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범한 큰딸, 평범한 진리 - 생생육아
2010.10.27 09:54 Edit
» 지난 3월 유치원 숙제를 하던 수아.
고만고만한 아이큐, 고만고만한 성적, 고만고만한 성격... 나와 남편은 특출나지도, 그렇다고 뭔가 모자라지도 않은 그냥 평균 정도의 두뇌를 가진 평범한 부모들이다. 집안이 넉넉해서 사교육을 잘 받은 것도 아니었고, 철이 들고 나서 ‘그래도 공부는 해야겠다’ 싶어 그나마 뒤늦게 정신을 차린 케이스다.
그래도 내 자식만은, 내가 경제적으로 아이들의 능력을 뒷받침할 능력이 안되더라도, 어느 분야에서든 특출한 재능을 보이는 자칭 ‘천재’이기를 내심 바랐다. 결혼 전부터 나에게는 그런 행운이 올 것 같았다. 두 돌이 갓 지난 아이가 한글을 떼고, 세 돌이 된 아이가 팝송을 따라 부르고, 9살 짜리가 어려운 암산을 술술 풀어내어 <스타킹> 같은 프로그램에 출연한 것을 볼 때면 “나도 저런 아이를 낳을거야. 암만.” 이러면서 내심 행복한 미소를 짓곤 했다.
요즈음 그런 행복한 미소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 내 아이들이 지극히 평범한 두뇌를 갖고 태어났다는 사실을 깨달아가고 있다. 여섯살 된 큰 아이는 이제 막 한글을 떼기 시작했다. 유치원 선생님 말로는, 그 또래 아이들이 하는 수준만큼 잘 따라가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하긴, 수아는 3살이 되었을 때까지 말을 하지 않아 애를 태웠다. 언어치료를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고민까지 했을 정도이니, 이것에 비하면 다행스런 일이다. 그러니 나는 수아한테서 세살 때 한글을 떼고, 영어책을 읽는 것을 바라지도 않았다. 그냥 말이라도 잘 했으면... 했으니까.
그런 내가 요즘 욕심이 점점 늘어간다. 다른 엄마들도 다 마찬가지겠지만. 수아가 말을 하고, 수아 친구들이 하는 말과 행동, 엄마가 아이들의 교육에 매진하는 정도를 보고 있자니 더 잘했으면 하는 마음이 든다. 더 나아가 지금까지 미처 발현되지 못한 내 아이의 ‘영재성’이 표출되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다고 할까??
그런데, 현실은 여지 없이 나의 기대와 정반대다. 2주 전 영어 공개수업 참관을 했다. 유치원에서 원어민 영어선생님과 진행하는 수업을 참관하는 프로그램을 마련한 덕이다. 수아는 선생님의 질문에 대답을 하기는 커녕 그닥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영어를 싫어하는 것까지, 나를 닮은 것인지...쩝) 다른 아이들은 열심히 노래와 율동을 따라하고, 선생님의 질문에도 곧잘 대답을 하는데 수아만 시무룩한 표정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내가 케이블텔레이전 ‘스토리온’에서 <엄마, 영어에 미치다>를 자주 본다. 그것을 보면서 엄마들의 영어에 대한 교육열도 대단하다는 것을 새삼 느끼고 있다. 지금껏 억대의 영어 책과 교재를 사줬다는 엄마, 영어 원어민강사에게 과외를 시키는 엄마, 영어 유학을 고민하는 엄마 등등... 어린 꼬마들의 영어실력에 깜짝깜짝 놀라고 있는 참이다. 얼마 전에는 <친절한 미선씨>에 자칭 영어천재들이 나오기도 했다. 그런데 막상 내 딸의 영어실력을 보자니 화가 치밀었다.
