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전선, 넘을 수 없는 선 녹색 여행자

자병산에서 동해시로 하산했다. 무서운 국도를 어찌 또 통과할까 걱정했는데, 백봉령 옛길 표지판이 있어 그곳으로 내려왔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지 않은 탓에 길은 잡목이 우거져 있었다. 어느 노래의 가사처럼 ‘숲길을 헤치고’ 내려온 것이다. 

삭막했다. 도시에 다가가면 갈 수록. 특히나 도시 외곽인 탓에 더 그랬다. 차량들의 속도는 빨랐고 인도는 좁았다. 거대한 시멘트 공장은 자병산의 아픔을 떠올리게 했다. 빠른 걸음으로 재촉했다. 유하와 나 사이에는 “버스 탈까?”, “아니” 라는 질문과 답이 몇 번이나 오갔다.

서울에서 정한 우리의 계획은 자병산에서부터 백두대간을 타고 북쪽으로 향하는 것이었다. 설악산 대청봉까지. 그곳에서 케이블카 건설을 반대하는 퍼포먼스를 하고 내려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5월 11일까지는 산불조심 기간으로 국립공원 구간을 통과할 수 없고, 더군다나 4월까지도 눈이 녹지 않을 것이었다. 현실을 감안하지 않고 ‘책상’에서 계획을 세운 셈.

속초에는 꼭 가고싶었다. 이유는 유하에게 속초에 사는 박그림 선생님을 꼭 소개시켜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의 멘토이자 ‘완전’ 존경하는 박그림 선생님. 그래서 백두대간은 못가더라도 속초엔 꼭 가자고 제안을 했고, 어차피 또 내려오는 것이라면 올라갈 땐 버스를 이용하자는 쪽으로 결론이 나게 된 것이다. 거기에 더해 속초까지 가는 거라면 통일 전망대까지 보는 것이 낫겠다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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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을 다 내려온 곳에는 석회석을 가공해 시멘트를 만드는 공장이 많았다. 자병산은 저 공장에서 분해되고 갈려져 도시를 건설하는데 사용된다.


동해시 도심이 시작되는 구간에 도착했다. 그러니까 ‘동해시’에 도착한 것이다. ‘버스 모드’로 전환하는 것에 서로 동의를 한 뒤 버스 터미날로 향하는 시내버스를 탔다. 터미날에서는 다시 강릉으로, 그곳에서 간성으로 가는 버스로 옮겨탔다. 고속도로를 신나게 달리고 있는데, “아 맞다. 우리 고속도로는 이용 안하기로 했지?!” 서울에서 정한 우리의 원칙들이 몇 개 있었다. 그 중 차를 타더라도 고속도로로 가는 것은 피하자고 했던 것이다. “어쩔 수 없다” 라며 눈을 감아버렸다. “다음에라도 잘 지켜야지!”

간성은 통일전망대와 딱 하루 거리에 있었다. 간성에서 하루 잔 뒤 통일전망대에서 출발한다면 또 간성으로 오는 것이다. 그래서 숙소에서 이틀을 묵기로 결정했다. 통일전망대에서 간성까지는 빈 몸으로 걸을 수 있게 말이다. 이런 결정을 하게 된 데에는 유하의 달거리 시기가 왔기 때문이다. 며칠 만이라도 편한 잠자리가 필요했다.

다음날 아침, 시내버스를 타고 통일전망대로 향했다. 버스는 출입신고소 바로 전 마을인 대진리까지만 갈 수 있었다. 종점에서 출입신고소 까지는 700m. 멀지않았다. 그런데 곧 큰 문제에 봉착했다. 걸어서는 통일전망대에 갈 수 없고 꼭 차량을 이용해야만 했다. 우리처럼 아무것도 없이 오는 사람들은 알아서 카풀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몇 번의 카풀 시도가 실패했다. 평일 아침이라 차량이 몇 대 없는데다가 다들 만석이었다.

다시 신고소로 돌아가 따져물었다. “이게 언제부터인가요? 원래 셔틀같은건 없었나요?”, “7~8년 전까지는 셔틀버스를 운영했는데. 이용객이 적어서 없앴습니다.”, “그럼 차 없는 사람은 어떻게 하라는 거죠?”, “택시를 이용하는 방법도 있어요”, “그건 얼마죠?”, “왕복하고, 관람하는동안 기다리고 하는데 4만원이에요.”

