기무사는 이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았고 “이미 협의된 사항이다”라는 공허한 말만 되풀이하며 기존 이전안을 고수했다. 기무사와 반대 측의 갈등은 더 이상 협의가 불가능해 보일 정도로 깊어진 상태였다.

2004년 6월에는 공대위가 대규모 촛불시위를 벌이고 지역 설명회가 무력충돌로 무산되는 등 극한 대립 양상을 보이며 기무사와 과천시가 접점 없는 평행선을 달리고 있는 점을 재확인 시켜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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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군기지반대 촛불문화제를 열고 있는 사람들 ⓒ 제주참여환경연대 


한국의 전형적인 민-군 충돌 양상

과천시와 기무사의 대립은 흔히 볼 수 있는 익숙한 풍경 중 하나다. 한국에서 군부대 이전이 결정될 때마다 벌어지는 사태로 평택 미군기지이전,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 등에서도 이러한 양상을 관찰할 수 있다.

이러한 대립의 원인은 군에서 제공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일단 사업계획에서부터 고시에 이르기까지 일방적으로 공고하는 수준에 머물러 주민들에게 사전 홍보가 거의 되지 않아 갈등이 뒤늦게 표출된다. 또한 협의 과정에서도 다양한 주체를 배제한 채 형식적인 사전협의만 있을 뿐 주민들의 참여는 불가능한 경우가 많다. 기무사 이전을 추진하는 과정에서도 이러한 고질적인 문제가 드러난다.

국방부와 기무사는 이전의 명분으로 과천시와 협의하며 사전에 의견을 수렴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는 형식적인 것으로 협의내용이나 결과가 전혀 없었다. 이에 대해 박홍엽 한국행정연구원 연구원은 ‘공공정책갈등 생성과 증폭요인 연구’에서 “국방부는 대규모 이전사업을 추진하면서도 해당 지방자치단체와 자치단체의회, 그리고 해당 주민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에 관한 사전의견 수렴이 부족했고 적극적인 홍보활동도 전개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기무사는 “전임 이성환 시장 시절은 물론 여인국 시장이 당선된 후에도 70여차례에 걸쳐 설명회를 열었다”며 항변했지만 당시 임기원 공대위 대변인은 “주민 설명회가 아니라 기무사가 주암동에 들어서게 되면 주민들에게 어떤 시설을 만들어주면 좋겠냐는 식의 질문에 불과했다”고 일축했다.

신임 여인국 시장의 반발은 당연한 순서였다. 어찌 보면 가장 큰 이해당사자라 할 수 있는 과천시는 이전계획을 수립하고 결정하는 과정에 전혀 참여하지 못했다. 지역주민의 의견은 아예 수렴할 시간도 없었다. 기무사는 군부대인 까닭에 이전될 경우 개발제한구역이 발생하는 등 주민들에게 불이익이 발생할 소지가 다분했다. 이 때문에 주민 의견을 경청하는 것은 필수 절차였다. 그러나 주민들의 의견은 꾸준히 무시당했고 2005년 갈등이 극을 달린 후에야 겨우 이전 과정에 참여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기무사는 기무사대로 2년이 넘는 시간을 허비했고 과천시는 과천시대로 지쳐갔다. 만약 기무사가 사전에 주민들을 적극적으로 설득하고 과천시와도 진정성 있는 협의 태도를 보였다면 이러한 일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란 게 행정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특히 기무사 측은 여인국 과천시장이 주암동이 아닌 과천 내 다른 지역으로 이전할 것을 제안했음에도 끝까지 주암동 이전만을 고수한 까닭에 갈등을 더욱 키웠다. 과천시의회도 처음에는 이전 재검토 수준을 요구했지만 기무사의 완강한 태도에 시간이 지날수록 계획 백지화 쪽으로 기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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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찰로 가득한 강정 마을. 해군은 대화 대신 공권력에 기대고 있다. ⓒ www.savejejuisland.org 


기무사, 협의로 돌아서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기무사와 과천시의 대립은 그러나 의외로 빠른 속도로 해결되기 시작한다. 평행선을 달리던 대립이 해결의 기미를 보인 것은 2005년 6월 국방부, 기무사, 과천시, 과천시의회, 주민대표 등으로 구성된 다자간협의체가 조직된 후 부터다. 이때 구성된 다자간협의체는 이전 문제 해결의 전기를 마련했으며 후일 모범적인 갈등극복사례로 평가받기도 했다.

기무사 이전 계획이 반대에 가로막혀 더 이상 진전을 보이지 않자 2005년 4월 21일 국회 국방위원회는 국방부에 일원화된 관리체제 운영기구를 만들 것을 권고했다. 이에 따라 국방부가 적극적으로 나서 중재하기 시작하자 기무사도 기존 입장을 선회해 대화에 중점을 두고 과천시, 주민대표 등과 협상하기 시작했다.