어쨌든 <영어~>에 나오는 아이들은, 대개 부모의 경제력과 적극적인 후원에도 불구하고 영어에 좀처럼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아이들을 위한 100명의 교육 전문가가 처방법을 알려주는 프로그램이다. 그 처방법대로 하면 1달 뒤 아이들의 영어 실력이 놀랄만한 수준으로 급성장한다. 내 경우 경제력은 안되더라도 그 방법이라도 집에서 직접 따라해볼까 하는 마음에서 즐겨본다. 비록 실천은 쉽지 않지만.
수아의 영어수업 태도나 실력은 영어에 흥미를 붙이기 싫어하는 프로그램 속 그 아이들과 별반 다를 게 없다. 갑자기 ‘이러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전국의 다른 아이들은 분명 어떻게든 영어를 접하고 친근하게 대하고 있을 것이고, 엄마의 뒷바라지 역시 대단한 것이다. 내 주변만 봐도 그렇다. 동네 사는 엄마들... 심지어 회사의 친한 동료도 어릴 때부터 영어 테잎을 들려주며 영어 동요를 함께 부르곤 했더니, 영어를 무척 잘한다고 한다. 또 어떤 아이는 두 돌도 채 안되었는데 알파벳을 줄줄 읽는다고 한다.
바로 수아한테 알파벳을 보여주면서 읽어보라고 했다. 전혀 대답을 못했다. 허걱~ 5살 때부터 유치원에서 매일 영어 수업을 했고, 그 이전에도 어린이집에서 영어 수업을 간단하게나마 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알파벳조차도 못 읽는다니! 최소한 알파벳은 알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해도 해도 너무 심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아이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수아는 울음을 터뜨렸다. 속이 상했다. 아~ 내 딸의 실력이 이 정도라니...(사실 둔재 엄마가 천재 아이를 바라는 건 어불성설이긴 하다...)
하긴 그러고 보니, 이 모든 결과를 초래한 건 나 때문이다. 아이의 탓이 결코 아닌 것이다. 그동안 나는 수아한테 어떤 엄마였던가... 아이가 천재이길 바라기 전에, 천재성을 발견하고 개발해주기 위해, 혹은 최소한 아이들의 교육와 정서 함양을 위해 얼마나 노력을 했던가!~ 일례로 잠자리에서 책을 읽어주기는 했던가. 그것도 아니었다. 단 15분이라도 책을 읽어주는 것이 아이의 두뇌 발달이나 정서적으로 좋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으면서 그런 날이 많지 않다. 늘 피곤하다는 핑계로 스스로 알아서 읽기를 바랐다. 함께 미술놀이를 해줬나, 함께 야외 활동을 많이 해줬나, 다양한 경험을 쌓게 해줬나, 언어 발달을 위해 노력한 것이 있던가.. .등등.
또한 아이가 영어에 흥미를 느낄 수 있도록 엄마로서 도움을 줬었나. 그것도 아니었다. 유치원에서는 한달에 파닉스 1권, 두달에 한번 영어동화책 1권 수업 진도를 나가는데 그때마다 시디를 집으로 보내줬다. 집에서 시디를 틀어주고, 아이가 반복해서 복습할 수 있도록 협조해달라는 의미다. 그런데 한번이라도 제대로 틀어준 적이 없던 것 같다. 함께 노래를 불러주고, 율동을 함께 한 적도 거의 없고, 아이한테 유치원에서 배운 노래와 율동을 엄마한테 들려달라고 요청한 적도 없다. 아이가 영어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퇴근해서 두 아이들을 어린이집과 유치원에서 찾고 난 뒤 밥을 먹이고, 씻기고, 재우기도 내겐 벅찼다. 너무 힘들어서... 조금이라도 빨리 아이들을 재워야, 내가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으니 어쩔 수 없었다.
그러면서 난 이러한 ‘엄마의 도리’는 하지 않고 아이한테 터무니 없이 너무 과한 것을 요구했고, 기대했던 것이다. 아이의 천재성은 김연아나 박세리, 박지성 등에서 보듯 부모가 적극적으로 개발해줄 때 발현된다. 아이가 둔재임을 탓하기 전에, 내가 조금 힘들어도 아이를 위해, 아니 천재나 영재를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아이가 책읽기, 영어가 학습이 아닌 재밌는 장난감이나 놀이가 될 수 있도록 내가 좀더 신경을 써야겠다. 아이의 두뇌와 영재성은 부모의 관심과 뒷받침에서 나온다.