눈은 휘동그레지고 뒷골엔 전기가 찌릿찌릿 했다. 이용객이 없어 셔틀을 없앤 것 까지는 이해가 되었다. 그렇다면 빈 몸으로 온 사람들을 위해 카풀을 소개해 주는 등 방법을 마련을 해 놨어야 아닌가. 그저 “걸어가시는 건 불가능하시구요. 꼭 카풀을 하셔셔 들어가야 합니다.”라는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같은 시내버스를 타고 온 한 아저씨는 자가용을 몰고 온 사람들에게 카풀을 부탁하기가 부끄러웠는지 다시 돌아가 버렸다. 

그곳 직원과 이런 저런 얘기를 하던 도중에 다른 창구에서 할아버지 한 분이 신청서를 내밀고 있었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저기 저희가 차가 없어서 그런데 빈자리가 있으면 태워주실 수 없을까요?” 라고 물었다. 창구의 직원들은 나의 큰 목소리에 일제히 집중했다. 시선은 할아버지에게 모여진 상태. “그.. 그러죠..”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신청서를 받던 직원이 다시 신청서를 내밀며 우리의 이름을 추가하라고 했다.

할아버지는 할머니와 차를 타고 여행하는 중이었다. “어제 동해를 타고 올라왔어요. 부산에서 왔거든요.” 우리 어머니 생각이 났다. 이토록 멀리까지 가는 것은 아버지도 어머니도 ‘관광’이외에는 없었다. “대단하시네요! 이렇게 두분이서.” 내가 말했다. “우리는 젊을 때부터 이렇게 놀러 많이 다녔어요”

할아버지는 국가유공자라고 했다. 베트남전에 참전한 경력으로 유공자가 됐다고 한다. 군대에서 21년간 근무를 한 뒤 제대했다고. 아들도 장교라서 아들을 면회하러 이곳저곳 안다녀 본 곳이 없다고 한다. 우리가 가고 있는 이 통일전망대 근처에서도 근무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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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일전망대 내에 있는 '마지막 화장실'. 자연은 끊임없이 이어져 있지만 한국인은 이곳에서 마지막 '볼 일'을 봐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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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일전망대 통일관. 사람들은 각자의 시선으로 북쪽을 바라본다. 


차는 민간인 통제선을 통과했다. 곧 군 초소가 나와 우리를 막아섰다. 신청서를 내미니 통행증을 주었다. “돌아오실 때 반대편 쪽에 돌려주시면 됩니다.” 군인의 말이다. 래이밴 상표의 선글라스를 하나같이 끼고 있었다. 다들 앳된 얼굴이다. 스물 한 둘의 청년들.
도로 중간중간에는 도로를 차단하기 위한 네모나고 거대한 콘크리트 돌들이 올려져 있었다. 단단히 고정 돼 있긴 하겠지만 우연히 차 위로 떨어지는 상상을 했다. ‘그럴 일은 없겠지’. 유하에게 설명했다. “전쟁이 나면 북한 지상군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저기 저 밑 받침 같은 걸 폭파시켜서 저 커다란걸 떨어뜨려 도로를 막아버리는 거야.” 나도 누구에게 들은 건 아니고 그럴 것 같았다.

한산했다. 목적지라고 할 수 있는 전망대로 향했다. 안내판에 그저 ‘북한관’이라고만 되어 있어서 하마터면 다른 곳으로 갈 뻔 했다. 흰 색의 전망대 아래에는 ‘마지막 화장실’이라고 표기된 화장실이 있었다. ‘마지막’이라는 단어가 진짜 ‘마지막’처럼 느껴지는 것은 그리 흔한 건 아닌 것 같다. 화장실을 기념으로 찍긴 또 처음이다.

전망대 1층에 들어서자 ‘통일노력의 발자취’라는 큰 안내판이 붙어 있었다. 연도별로 북한과 교류와 관련된 내용들이 일목요연하게 꾸며져 있다. 가장 오른쪽, 그러니까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뒤의 ‘업적’을 본 뒤 웃음과 한숨이 동시에 쏟아져 나왔다.

김대중 대통령 정권에 ‘대북 포용정책’을 발표한 뒤 금강산 관광선이 출항하고 6.15 남북공동선언이 이어졌다. 경의선과 동해선, 도로도 연결되었다. 물론 이런 일들이 있는 와중에 두차례의 연평해전이 있기도 했다. 남북간의 따뜻한 시기는 노무현 대통령 정권까지 이어지는데 개성공단이 착공되고 아테네 올림픽에 공동입장을 했다. 결국엔 10.4 선언을 이루어 냈다. 

