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으로 스미는 ‘문화도시 재생’의 온기 마을을 찾아서

청주 안덕벌의 ‘동네 예술가들’ 
쇠락해가던 골목에 깃들어 작업

거대한 ‘문화예술 기지’로 탈바꿈한 청주시 내덕동 옛 연초제조창(담배공장)과 동부창고(담뱃잎 창고). 이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가 서서히 주변 골목으로 번져가고 있다. 지역 예술인들이 주변 골목 곳곳에 자리잡고 활동하면서, 쇠락해가던 동네가 활기를 되찾고 있는 것이다.

옛 연초제조창 부근 내덕2동 뒷골목에 터를 잡고 활동 중인 20여명의 ‘동네 예술가’들이 대표적이다. 내덕동 지명은 안덕벌을 한자로 적은 것이고, 안덕벌은 안텃벌이 변한 것이다. 담배공장이 문 닫은 뒤 빈집이 늘며 쇠락해가던 안덕벌 용사태마을(안덕벌로 49번길 언덕) 골목이다.

청주 안덕벌 용사태맘을 언덕길의 벽화.
청주 안덕벌 용사태맘을 언덕길의 벽화.

이 골목에 변화의 바람이 시작된 것은 지난해, 각 지역에서 활동하던 20~40대 화가, 조각가, 문화기획자, 연주자, 지휘자, 전통복식 연구자, 서예가 등이 빈집을 찾고, 가게를 얻어 입주하면서부터다.

자칭 ‘동네 예술가’인 이들이 작업하며 모임을 여는 창작·전시 공간 ‘드로잉 하우스’가 먼저 들어섰고, 올해 초엔 옛 방앗간 자리에 수시로 연주회·전시회를 여는 찻집 ‘커피방앝간’(‘커피방아트간’의 줄임말)도 문을 열었다. 자그마한 전시장 ‘꽃이 피는 갤러리’도 개장했다. 이 갤러리는 식당 ‘꽃이 피는…’의 차고였는데, 주인이 동네 전시 공간으로 내준 것이다. 이곳에선 지금, 속담을 테마로 그린 전시회 ‘속담속닥전’이 열리고 있다.

차고를 활용해 문 연 ‘꽃이 피는 갤러리’.
차고를 활용해 문 연 ‘꽃이 피는 갤러리’.

동네 예술가들은 골목 곳곳에 조각 작품들을 설치하는 한편, 담벼락에도 그림 그리고 화분과 연탄재에도 그림을 그려 골목 분위기의 변화를 꾀하고 있다. 주민 참여를 위해 예술의거리상인회·내덕자연시장상인회·도시재생추진위원회 등과 법인 ‘예숨뛰내’(예술이 숨쉬고 뛰노는 내덕동)를 설립하고, 마을 주제가 ‘예숨뛰내 아리랑’도 만들었다. 문화기획자이자 드로잉하우스 주인인 조송주(48)씨는 이를 “예술이 골목과 주민들 일상 속으로 스며들게 하는 작업”이라고 했다.

안덕벌 ‘동네 예술가’들의 작업장 ‘드로잉 하우스’ 담장을 장식한 연탄재 그림.
안덕벌 ‘동네 예술가’들의 작업장 ‘드로잉 하우스’ 담장을 장식한 연탄재 그림.

‘헌마을 프로젝트’도 벌였다. 새마을운동 이후 ‘헌마을’이 되어 방치된 ‘새마을’에 재생의 숨결을 불어넣자는 기획이다. 그러나 용어가 걸림돌이 됐다. 조씨가 말했다.

“근대문화재 탐방 행사인 ‘청주 야행’ 때와 연초제조창에서 열린 세계문화대회 때 ‘헌마을 깃발’ 20여개를 설치하고, ‘헌마을 점포 재생 프로젝트’ 현수막도 걸었죠. 그러자 새마을운동협의회 사람들이 강력히 철수를 요구해왔어요. 결국 내려야 했죠.” ‘헌마을 깃발’ 일부는 ‘꽃이 피는 갤러리’에 전시돼 있다.

동네 예술가들은 골목의 빈집과 예술가를 연결해주는 작업도 추진 중이다. 지휘자이면서 카페방앝간을 운영하는 유용성(32)씨는 “불타는 열정을 가졌으면서도 정착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예술인들이 많이 입주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안덕벌 ‘동네 예술가’ 조송주씨가 ‘헌마을 기’를 보여주며 ‘헌마을 재생’의 뜻을 밝히고 있다.
안덕벌 ‘동네 예술가’ 조송주씨가 ‘헌마을 기’를 보여주며 ‘헌마을 재생’의 뜻을 밝히고 있다.

뜨개실 가게 겸 전통찻집 겸 식당인 ‘동이 뜨게 찻집’.
뜨개실 가게 겸 전통찻집 겸 식당인 ‘동이 뜨게 찻집’.

주민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면 골목 어귀의 ‘동이 뜨게 찻집’이나 대성이용원에 들르면 된다. ‘동이 뜨게 찻집’은 뜨개용품을 팔며 전통차·음식도 내는 찻집 겸 식당이자 동네 아주머니들의 수다방이다. 27년 된 옛날식 이발소 대성이용원은 동네 어르신들이 이발하고 면도하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펼치는 장소다.

초등학교 때부터 용사태마을에서 살고 있다는 대성이용원 주인 민병수(72)씨가 말했다. “내가 새마을지도자를 한 15년 했어요. 담배공장 이사 가고 나서 동네가 거의 망가졌지만, 주민들 정은 그대로 살아 있어요. 협력도 잘되고.” 민씨는 베트남전쟁 참전용사로, 고엽제 피해자이기도 하다.

안덕벌 용사태마을의 커피숍 ‘카페방앝간’. ‘동네 예술가’들과 주민이 모여 이야기 나누는 사랑방이다. 옛 방앗간 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안덕벌 용사태마을의 커피숍 ‘카페방앝간’. ‘동네 예술가’들과 주민이 모여 이야기 나누는 사랑방이다. 옛 방앗간 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이 동네엔 ‘안덕벌 떼과부’ 이야기도 전해온다. 한국전쟁 때 ‘보도연맹사건’으로 끌려간 뒤 돌아오지 못한 이들이 40여명이나 됐다고 한다. 남편을 잃고 혼자 힘으로 자식들을 키워야 하는 어머니들의 고된 삶터였다. 어머니들은 콩나물을 키우고 두부를 만들어 남주동 시장에 내다 팔았는데, 그 행렬이 매일 새벽 언덕길로 이어졌다고 한다. 키운 자식들은 연좌제에 묶여 취업하기도 어려웠다.

‘꽃이 피는 갤러리’ 앞에는 남성 조형물이 하나 서 있다. 꽃을 든 채 언덕길을 하염없이 내려다보고 있는 ‘순정맨’(김원근 작)이다. 서울 필동 골목에 세워진 꽃을 든 ‘순정맨’과 같은 모습의, 같은 작가가 만든 작품이다. 필동의 ‘순정맨’은 ‘차도녀’(차가운 도시 여자)를 기다리는 우직한 남자 모습이지만, 이곳 순정맨은 다르게 느껴진다. 힘겨운 삶을 산 이 마을 어머니에게 바칠 꽃을 들고 선 아버지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청주/글·사진 이병학 선임기자 leebh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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