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까지는 미국은 전쟁을 결심할 수 없다! 국제안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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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조분의 1 확률’의 위기


2020년까지 미국의 국가부채가 15조 달러(1경 6500조원)에 육박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미국 GDP의 100%에 육박하는 수준으로 2차 대 전 이후 가장 높다. 최근 미국의 경제가 다시 회복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지만 향후 의료개혁과 연금 소요의 증가로 2020년까지 미국의 정부 재정은 영 말이 아니다.

아나톨 칼레츠키라는 학자가 2010년에 <자본주의 4.0>라는 책에서 “미국의 국가부채가 GDP 100% 수준에 달할 때까지는 시장경제가 제대로 작동하겠지만 그걸 넘어서면 심각한 상황이 올 수 있다”고 경고한 바 있다. 미국 정부의 재정이 금융과 실물경제를 관리할 수 있는 능력이 소진되기 때문이다. 세금을 더 걷어 빚 갚는데 써야 하는데 의회의 조세저항에 직면하게 되고, 국채 발행도 한계에 달하게 된다.  

물론 민주적 자본주의에 대한 신뢰와 믿음으로 미국의 재정이 파탄 날 가능성을 부정하는 여론이 압도적이다. 그러나 2008~2009년의 부동산과 금융위기도 전혀 예측하지 못한 사안이었다. 2008년 위기 직전까지 경기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이 팽배한 분위기에서 미 연방준비위원회는 “미국에 금융위기가 발생할 가능성은 3조분의 1”이라고 했고, 어느 누구도 이러한 금융위기의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경제에 대한 가장 난관적인 전망이 팽배하던 시기에 그런 일이 일어났다. 게다가 지금은 2020년부터 노령화에 따른 의료비와 연금 소요가 폭증할 것이 확실시 되는 상황이다. 이 소요를 충족시키려면 미국 정부는 금융위기를 극복하는데 투입한 자금의 13배를 추가로 지출해야 한다. 이 때문에 칼레츠키 역시 그의 저서에서 “2010년대 중반에 서방 국가들은 가장 어려운 결정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

‘가장 어려운 결정’ 중에는 정부 지출의 과감한 삭감이 포함된다. 그 핵심은 국방비다. 이미 올해 1월에 오바마 행정부는 ‘두 개의 전쟁’을 포기하고 ‘원 플러스’로 전략을 전환하였다. 이는 미 국방부 역사상 닉슨 대통령의 월남 포기 이후 가장 획기적인 ‘전략적 후퇴’로 인식되고 있다. 이런 재정 위기 상황에서 미국은 과연 해외 분쟁에 개입할 수 있을까? 아직까지 군사적 헤게모니가 확고한 미국에 도전장을 내밀 새로운 패권 국가는 없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미국은 돈 없으면 절대 전쟁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 이유를 과거 사례를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건전한 재정이 곧 국방력


미국의 200년 역사를 돌이켜보면 끊임없이 제기되는 하나의 주제가 있는데, 이는 곧 건전한 재정이 강력한 국방력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점이다. 미 독립전쟁시기의 보급 부족과 탈영에 시달렸던 경험이 조지 워싱턴과 그의 젊은 부관 알렉산더 해밀턴으로 하여금 신생 미국이 미래에도 스스로 방어할 수 있는 충분한 재원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 건전한 재정제도 ▲ 안정적 정부신용 ▲ 예측 가능한 세수가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확신시켜주었고, 이 사실은 오늘날까지 변함없다. 미국의 초대 재무장관이 된 해밀턴은 독립전쟁을 치르느라 네덜란드와 프랑스로부터 돈을 빌렸고 여기서 짊어진 부채를 ‘자유의 대가’라고 불렀다. 그로부터 2세기에 걸쳐서 미국지도자들은 전쟁을 수행할 때 필요한 자금을 확실히 동원할 수 있는 건전한 재정정책과 유능한 재무관료, 그리고 의회 지도자가 필요하다는 인식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이 같은 사실은 미 NSC와 무역대표부, 국무부를 거쳐 골드만삭스 임원으로 있는 로버트 D. 호메츠의 <자유의 대가>라는 책에 잘 요약되어 있다. 그는 저서에서 2차 대전 후 미국의 군사적 성공의 요인을 ▲충분한 세수 ▲국채발행 능력 ▲대규모 무기생산능력이라고 정의하였다.  