물론 4차례에 걸친 다자간협의체 회의에서도 과천시는 남태령을 대안부지로 제시하고 기무사는 주암동 부지를 고수하는 등 대립이 이어졌지만 2005년 9월 기무사가 제시한 부지 축소안이 받아들여지면서 최종합의를 이끌어내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준다. 기무사는 2005년 8월 22만 7천여 평으로 계획돼 있던 부지를 5만 6천여 평으로 축소해 제시했다. 원래 계획에서 제외된 부지는 과천시에 매각하기로 결정했다. 5개월간 아홉 차례에 걸친 다자간협의체 대화는 기무사의 부지 축소안을 받아들이며 최종합의에 이르렀고 2008년 11월 기무사는 드디어 과천에 자리를 잡고 소격동 시대를 마감한다.

기무사는 청사 이전을 위해 과감하게 이전 부지를 축소했다. 과천시도 완강히 거부했던 주암동 이전안을 받아들였다. 덕분에 기무사는 예정돼 있던 이전지로 가면서 명분을 얻었고 이전 사업에 대한 과천시의 지원약속도 따냈다. 과천시는 나머지 부지 17만평을 매입해 활용할 수 있는 이득을 얻었고 추가로 군사시설보호구역을 지정하는 것도 막아냈다. 양측이 양보할 건 양보하며 윈-윈한 것이다. 이는 누가 보더라도 성공적인 갈등해결이었다.

주민들을 설득하기 위한 기무사 요원들의 노력도 눈여겨볼만하다. 당시 기무사 이전추진단장이었던 이형락 대령은 집을 아예 과천으로 옮겨 주민 설득작업을 벌였다. 이 대령은 또한 ‘기무봉사단’을 꾸려 매주 일요일마다 과천시에 위치한 양호원, 지체장애인 수용시설 등 복지시설을 찾아 봉사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이들은 청소, 목욕, 이발 등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며 설날에는 28개 경로당을 찾아 음식을 대접하는 등 기무사에 대한 배타적 인식을 불식하려 노력했다.

이전 후에도 이러한 활동은 이어졌다. 과천에 터를 잡은 기무사는 이전이 끝났다고 지역 주민에 대한 융화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2008년 11월부터 기무사는 과천의 사회복지시설과 경로당, 학교 등을 돌며 의료, 청소, 교육 봉사를 시작했다. 군의관, 간호장교, 사진병 등 다양한 계급으로 구성된 봉사단은 매주 복지시설 한 곳을 순회하며 무료 진료 활동을 펼쳤다. 명문대 출신 장병들은 개인교사를 자청해 저소득층 자녀들을 대상으로 개인 과외 봉사를 했다. 기무사 관계자는 또 “정기적으로 부대 식당을 폐쇄해 외부 식당에서 식사를 사먹도록 하고있다”며 “지역 상권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기 위한 활동”이라고 밝혔다. 기무사의 이러한 융화 활동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으며 중단할 계획은 없다고 한다.  


기무사와 다른 해군의 갈등관리법

기무사 기지 이전 사례는 여러 갈등관리이론 논문에서 성공적인 갈등관리사례로 소개되고 있다. 이에 비해 강정문제를 제공한 당사자로 5년째 주민들과 대립하고 있는 해군과 비교하면 기무사의 방식은 저만치 앞서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해군이 제주해군기지 건설을 위해 강정을 선정하는 과정도 기무사가 과천 주암동 부지를 선정하던 때와 비슷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제주참여환경연대 고유기 처장에 따르면 강정마을이 해군기지 후보지로 거론되기 시작한 것은 2007년 5월 실시한 해군기지 유치여부 및 후보지 선정을 위한 여론조사가 있기 불과 17일 전이라고 한다. 해군은 이를 위해 사전에 전 마을회장 윤모 씨 등 강정마을의 유력자들과 만나 로비를 펼쳤다. 고 처장에게 주민 설명회 개최 여부에 대해 질문하자 “강정마을을 최종 후보지로 선정하고 기지건설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설명회는 단 한 차례도 없었다”고 밝혔다.

해군은 특히 기지 건설을 추진하다 주민저항으로 무산된 화순과 위미리에서 해녀 등 어촌계가 가장 강한 저항을 보인 것을 감안해서인지 강정에서는 해녀들을 포함한 어촌계 주민들을 사전에 포섭한 것으로 드러났다. 또한 인터넷 신문 <제주의 소리> 2007년 5월 9일자에 해군기지 건설 유치 여부를 묻는 도민 여론조사 이전 이미 양해각서가 체결된 상태였다는 사실이 폭로돼 논란이 일기도 했다. 해군이 확보했다고 주장하는 강정마을 주민 695명이 동의한 해군기지 건설 동의서는강정마을회 측의 공개요구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공개되지 않고 있다. 전형적인 사전 협의 없는 군사기지 건설의 순서를 밟고 있던 것이다.

