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난 여자, 남은 여자 태평육아

작년 어느 가을 밤,  여느 때처럼 젖을 물려 애를 재우는 것으로 하루 마감씬을 끝냈다. 보통은 젖을 물림과 동시에 나도 곯아 떨어지지만, 가끔 홀로 깨어있는 시간을 갖으려 잠에 들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혼자만의 시간, 외로운 시간을 갖는 것은 누구누구의 엄마라는 종속적 존재가 아닌  자연인 '나'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일종의 리추얼(ritual) 같은 거다. 그날은 일부러 노력한 것도 아닌데, 또렷이 깨어있었다. 마감을 겨우 끝냈는데, 웬지 한 테이크를 더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TV를 틀었다.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배경으로 틀어 놓은 것이었다. 마침 배경답게 음악 프로그램 <라라라>가 나오고 있었다. 배경으로는 최고였다. 그런데 갑자기 배경은 배경이기를 거부하는 듯 하더니 배경 속에서 ‘그녀’가 걸어 나왔다. 나는 무방비적으로 그녀의 치명적인 매력에 빠져버렸다. 세상에... 저렇게 매혹적인 사람도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그 길로 인터넷에 들어가 그녀의 CD를 샀다. 그녀가 속한 그룹은 팝재즈그룹 윈터플레이, 그녀는 바로 재즈보컬리스트 혜원이다.





1c9ebc67b0e63c9fb02cd19130375e47. » 출처: 윈터플레이 홈페이지



그렇게 나는 한밤 중에 홀린 듯이 혜원을 사랑하기 시작했다. 가끔 여자, 그리고 재즈에 빠지곤 한다. 서영은, 말로, 나윤선 등이 그랬다. 그런데 혜원처럼 외모를 보고 빠져보긴 처음이다. 큭!  왜 그럴까? 모르겠다. 그냥 좋다. 푹 퍼져있는 나에 대한 대리만족일까? 설명은 필요없다. 그냥 일단 빠진 김에, 아예 젖어버리고 싶다는 마음뿐... CD를 들으면서 점점 그녀를 욕심내기 시작했다. 콘서트에 가고 싶어진 거다. 그런데 쩝! 애 딸린 신세(!)에 무슨 공연... 주위에 널린 영화관에 못 간 지도 벌써 몇 년째였다.



그런가 꿈인가 생시인가? 그렇게 꿈에 그리던, 그녀가 제 발로 우리 동네에 온단다. 우리동네에 있는 ‘어울림누리’에서 아침 콘서트를 하게 된 거다. 이런 걸 운명적 만남이라고 하던가!!! 간만에 가슴이 떨려본다.ㅋㅋ 게다가 생협이 회원들에게 관람료의 일부를 지원해, 단돈 만원이면 혜원을 볼수 있게 된 것이다. 아침부터 웬 콘서트? 그것도 재즈콘서트라? 좀 생뚱맞긴 했지만, 새벽 댓바람이라면 어떠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냥 보고 싶어 공연에 가는 건 고3때 서태지 이후로 처음인 거 같다.



그런데 애가 문제다. 가장 큰 난관이 떡하니 버티고 있었지만, 티켓부터 신청했다. 그토록 보고 싶은 그녀 아니었던가?



f70af43681543baca99fd5f7932f6833.먼저 질러놓은 다음, 대책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데리고 갈까?’도 잠시 생각해봤다. 그런데 알아보니 7세 미만 아기는 데리고 들어갈 수 없다고 했다. 아니, 그럴 수 있다고 해도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녀를 만나러 가면서 그렇게 구차해지기 싫었다. 홀가분하고 자유롭고 싶었다. 1번안 폐기! 이웃집 언니한테 맡길까? 같이 가자는 것도 아니고, 혼자 공연보러 가면서 애 맡긴다는 거 좀 이기적이다. 2번안도 아웃! 남은 카드는 남편 밖에 없었다.