지난 전쟁을 분석해 보면, 미국이 위 세 가지 요인이 충족되지 않을 경우 어김없이 전쟁을 포기하거나 개입을 축소하는 정책으로 전환하게 되는데,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은 그 대표적 사례였다. 한편 앤드류 맥이라는 학자는 <왜 강대국은 소규모 전쟁에서 실패하는가?>라는 논문에서 자유민주국가들이 전쟁에 대해 갖고 있는 근본적인 취약점으로 ▲국내 정치적, 경제적 전쟁 비용의 증가 ▲도덕성 논쟁 ▲군사배치의 딜레마로 꼽은 적이 있다. 그의 관점에 의하면 한국전쟁과 베트남전, 이라크 및 아프간 전에서 미국이 휴전협정을 추진하거나 철수한 이유는 ▲이길 수 있다는 확실한 전망 부재 ▲재정적자의 폭 확대 ▲미국 내 전쟁 반대 여론 고조가 그 공통점으로 발견된다. 

한국전쟁은 미국이 빚을 내지 않고 순수한 재정으로만 치룬 최초의 전쟁이며, 그로 인한 재정적자가 가시화되자 서둘러 휴전협정을 체결한 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전의 1, 2차 세계대전 중에 미 국민들은 열광적인 애국주의 분위기에서 정부가 발행된 승리채권, 자유채권을 사들였었다. 부채감축의 원칙이 거의 종교적 신념처럼 준수되던 미국은 2차 대전은 정부부채를 6배 정도 증가시켜서 기록적으로 국내총생산 GDP의 110%에 이르게 되었다. 따라서 한국전쟁에서 더 이상 빚을 낼 형편이 못되었고 오직 정부 재정으로만 버티려 했다. 역설적으로 미국이 재정적자에도 불구하고 2차 대전을 승리한 배경에는 대공항 당시 800만 명에 달하는 실업자를 병력으로 충원하기 용이했고, 50%에 달하는 유휴화 된 산업시설을 효과적으로 동원하여 완전고용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전쟁에서는 이게 통하지 않았다. 전후경제가 부흥하여 동원된 병력과 산업시설들을 빨리 경제로 되돌려 보내야 했다. 1947년 중반이 되자 육군은 1945년의 800만 명에서 100만 명 이하로, 해군은 300만 명에서 50만 명, 해병대는 50만 명에서 10만 명 이하로 감축. 국방비 지출은 1946년의 500억 달러 규모에서 1948년에는 110억 달러로 줄었다. 국방예산의 감축은 1945년의 GDP 대비 37.5%에서 1947년에는 5.5%로 부진한 경제에 따른 세수 감소에도 불구하고 GDP 대비 2%의 재정흑자를 기록하였다. 전쟁으로 미국은 경제를 일으켰으나(2차 대전), 재정 때문에 더 이상 전쟁을 하지 않았다(한국전쟁). ‘승리’라는 목적을 위해 전쟁을 계속 하려던 맥아더를 투르먼이 전격적으로 해임한 그 시기가 바로 휴전협정이 모색되던 시점이었다. 전쟁 지속여부를 결정하는 가장 결정적인 변수는 바로 경제, 그중에서도 정부 재정이었다. 


1년 반 만에 포기한 한국전쟁


그러나 빚 없는 순수 재정으로 진행된 한국전쟁은 1년 반 만에 당시 580억 달러(현재가치 6600억 달러)에 이르는 급격한 전비 증가와 예비 병력의 부족으로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할 경우 심각한 재정 및 안보상의 위기를 경고하는 재앙으로 부각된다. 현재가치로 볼 때 한국전쟁은 이라크전쟁, 2차 대전에 이은 미국 역사상 3위의 규모다. 제2차 세계대전 전 미국의 20년간의 평균 국방비는 GDP의 1% 수준이었으나 한국전쟁으로 인해 냉전기간 동안 GDP의 7.5% 수준으로 상승한다. 국방비는 1949년의 GDP 대비 5% 이하에서 한국전쟁이 종료될 무렵인 1953년에는 14%를 초과하는 상황으로 나아간다.