기지 부지 선정과정에서부터 불거진 갈등은 기무사 이전 당시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져버렸다. 반대 측 주민들은 물론 국내 시민평화단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까지 비행기를 타고 날아와 강정 해군기지 건설을 반대하고 있다. 과천시만 상대로 하던 기무사와 달리 해군은 이제 그들이 ‘외부세력’으로 부르는 전국의 시민평화단체와 국제 평화단체까지 상대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물론 사태가 여기까지 온 데는 해군이 갈등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자초한 면이 크다.  

한 강정마을 주민의 증언에 따르면 해군은 반대측 주민들을 설득하려 노력하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다고 한다.

“해군은 찬성하는 주민들을 앞세워 반대 주민이 소수에 불과하다고 왜곡하는 건 물론 찬성 주민들만 모아 식사를 대접하고 집회를 지원하는 등 편향된 모습을 보여왔다. 강정마을회는 주민 자치 공동체이기도 하지만 행정조직이라고 할 수도 있다. 마을회가 해군기지 반대 입장을 갖는다고 해도 공식 파트너로 인정하고 설득하려 해야 하는데 해군은 우리를 제압과 통제의 대상으로만 보고 있다.”

해군은 본격적으로 공사를 추진하면서 공사강행에 항의하는 주민들을 상대로 대화를 하기보다는 공권력에 기대거나 자극적 언행을 일삼았다. 2009년 1월에는 해군기지 사업단 본부 부지 착공에 항의하기 위해 영내에 진입한 주민과 평화 활동가들에게 사업단장이 “우리 땅이니 나가라”고 발언하기도 했다. 2011년 7월에는 해안 펜스 설치를 막으려는 주민들과의 충돌과정에서 해군 소령이 여성 활동가를 폭행해 고발당하기도 했다. 해군은 심지어 걷지도 못하는 노인에게 시위에 참가했다며 법원 출두통지서를 날렸다.

2009년 9월 <한국방송>이 제주시 전복요리 전문점 ‘산호 전복’에서 열린 해군기지 추진 관련 유관기관 대책회의 내용을 공개하면서 파장은 더욱 커졌다. 이 자리에서는 해군기지 찬반세력을 분열해 해군기지 건설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가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들이 쏟아졌다. 해군의 머릿속에 반대주민들의 의견은 아예 고려 대상이 아닌 상황인 것이다. 해군의 이러한 태도 때문에 이미 갈등은 회복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반대측 주민들은 끝까지 해군기지 건설을 막겠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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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인 활동가 매튜 호이 씨가 운영하는 제주 해군기지 관련 사이트(www.savejejuisland.org). 강정은 전세계 평화 운동가들에게 알려져 해군이 감당할 수 없는 문제로 커져 버렸다.  


갈등관리에 실패한 해군

기무사와 해군의 차이점은 입장차가 있는 측을 대하는 태도다. 기무사는 갈등이 격화되는 시점에서 다자간협의체를 구성해 양보할 건 양보하고 얻을 건 얻어냈지만 해군은 다르다. 끊임없이 기존 입장만 고수하는 해군은 오로지 공권력을 통해서만 반대 측을 대하고 있다. 봉사단을 꾸려 주민 융화에 나섰던 기무사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호전적인 갈등관리법이다. 강정마을에서 주민과 경찰이 대치하는 것은 일상이 돼 버린 지 오래다.

각종 약속과 협의조건을 무시한 사례들도 갈등을 격화시키는데 일조했다. 국무총리실이 2010년 11월 29일 제주도지사에게 보낸 ‘민군 복합형 관광미항 건설 관련 제주도 건의사항 협의결과 통보’ 서한에 따르면 “제주도민의 화합 분위기가 조성될 경우 착공식 개최를 적극 검토한다”고 약속하고 있지만 이는 끝내 지켜지지 않았다. 환경영향평가의 협의 조건을 무시하고 무단으로 사업부지 내 제주토사를 해안으로 유출시키다 적발된 사례, 붉은발말똥게의 서식실태 조사여부 공개도 이뤄지지 않은 채 이식 작업을 시작한 사례 등 해군이 약속을 깬 사례는 한두 건이 아니다.

사실상 이 시점에서 해군은 갈등관리에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기무사는 갈등이 과천 밖으로 퍼져나가기 전에 대화로 이를 막아냈지만 해군은 강정마을 분쟁을 국제적 논쟁거리로 만들어 버렸다. 해군이 해양교통로 안보 등의 이유로 반대 측을 설득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갈등이 제주 밖으로 퍼지기 전 찬성 측 주민보다 반대 측 주민을 진심으로 설득하고 끊임없이 대화하려는 태도를 보였다면 사태가 여기까지 왔을까?

강정문제가 전 세계로 퍼져나간 지금, 해군은 앞으로 더 높은 벽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그 벽을 지금처럼 공권력만으로 넘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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