충격적인 것은 이명박 대통령 취임 이후다. 금강산 관광객이 총격으로 사망하는 것을 시작으로 남북 육로가 차단되기도 하더니 결국 북한이 연평도 포격을 감행하기에 이른다. 앞선 두 대통령은 북한과 합의하여 6.15, 10.4 선언을 한 반면에 이명박 대통령은 ‘3대 공동체 통일구상’을 제시 했다고 나와있다. 물론 이는 남한의 일방적인 ‘구상’이다. 누가 평화를 위해 정책을 펼쳤는지 명확히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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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일관 내에 있는 역대 대통령의 '통일 업적'들. 시계는 거꾸로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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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곳에선 모두가 통일을 애타게 기원한다. 저 '장벽'이 허물어지길 바란다. 사람들은 자연스럽지 않은 이런 '통제'에 익숙하지 않다.


안쪽으로 들어갔다. ‘북한의 현실’을 전시해 두었다. 신발이나 복장, 가사용품들이 많았다. 다소 촌스럽긴 했지만 ‘사람 사는 것 다르지 않다’는 걸 보여주는 듯 했다. 심지어 집에서 쓰는 여러가지 형태의 가위를 전시해 놨었는데 ‘전시용품이 얼마나 없었으면’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리고 그곳엔 진짜 ‘전국’지도가 나와 있었다. 남한만 나와있는 지도는 뭔가 답답한 느낌이 있었는데, 이 지도를 보니 왜 내가 그렇게 느꼈는지 감이 왔다. 어찌나 시원시원한지 올려다 보는데 목이 아플 정도였다. 강원도는 정말 넓어서 경기도와 황해도를 합한 것만큼이나 컸다. 내가 이렇게 느낄 수 있었던 이유는 휴전선을 가는 점선으로 표시를 해 두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도의 경계를 검정선으로 진하게 그어놨다. 개념찬 지도였다.

2층의 전망대로 향했다. 여러 관광객들이 북쪽의 풍경을 즐기고 있었다. 군대에 대해 잘 아는 이는 함께온 여성에게 GOP와 GP의 차이를 설명하기도 했고, 어떤 이는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 멀리엔 금강산이 보였고, 아래에는 조용한 해변과 남북을 잇는 새 도로와 철로가 잘 닦여져 있었다. 

‘끼룩, 끼룩~’ 멀리서 갈매기 소리가 들렸다. 남쪽에 있는 갈매기일까 북쪽에 있는 갈매기일까. 그에겐 어느 쪽에도 어느 곳에서도 상관없이 ‘끼룩~ 끼룩~’ 거릴 것이다. 순간 코 끝이 찡해진다. 한 때는 저기 저 보이는 도로로 금강산 관광객을 실은 버스행렬이 지나다녔지만 지금은 잠잠하다. 뱃길도 마찬가지. 누가 무엇을 위해 도대체 왜 끊어놓은 것일까?!

유라시아 자전거 여행을 하며 가장 신기했던 느낌이 바로 국경을 넘는 것이었다. 티베트에서 네팔로, 네팔에서 인도로, 인도에서 파키스탄으로, 파키스탄에서 이란으로, 이란에서 터키로... 그곳에는 엄격한 검문 절차는 있지만 통과는 할 수 있었다. 심지어 네팔과 인도는 상호국가간에 자국민들은 여권이나 비자없이 자유롭게 드나들었다. 여행 뒤 만난 사람들이 가장 궁금해 하는 것도 그런 국경을 어떻게 ‘자전거를 타고’ 넘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EU에 가입된 국가간에는 아예 출입국 절차가 없다.

“옛날에는 국경이 없지 않았을까?” 내가 말했다. 유하도 수긍을 했다. “옛날에는 아마 좀 걷다보면 언어가 바뀌었을거야. 큰 고개를 넘거나, 큰 강을 건너거나 했을 때” 우리가 걸을 때도 경계는 없었다. 경기도에서 강원도로 넘어갔을 때나 원주에서 제천으로 넘어갔을 때나. 그저 이 마을에서 저 마을간의 이동이었다. 끊임없는 자연의 이어짐 속에 사람들도 그에 따라 서서히 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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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멀리 금강산이 보인다. 얼마간 저곳 일대를 여행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통제된 상태다. 


국경같이 딱 잘라 놓는 것은 극히 인간만의 기준이다. 더군다나 우리 눈앞에 펼쳐진 이 경계는 반자연의 극치이다. 자연은 이어짐 속에 수많은 생명들이 교류를 하고 그 속에서 변화를 하고 또 변화를 하는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문화라는 것이 어떤 경계를 기준으로 확 변하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바뀐다. 사람들은 그 사이를 통과하며 교류하여 좋은 것은 배우고 나쁜 것은 버릴 것이다. 지금은 이렇게 뚝 잘라놓았다. 고립되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래서 이것을 어떻게 통과하는지 정말 궁금한 것이다. 자연은 비행기를 타고 뚝 떨어지지 않았다.