투르먼은 소련과의 핵전쟁에 대비해야 한다는 NSC-68 보고서를 수용하고 국방예산의 증액을 요청했다. 1950년 10월 중공군이 압록강을 넘어 참전하자 국방비는 1951년에 480억 달러, 1952년에 600억 달러로 증가한다. <자유의 대가>에서는 이에 대해 “한국 전쟁에 참전한 병력의 규모는 제2차 세계대전의 3분의 1 수준이었지만, 그 전쟁은 긴급하고도 대규모 동원이 필요하였다는 점에서 심각한 사태”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취임 초기 아이젠하워는 한국전쟁을 끝내기로 하면서 “국민들은 전쟁에 지쳤다. 특히 전쟁을 끝낼 수 있는 결정적 승리를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아이젠하워는 “이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총동원령까지 내려야 할 지 모른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때 경험했던 통제경제와 경제적인 희생, 즉 배급제의 실시를 의미한다. 문제는 그럴 경우 우리가 우리의 자유경제체제를 손상시키지 않고 얼마나 견딜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맥아더 후임으로 한국에서 유엔군사령관인 리지웨이 장군의 회고록 <한국전쟁>에서는 이러한 상황에서 만주에 대한 폭격을 주장한 맥아더의 무모함과 투르먼, 아이젠하워의 휴전협정이 잘 비견되고 있다. 한국전쟁의 긴급한 전비수요는 전쟁 지속에 대한 두려움을 가중시켰고, 당시 군부로서는 생소한 ‘제한 전쟁’ 개념으로 확전이 제한되었다. 이는 미 국내적으로 투르먼 대통령이 표방한 사회 복지 및 재건 프로그램인 페어딜(Fair Deal) 정책을 좌초시킨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또한 미국 최초로 병력 교대 개념으로 한국전쟁이 수행되어 완전한 승리 없이도 군사지도자 및 전투원이 교체되는 등 전쟁 지속 에너지가 소진되었다. 한국전쟁을 포기한 아이젠하워 대통령 말기에는 정부부채를 국내총생산의 60%까지 낮추었다. 투르먼,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의회의 반대를 무릅쓰고 2차 대전 중 국방비로 인해 사회보장 등 민간지출이 연 11%씩 감소한데 대한 반동으로 급격한 군축을 추진했다.

국채의 조기상환으로 미국 정부의 높은 신용을 유지하는 것은 전후 미국이 슈퍼 파워로 부상하는 가장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하게 된다. 이는 미국은 전후에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정책과 투르먼 대통령의 페어딜 정책 추진의 기반이 된다. 그런데 이런 기조는 베트남 전쟁에서 폭삭 무너진다.

베트남 전쟁의 경우는 미국의 군사정책과 재정정책이 동반하여 실패한 사례로써, 미 정부가 한국전쟁의 교훈을 잊고 재정지출과 국방비 증액을 동시에 추진하여 참혹한 결과를 빚었다고 할 수 있다. 케네디와 그 뒤를 이은 존슨은 아이젠하워의 뉴룩 정책을 포기하고 육군의 강화에 국방정책의 초점을 맞춘다. 1961년부터 1964년까지 육군은 85만 명 수준에서 거의 100만 명 수준으로 증원되었다. 1964년 말 미군의 베트남 주둔 병력은 2만 4천 명 수준이었으나, 1965년 말에는 18만 4천 명, 1968년 말에는 53만 6천 명으로 늘어났다. 그 기간 중 국방비는 50%나 증가하였다.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미군은 연인원 900만 명에 달했는데 육군은 430만 명, 해군이 180만 명, 공군이 170만 명, 그리고 해병대가 80만 명이었다. 계속해서 <자유의 대가>에서는 "존슨 대통령은 만일 경제성장이 건실하게 이루어진다면 증가하는 국방비와 사회정책 예산의 힘든 우선순위 결정 없이도 두 가지를 동시에 추진할 수 있다는 케인즈 방식을 추진했다"고 주장한다. 국방비의 증가가 가속화되자 존슨은 “우리는 베트남에서 전쟁을 하면서 동시에 위대한 사회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수 있다”고 선언한다.


재정파탄, 전쟁 패배, 전략적 후퇴


그러나 실제 예산운영은 국방비 지출은 계속 증가하여 1964년 GDP의 8.5%에서 1968년에는 9.8%까지 증가한다. 비국방 분야의 예산도 증가하여 8.7%에서 9.8%로 증가했다. 존슨 대통령은 1960년대 중반의 건실한 경제성장이 그로 하여금 전쟁과 위대한 사회 정책 사이에서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일은 없게 할 것이라 믿었기 때문에 세금인상 권고를 한마디로 거부하였고, 미국은 전쟁과 번영을 동시에 추구할 수 있다는 믿음을 고수했다. 이런 사고방식은 미국 역사상 가장 허무하고 황당한 국가경영의 실패로 조지 부시 대통령 시절에 재현된다. 계속 늘어나는 전비와 국내예산 그리고 소비수요의 증가는 경제학자들이 말하는 ‘고도 인플레이션’을 일으켜서 과도한 물가상승은 전쟁은 물론 존슨의 위대한 사회 정책도 위험에 빠뜨리게 된다. 바야흐로 전쟁이냐, 복지냐를 선택을 강요받게 되는 것이다.

