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적 자연 속의 단상

 

보고 싶지만 볼 수 없고, 볼 수 있다 하여도 그 만남은 멀찌가니 얼핏 스쳐감으로 끝나기에 가까이 다가서기가 몹시 어려운 친구들이 있습니다. 인위적으로 갇혀진 울타리에서가 아니라 자연에서 태어나고, 태어난 그 자연에서 살아가는 노루, 고라니, 산양, 담비, 멧돼지, 멧토끼, 오소리, 너구리, 삵, 수달과 같이 몸이 조금 큰 육상포유류가 그런 친구들입니다. 그렇다고 이 친구들을 가까운 거리에서 만나는 길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닙니다. 저들이 지나다닐만한 곳을 찾아 완벽한 위장을 하고 기다리면 됩니다. 하지만 그 기다림의 끝이 기약이 없는 것인지라 먼저 지쳐 포기할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어두움에 기대어 움직인다는 것도 어려움 중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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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라니

 

하지만 직접 보기 어렵고, 더욱이 다가서는 것은 더 어렵더라도 다행히 또렷하게 느낄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흔적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남겨준 발자국(足跡), 배설물, 먹이를 먹은 흔적(食痕), 서식처의 흔적, 생활습관의 흔적 등이 그것입니다.

비가 온 다음 날이나 눈이 많이 오고 아직 잔설이 남아 있다면 저들과 가장 쉽게 대화할 수 있는 흔적은 발자국입니다. 우선 고양이과에 속하는 친구들은 발가락이 모두 넷인데, 발톱을 숨긴 채 이동하는 습성이 있기 때문에 네 개의 발가락만 족적으로 남겨줍니다. 아쉽게도 호랑이와 표범을 비롯한 고양이과의 친구들은 대부분 우리의 땅에서 사라진 지 오래고 이제 삵만이 남아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물기 머금은 흙이나 눈 위에 발톱이 없는 네 개의 발가락이 남겨져 있다면 그 발자국을 따라 움직인 것은 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근래 야생 고양이들이 늘고 있어 서식처 환경이나 발자국의 크기 등을 꼼꼼하게 챙겨 구별해야 하는 어려움은 있습니다.

개과에 속하는 동물 역시 고양이과의 동물처럼 발가락이 넷입니다. 그런데 개과의 동물은 항상 발톱을 내밀고 이동을 하기 때문에 고양이과의 동물과 달리 족적에 발톱이 함께 찍힌다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여전히 안타까운 것은 개과에 속하는 늑대, 승냥이, 그리고 여우마저 우리의 땅에서는 이미 멸종을 하고 없다는 점입니다. 남은 것은 너구리입니다. 개가 있을 수 없는 곳인데 발가락 넷에 발톱이 선명하게 찍힌 족적이 있다면 그것은 너구리가 다녀간 것이라 보아도 좋습니다.

개과와 고양이과와 다르게 족제비과에 속하는 동물들은 발가락이 다섯입니다. 족제비과에 속하는 오소리, 족제비, 그리고 수달은 다섯 개의 발가락에 발톱을 남깁니다. 또한 이들 각각은 크기와 모양이 다르기 때문에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면 구분할 수 있습니다. 잊지 않도록 쉽게 설명할 때는 ‘너구리 넷, 오소리 다섯’ 그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멧돼지는 독특한 족적을 남겨 한 번 정확히 알아두면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사슴과에 속하는 고라니와 노루는 족적이 거의 비슷하여 구별하기 어렵지만 노루는 보통 700미터 이상의 고지대에 살고, 고라니는 주로 수변이나 저지대에서 생활한다는 것으로 구분할 때가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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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구리 족적                                      수달 족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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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라니 족적                                      쥐 족적

 

동물이 남길 수밖에 없는 흔적 중 족적만큼이나 확실한 것이 배설물입니다. 무엇을 먹어야 사는 것이 동물이므로 배설물은 살아있음의 또 다른 표현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종에 따라 배설물의 생김새가 조금씩이라도 다른 것은 여간 고마운 일이 아닙니다. 강가나 산속을 더듬다 특정 동물의 배설물을 만났을 때 마치 그 동물을 만난 것처럼 반가운 것도 그러한 이유일 것입니다. 또한 어떤 동물이 무엇을 먹는지를 일일이 따라 다니며 살필 수 없는 형편이고 보면 배설물은 동물의 먹이습성을 고스란히 알려준다는 점에서 무척 소중한 자료가 되기도 합니다.

초식동물의 배설물은 대개 알 모양으로 깔끔하며 냄새도 없습니다. 육식동물의 배설물은 전체적으로 길쭉한 모양인데, 한 쪽 끝은 뭉뚝하고 다른 한 쪽은 가늘며 색깔은 거무튀튀한 경우가 많습니다. 수달의 서식이 확실한 지역이라면 수달의 배설물은 찾기가 쉽습니다. 자기의 영역임을 알리기 위하여 눈에 잘 띄는 바위나 돌 위에 배설물을 남기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바위가 없고 모래만 있는 곳에서는 모래를 긁어모아 볼록하게 탑을 쌓고 그 위에 배설을 하기도 합니다. 수달의 배설물에는 물고기의 뼈, 가시, 그리고 비늘 따위가 잔뜩 들어있습니다. 수달이 물고기를 잡아먹으며 살아가는 동물인 것을 감출 길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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멧토끼 배설물                                      고라니 배설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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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 위의 수달 배설물                                모래성 위의 수달 배설물

  

이밖에도 먹이를 먹은 흔적, 목욕을 하고 떠난 자리, 보금자리와 쉼터 등이 동물마다 독특하기 때문에 직접 보지 못하더라도 차분하게 저들을 만날 수 있는 길은 얼마든지 열려 있습니다.

꽤 많은 비가 이어지다 멈춘 날, 누구라도 만나고 싶은 마음에 학교에서 산 쪽으로 이어지는 산책로를 따라 가다 흙길로 들어섰습니다. 푹신해진 흙길 위에 쇠백로나 중대백로가 거닐었던 자취와 함께 고라니의 발자국이 고스란히 찍혀져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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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라니 족적 

 

그저 발자국만으로도 많은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혼자 왔었는지, 혼자 왔었다면 그 비 홀로 다 맞으며 무엇을 위해 내려 왔었는지, 누구와 같이 왔었는지, 누구와 같이 왔었다면 그 것이 제 짝인지, 새끼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어디서 어디로 움직였는지, 가던 길 잠시 멈춰 하늘이라도 올려다 볼 여유는 있었는지, 아니면, 무엇에 놀라 황급히 달아나야 했는지… 흙길을 따라 이어지던 발자국은 아스팔트를 만나며 뚝 끊어지고 맙니다. 아스팔트는 안타깝게도 저들의 흔적과 만날 수 있는 길조차 끊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오늘도 나름 최선을 다해 살았건만 이 밤은 이상할 정도로 잠이 쉽게 들지 않고 낮에 만난 고라니의 족적만 자꾸 아른거립니다. 어쩌면 이 세상에 남기고 있는 내 삶의 족적 어딘가에 부끄러운 구석이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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