나오는 길에는 전쟁 체험전시관을 들렀다. 유하는 ‘전쟁 체험’은 하기 싫다며 손사래를 쳤다. 나는 뭐가 전시가 되어있나 싶어 들어갔다. 표지판에 적힌 ‘어린이들에게 매우 인기가 있다’는 글귀가 눈에 띄었다. 사람을 죽고 죽이는 전쟁이 아이들에게 인기가 있다니! 세상 참 다시 살고 볼 일이다. ‘무료’라는 글씨를 굵고 붉게 표현해 놓았다. 꼭 ‘전쟁 체험 무료’인 것처럼 보인다.

전시관 앞은 전쟁터를 재현한 소리가 요란했다. 기관총 소리가 들린다. 그 총알 한 발 한 발은 사람 목숨을 하나 하나 뺏을 수도 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6.25 전쟁’의 참상을 알리는 사진들이 전시돼 있었다. 참혹함 그 자체. 그 사진 중에는 남한군인지 북한군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수백명을 한번에 학살하는 장면도 있었다. 절규하는 사람들의 모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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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5 전쟁체험전시관' 안내판. 전쟁은 엄청난 살육을 부르는 최악의 행동이지만 '어린이들에게 매우 인기가 있다'고 홍보한다. 인간의 잔인함을 다시금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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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구부터 전쟁의 처참한 모습들이 전시돼 있다. 누군가는 이런 전쟁을 막으려면 군사력을 더 키워야한다고 하고, 누군가는 모두가 총을 내려놓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총을 드는 일과 놓는 일, 어떤 것이 전쟁을 막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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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된 전투장비들이 말끔한 상태로 전시돼 있다. 지금 전쟁에 사용한다 하더라도 문제가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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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념품 상점에는 가장 눈에 띄는 곳에 어린이용 군복을 진열해 놓고 있다. 학도병도 모자라 소년병을 양성하려는 의도일까. 아이들에게 전쟁의 극악무도함을 가르쳐야 할 어른들이 도리어 전쟁을 흥미거리로 취급하고 있다. 어른들의 인식이 변하지 않는 이상, 전쟁은 멈추지 않을 것 같다.


전쟁에 사용된 용품들, 총을 포함해 칼같은 무기류부터 군복이나 물통같은 일상용품들도 다 있다. 전차나 탱크같이 큰 것들은 ‘아이들이 좋아하는’ 프라모델류로 대체 전시되어 있었다. 북쪽의 무기나 남쪽의 무기나 모두가 죽이는 데 이용하는 것들이었다. 여기까진 전쟁의 참상을 볼 수 있어서 나름대로 좋았다. 그런데 기념품을 파는 곳에서 눈이 동그레졌다.

유치원생에게나 맞을 만한 군복을 팔고 있었다. ‘유아용 군복’인 셈이다. 그걸 입고 있는 마네킨은 즐겁게 웃고있었다. ‘대체...’. 전쟁의 참상을 알리고 전쟁을 막기위한 전시관이 아니라 아이들을 전쟁에 대한 감각을 무디게 만들고 즐기도록 하려는 전시관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무렇지도 않게 그걸 판매하는 사람들이 신기하게 보였다.

차를 타고 나올 때, 할아버지는 속도를 늦추었다. 뒤따라오던 버스는 빵빵거리며 추월했다. 길 가를 뚫어져라 쳐다보신다. 그리고 ‘아...’하는 한 숨. 들어올 때 빠르게 지나쳤던 ‘동해선 도로 남북 출입사무소’로 우회전했다. “저기 한 바퀴 돌아보지머. 안된다고 하면 나오면 되고”.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경비를 서시는 분이 제지를 한다. “들어가시면 안됩니다”

할머니께서 할아버지께 묻는다. “금방 그 사람 빨개ㅇ.. 거.. 북쪽사람처럼 안생겼어요?” 할아버지는 크게 웃으시며 “사람 생긴게 다 똑같지 북쪽 남쪽 어디있나?!”. 북한으로 향하는 국도 입구에는 ‘금강산 27km’라는 이정표가 있다. 유하는 나에게 “우리가 걸어가면 하루 걸리겠다. 그 아래서 하루 자고, 금강산 올라가면 딱이네!”

우리는 ‘마지막’ 버스 종점에서 내렸다. 관동팔경 800리길 시작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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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강산은 이곳에서 불과 27km 정도 떨어져 있다. 얼마전까지, 정치 상황이 좋았을 때는 이 '국경'으로 금강산을 오갔다. 차로는 20여분이면 도착한다. 걸어서도 하루면 충분하다. 지금은 굳게 닫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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