존슨은 국내정책과 국방정책을 분리하는 의사결정 체제를 고수하여 펜타곤은 국가예산의 전체적인 그림을 파악하지 못하고 전쟁계획을 수립한다. 60년에서 65년 사이의 국방비 지출은 450억 달러에서 500억 달러로 약 11% 정도만 증가한다. 그러나 전쟁이 격화되자 지출이 50%나 증가되어 1968년에는 780억 달러로 늘어난다. 

1967년 8월 초에야「힘들고도 피할 수 없는 현실」이라는 제목의 공식서한을 의회에 보내면서 “증세와 예산삭감을 지금 하지 않으면 예산적자는 280억 달러를 넘을 것이며, 이는 미국에 명백하고도 현실적인 위험을 가져올 것이다”라고 강조하며 “이러한 잘못이 고쳐지지 않으면 파멸적인 인플레이션으로 천문학적인 금리가 불가피하고, 베트남에서 싸우는 장병들을 지원하기 위한 국민의 부담이 불공평하게 배분될 수밖에 없다.”고 경고하게 된다. 베트남에 파병된 병력이 50만 명을 넘은 1968년 중반까지만 해도 전비지출에 대한 지지여론이 높았으나 세금 인상 논쟁이 지속되면서 여론이 바뀌게 된다. 전쟁에서의 승리가 환상에 지나지 않고, 좌절감을 느끼면서 전쟁에 대한 지지도는 떨어진다.

1969년 취임한 닉슨 대통령은 점진적인 전쟁축소정책을 펴서 69년 중반에 2만 5천 명, 그해 말에 9만 명, 70년 봄에는 15만 명을 베트남에서 철수한다. 69년 닉슨의 흑자재정은 조세감면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여 국민들을 납세 부담에서 해방시켰고 국방비 지출을 69년 GDP의 8.7% 수준에서 73년에는 5.9% 수준으로 줄어든다. 그러나 경제적 타격은 이미 시작되어 70년에는 인플레이션이 연 5.5%로 상승했고 아랍과 이스라엘의 73년 욤키푸르 전쟁으로 인한 석유가격의 인상은 인플레이션을 가속화시켜서 그 후 10여 년간 미국 경제는 고난의 시기로 접어든다.

74년 의회는 베트남에서 베트남 주둔 미군 숫자의 상한선을 법으로 정하고 베트남 정부에 대한 군사원조를 중단한다. 이 조치는 베트남 정부 패망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고, 75년 5월 30일 베트남 정부는 공산군에게 접수된다. 베트남전쟁이 끝난 후 70년대에는 국방비가 GDP의 5.5% 수준으로 떨어졌고 일반예산은 급속히 증가한다. 다시 미국의 국정기조는 전쟁에서 복지로 되돌아갔다.


냉전 종식과 동반한 경제위기


레이건 대통령 시절은 미국 역사상 평화 시로서는 군사력을 가장 강화한 시기이며, 냉전을 종식시켰지만 미국의 재정에서는 가장 큰 위기가 도래했던 시기였다. 카터는 재임 마지막 해에 국방비로 1천 600억 달러를 썼으나 레이건은 재임 마지막 해에 카터의 두 배인 약 3천 200억 달러를 국방비로 썼으며, 재임 중에는 국방비로 총 1조 5천억 달러를 지출한다. 이것이 냉전을 종식시켰다는 주장도 있으나 재정적인 면에서의 예산적자와 정부부채는 7천 110억 달러에서 레이건의 마지막 해에는 2조 1천억 달러로 세 배나 증가하는 등 전례 없는 재정 위기에 봉착한다. ‘미국 위기론’이 나타나면서 경제가 회복되기까지 10년을 기다려야 했다. 레이건 시절에는 국방비가 86년 최고점인 GDP의 6.2%까지 증대한다. 비록 베트남전쟁 때의 최고점인 GDP의 9%에는 훨씬 못 미쳤지만 평화 시라는 점이 중요하다.