그런데 걸리는 게 좀 있었다. 얼마 전 남편이 직장동료들과 영화보고 들어왔다고 바가지를 좀 긁었기 때문이다. '아..그때 후하게 인심 쓰는 척 좀 할걸...' 그래도 마땅한 대안이 없어서 조금 뻔뻔해지기로 했다. 약간의 뻥을 보탰다. 생협 마을모임에서 단체로 윈터플레어 공연에 가기로 했으니, 오전에 휴가를 내고 아이를 봐달라고 했다. 남편은 그러겠다고 했다. 남편은 내가 혜원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 날이 되었다. 새벽부터 눈이 번쩍 뜨였다. 11시 공연인데, 새벽 댓바람부터 일어나 목욕재개하고, 머리를 정성스럽게 드라이했다. 늘어진 면티셔츠를 벗고, 대담한 프린트 원피스를 입었다. 원래는 원피스 안에 레깅스를 신거나 했는데, 과감하게 레깅스를 벗고 원피스만 입었다. 원피스가 무릎 위로 약간 올라오지만, 나름 하의실종이다. 남편이 “그러고 나가려고?” 묻자, “엉… 비 오니까 거추장스러워서….” 라고 답했다. 사실은 그녀에 대한 내 나름의 예의같은 거였다.ㅋㅋ



9a42f53ab9c67f64d4184e9e9717402d.아침부터 누가 음악회에 오겠어? 게다가 비도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폭우로 전국 곳곳에 물난리가 난 상황이었다. 이렇게 심란한 마당에 한가하게 공연을 즐기자니 약간의 양심의 가책이 느껴졌다. 집에 두고온 남편과 아이도 잠시 걸렸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어설픈 착한 마음과 현실은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그 큰 공연장에 띄엄띄엄 두 세 사람씩 앉아있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런데 거기에 나 같은 아줌마가 천명은 넘게 앉아있었다. 심지어 머리 쪽지고 오신 할머니까지 계셨다. 간혹 아내를 따라나온 남편도 있었지만, 거의 여인천하였다. 여기 숨통 트이기를 원하는 많은 엄마들, 아니 여성들이 있었다.



무대에 불이 꺼지고, 그녀가 무대 위로 걸어 나왔다. 어머나... 아주 비현실적으로(!) 예쁘고 아름다웠다. 옆에 트럼페터이자 리더인 이주한씨가 작다 보니 상대적으로 혜원은 더 커보였다. 둘이 나란히 서면 백설공주와 난장이를 연상시키는, 그 순간 그녀는 판타지였다. 혜원의 외모뿐만 아니라 혜원의 절제된 목소리, 표정, 손짓은 나를 더 설레이게 했다. 거의 제자리걸음 수준으로 움직이는 발동작과 절제된 손짓과 애드립만으로 섹시할 수 있다는 걸 보여 주었다.



나는 참지 못하고 혜원에게 “예쁘다!”라고 소리를 질렀다. 내 전매특허라고 할 수 있는 특유의 리액션뿐만 아니라 스캣까지 따라했다. 그녀가 커튼 뒤로 사라지자 “앵콜~”을 외쳐 다시 불러냈다. 그녀는 생각지도 못했다면서, CF음악으로 유명한 '버블송'을 불렀다. one two three four, bubble bubble, sweet love, sweet dream, bubble bubble. 노래가 끝난 후 그녀는 정말 거품처럼 사라졌다. 노랫말처럼 사랑과 꿈을 남기고 사라졌다. 한 여자는 사라지고, 한 여자는 남았다. 남은 여자는 현실, 지극한 현실, 소율이 엄마로 돌아왔다. 음...이게 꿈은 아니겠지?



출산장려 정책 입안자들에게 제안한다. 애 딸린 엄마들을 위해 한 달에 한 번 수준 높은 공연과 공연 보는 동안에 아이를 맡길 수 있는 보육서비스, 그리고 맛있는 커피 한 잔을 제공하라! 숨통이 트여야 그 다음 애를 갖던지 말던지 할거 아닌가? 다음 선거에 그 공약 내거는 지자체장에게 내 소중한 1표 무조건 행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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