80년 예산적자는 GDP의 약 2.7%였으나 82년에는 약 4%로 증가했다. 많은 사람들은 적자의 주범이 늘어난 국방비라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치솟은 금리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은 또 하나의 압력으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베트남전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금리가 연 4%였던 데 반해 1982년 기업채권에 대한 금리는 연 10% 수준이다. 1985년에는 예산적자가 GDP의 5%를 상회하고 연방정부 예산의 15%가 정부부채에 대한 이자비용으로 지출되었는데, 1981년에 행한 소득세 감면은 예산적자의 가장 큰 원인이었다.

정부부채의 GDP 대비 비율도 80년 26%에서 89년에는 42%로 증가하였다. 베트남전쟁이 한창일 때도 약 34% 수준이었음을 감안한다면 이는 매우 높은 수치이다. 82년과 84년의 세금인상 그리고 경제성장에 따른 세수증가로 예산불균형은 어느 정도 시정되었으나, 1988년에도 예산적자는 GDP의 3% 수준으로 여전히 높았다.

제1차 세계대전 이래 미국은 세계 최대의 채권국이었으나 레이건 재임 시의 적자예산으로 미국은 세계 최대의 차입국이자 채무국으로 전락하였는데, 이는 미국의 대외수지 균형이 결정적으로 변화했음을 뜻한다. 달러의 높은 금리로 인한 달러가치의 상승은 미국 상품의 국제경쟁력을 약화되었다. <자유의 대가>에서는 “레이건 시대에 국방비가 높게 지출되었다고 할지라도 만일 이 시기에 9․11테가 일어났다면 미국은 경기진작이나 재정의 정상화, 아프가니스탄전쟁, 테러와의 전쟁을 수행할 재정능력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더불어 저자는 “반면 소련의 붕괴는 미국의 국방비 지출을 1980년대 중반 GDP의 6%에서 10년 후에는 GDP의 3%로 떨어뜨리고 그로 인한 막대한 ‘평화배당금’은 90년대 말의 막대한 예산흑자를 가져왔고, 이 흑자로 조지 W. 부시는 2001년 알 카에다의 9·11 테러에 대응할 수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교훈은 매우 중요하다.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느냐의 여부는 평시의 국방비 규모가 아니라 전시에 전비를 조달할 수 있는 능력에 의해 좌우된다. 만약에 전비 조달에 대한 예측이 가능하지 않거나 경제여건이 전비조달에 불리하다면 미국은 전쟁을 수행하지 않는다. 9․11테러와 비대칭전쟁의 도래로 미국의 전비 조달은 예측 가능한 범위를 초월하기 시작하였고, 독립전쟁 이래 미국의 재정적 상황은 가장 심각한 위기에 봉착하였으며, 가장 획기적인 전략적 후퇴를 경험하고 있다.


‘국가 경영 맹인’들의 위험한 장난

이라크전쟁 초기에는 국민들이 전비가 많이 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전비에 대한 검토나 자원배분에 대한 논의가 아예 없었다. 럼스펠드 국방장관은 2003년 2월 ABC 방송에 나와 “전비가 2500억 달러 들 거라는 주장은 터무니없다. 500억 달러면 충분하다”고 호언장담했다. 행정부는 또 전후 복구비용은 아예 제쳐놓고 이라크의 막대한 원유수입으로 그것을 충당할 수 있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월포위츠 국방부 부장관은 인터뷰에서 “이라크 재건비용이 3000억 달러에 달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현실을 제대로 보고 말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이라크는 자체 석유를 팔아서 재건이 가능한 나라다. 미국의 재건비용 부담은 17억 달러를 넘지 않는다. 우리는 역사상 최초로 자체적으로 재건이 가능한 나라와 전쟁을 하려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부시와 의회 내 지지자들은 이라크전쟁과 테러와의 전쟁에 관련된 예산 문제를 아예 무시하였다. 한국전쟁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의 전비는 GDP의 15%, 베트남전쟁의 경우 10%였던 반면 이라크 전쟁 초기에는 4%로 문제조차 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전 세계 동맹국으로부터 전비를 조달하는 유엔 결의 하의 다국적군을 동원하는 91년의 걸프 전쟁을 참고하지 않고 미국 단독으로 이라크 전쟁을 감행하였는데, 이는 전비의 전체를 미국이 감당해야 한다는 현실을 방치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91년 1월 16일 ‘사막의 폭풍’ 작전에서 전쟁비용 610억 달러 중 480억 달러가 다국적군 정부, 특히 쿠웨이트, 사우디아라비아, 일본, 독일, 한국 정부에 의해 현금으로 조달되었었다. 이 나라들은 또 현금 아닌 현물, 즉 장비, 연료, 기타 다른 물자들로 약 60억 달러 상당을 공급하였으며, 그 외에 이라크와의 무역금지로 피해를 입은 인근지역의 가난한 나라들에 원조를 한 바 있다. 9·11 사태에 대응하기 위해 의회는 긴급 안보예산, 인도적 지출과 재건비용으로 400억 달러의 지출을 승인하였으며, 156억 달러를 항공사 보조와 알 카에다와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소탕 예산으로 배정한다.

그러나 최초 예상과는 달리 전비는 계속 증가하였다. 실제로 2003년에 이라크 전쟁에 배정된 예산은 500억불이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이듬해부터 전비소요가 줄어들지 않았다. ‘04년에 564억불로 늘어난 전비는 ’05년 834억불, 06년 981억불로 자꾸만 늘어났다. 이때까지도 조지 부시는 향후 전쟁비용 조달과 재정건전성 확보라는 문제를 종합적으로 고려하지 않고 이라크의 석유가 모든 것을 해결해주리라는 막연한 인식으로 3800억 달러에 달하는 부자 감세를 강행했다. <자유의 대가>에서는 "조지 부시 대통령이야말로 전쟁 중에 감세를 한 유일한 대통령"이며, "200년의 미국 역사에서 금기를 깬 대통령"이라고 평한다. 당연히 재정이 악화되었다. 당시 미 행정부 내에서 전쟁과 국내경제를 종합적으로 연계하여 전략을 구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이어졌다. 즉 미국은 ‘주인 없는 나라’였다. 네오콘의 오만과 독선은 그들 스스로 국가경영으로부터 눈이 멀었다. 2006년 중반이 지나서야 이라크에 대한 전망이 악화된 데 대해 ‘이라크 스터디 그룹(ISG)'이 뒤늦게 구성되었다. 이들의 보고서는 네오콘의 오만을 벗겨냈고, 이에 따라 럼스펠드가 경질되었다. 그러나 때는 늦었다. 이라크에서 발을 빼지 못하는 미국은 ‘07년 1272억불, ’08년 1385억을 전비로 지출하여 이제 이라크는 미국의 재앙이 되었다. 오바마가 집권한 ‘09년에야 920억불, ’10년에 665억불로 줄어들기 시작한 전비는 ‘11년에는 500억불 수준으로 낮아졌다. 총 8000억불(992조원)을 쏟아 부은 셈이다. 여기에다가 아프간 전비로 지출한 4000억 달러까지 더해지면서 재정은 극도로 악화되었다. 그러던 외중에 리먼 브러더스의 파산이라는 초대형 금융위기가 덮친 것이다.

이라크 전쟁과 아프가니스탄전쟁은 국방예산을 01년의 약 3천억 달러 미만(GDP의 약 3%)에서 05년에는 5천억 달러, 06년에는 5천 220억 달러(GDP의 약 4%)로 증가했다. 국내 안보비용 역시 거의 미미한 수준에서 02년에는 양당 합의로 국토안보부를 신설하면서 급격하게 증가하여 06년에는 국방비와 국토안보부의 지출이 GDP의 5%까지 육박했다.


전비조달 체계는 무너졌다

이라크전쟁과 포괄적인 테러와의 전쟁은 20세기에 미국이 치렀던 다른 전쟁과는 구별된다. 9·11 사태 이후 미국 정부는 제1,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당시 지도자들이 재정정책의 우선순위를 조정했던 전례를 따르지 않았다. 이라크전쟁 초기에 의회와 행정부는 전시 자금수요에 입각하여 세제를 다시 검토할 기회가 있었으나 그런 기회를 놓친 것이다. 광범위한 테러와의 전쟁을 위한 군사, 정보, 국내보안 그리고 비군사적인 해외원조 예산조달에 필요한 세제, 재량예산의 삭감, 사회보장비용의 삭감 등 장기적인 재정전략을 종합화하는 능력은 아예 찾아볼 수 없었다.

이라크 전쟁과 금융위기 이후 미국의 경제지표는 2차 대전 후 최악의 상황임. 미 의회예산국(CBO)은 2012년 1월에 2012 회계연도 재정적자로 1조1000억 달러로 추정했고, 향후 수 년 동안 연간 재정적자 규모는 1조달러 선이 지속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실업률은 대선이 치러지는 11월께 8.9% 수준일 것으로 예상된다. 지미 카터 전 대통령과 조지 H.W. 부시 전 대통령이 재선이 실패했던 해의 실업률이 각각 7.5%와 7.4%였던 것과 비교하면 올해 실업률 추정치는 오바마 대통령으로서는 정치적 부담이 아주 높은 수치이다. 미국의 GDP 대비 국가 부채 비율은 약 100% 수준인 15조 달러다. 현재 국채 위기를 겪고 있는 이탈리아의 지난 회계연도 재정 적자는 GDP의 5.6%이며, GDP 대비 국가 부채 비율은 약 120% 수준으로 미국은 이와 거의 같은 수준이다. 버냉키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은 “지금과 같은 (과다 차입에 의존하는) 미국의 재정 기조로는 20년도 채 못 버틸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2013년도엔 현재 100%수준인 국가 부채는 GDP 대비 105%까지 오를 것으로 IMF는 전망하고 있다.

미국의 재정적자를 보전하는 방법은 조세와 채권이라고 할 수 있는데, 미 정부는 현재 9조 달러의 채권을 발행하였고, 이 중 절반을 외국 투자가나 외국정부가 매입하였다. 미국의 최대 채권국은 27%를 보유한 중국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약소국은 전쟁 비용이 얼마냐에 상관없이 사활을 건 전쟁을 수행할 수밖에 없는데 반해, 미국은 전쟁 비용에 따라 전쟁의 지속 여부를 결정하는 국가다. 조세 정책으로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하기 어렵다면 앞으로는 국채발행이나 동맹국에 의한 전비 분담의 정책으로 선회할 수밖에 없으나, 현재 전 세계적인 금융위기는 미국의 동맹국들이 특히 어려움을 겪는 분야이기 때문에 이 역시 가장 어려운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증세의 경우 미 공화당은 여전히 회의적이고, 동맹국에 대한 안보지원에 대해서도 예전에는 민주당이 반대했으나 최근에는 공화당이 더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있다. 국방비 감축의 가장 치명적인 영향 중 하나인 방위산업체 가동률 유지도 최근에는 매우 어두운 전망이다. 이는 세계 최대의 병참국인 미국의 위상에 매우 치명적인 영향을 줄 것으로 예상된다. 록히드마틴과 보잉과 같은 미국의 방위산업체는 펜타곤으로부터의 소요물량이 30% 이상 축소되면서 대규모 감원을 하고 있고, 해외에 무기를 팔지 못하면 자체 존립조차 위태로운 상황이다. 미국의 현존 군사력의 전쟁대비태세 역시 매우 심각한 상황이다. 각종 전쟁 피로 증후군이 확산되고 군대 혐오증이 기피되었으며, 노후 장비 정비가 적체가 증가되면서 전투수행능력에 이상 징후가 나타났다.

‘2개의 전쟁’은 이제껏 미국의 국방력이 지닌 상징이자 표상이다. 에드워드 기번이 집필한 <로마제국흥망사>에는 로마 제국이 하나의 전쟁 원칙으로 천년이 지속되었던 데 반해 미국은 2차 대전에서 유럽과 아시아에서 동시전쟁에 승리함으로써 초강대국의 위상을 갖추게 되었다. 소련과 같은 적대국이 없는 상황에서 두 개의 전쟁 원칙을 포기한다는 것은 후기 산업사회에서 미국의 초강대국 지위를 포기하는 것으로 인식될 수 있다. 즉 로마의 원칙으로 되돌아감으로써 미국도 ‘생존’을 안보정책의 제 1의 원칙으로 삼는 고립주의로 회귀하는 것이다. 이는 미국의 하드파워만이 아니라 소프트파워까지 잠식함으로써 향후 범세계적으로 급속한 힘의 공백과 더불어 세력균형의 변화까지도 예견케 하는 것이다. 적어도 이런 전략 조정이 이루어지는 2020년까지 미국은 전쟁을 수행할 능력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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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월간 군사전문지 <디펜스21+> 편집장, 한겨레 군사사이트 <디펜스21> 전문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