엄마 김미영의 다짐. 아이를 영재로 키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이가 즐거워할 수 있도록 ‘함께 책을 읽고, (영어든 한글이든) 노래를 부르고, 율동을 하자!’ 일단 유치원에서 보내준 시디를 차안에서든, 집에서든 즐겁게 듣고 따라할 수 있도록 해주자. 다행히 수아와 아란이는 노래 부르고 율동하는 것을 좋아한다. 한글 동요든 영어 동요든, 또한 엄마나 아빠가 책을 읽어주는 것도 무척 좋아한다. 정말 정말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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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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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그런 의도로 쓰신 글이란 거 알고 있어요. 저도 댓글 적으면서.. 영어 공부나 영재 교육 강조하는 글도 아닌데 괜히 또 내가 오버하는구나 싶긴 했거든요.^^
다만 전 개인적으로.. "난 취학 전 아이에게 영어교육 인지교육 안 시키겠다.." 뭐 이렇게 노골적으로 말씀하시는 분들을 많이 만나 보고 싶어요. 그런 분들 보면서 어렴풋한 제 교육관도 좀더 다지고 싶구요. 하도 주변에서 "애 크면 생각 달라질걸" 이런 말을 많이 듣는 터라..+_+
그러다 보니 기자님께서 개인적인 육아의 소회를 적으셨는데 제가 좀 재미없게 받아 버렸네요. 그치만.. (다른 신문도 아닌) 한겨레 기자시니까.. 이런 기대치를 또 갖게 되는 것 같구요..괜히 부담스러우시려나?^^;;
모쪼록 앞으로도 잘 부탁드릴게요. -
하하. 불편하긴요. 사실 저도 영어교육과 무관한 육아를 지향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전에도 몇번 말했듯, 사교육은 유치원과 어린이집에서 하는 것 외에 전혀 하지 않고 있기도 하고요. 그런데, 요즘 자주 ‘영어’ ‘영재’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조급증의 문제인지, 아니면 글에 쓴대로 제 욕심이 과한 것인지, 이상과 현실에서 갈팡질팡하고 있는 게 지금 제 마음이니까요. 글은 꼭 영재를 바란다거나, 영어를 잘하게 만들겠다기보다는, 자녀 교육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헷갈리고 있는(아마 저같은 고민을 하시는 분들이 여럿 계실 것이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분들에게 조언 또는 넋두리 정도의 글을 올렸다고 봐주셨으면 합니다... 엄마의 욕심이란 게, 아이를 실제 키우고보니 끝이 없네요. 기왕이면 더 잘했으면... 하는 마음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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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아이와 비교하지 말고 우리 아이의 어제와 비교하라는 말을 가슴 속에 품고 사는 엄마입니다. 아이가 두 돌이 갓 지났는데 또래보다 말이 많이 늦습니다. 이제 겨우 동물 울음 소리를 조금씩 흉내내는 정도거든요. 그런데도 어제 못했던 걸 오늘 하는 그 자체만으로도 감동입니다. 자꾸 비교하고 속상해 했으면 다른 아이들 버얼써 했을 걸 이제 하는구나 하고 감동이 반감되었을 것 같아요. 남과의 비교는 아이에게도 독약이지만 부모에게도 치명적입니다. 무엇이든 우리 아이보다 잘하는 아이는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기자님도 저도 비교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비교때문에 우울해지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아이들, 그 자체로 너무 예쁘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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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정확히 우리 아들이랑 비슷하네..소심하기도 하고..영어도 싫어하고..유치원에서 영어도 2년이나 배웠구만.1학년에 영어학원에 갔더니 파닉스 및 알파벳부터 다시 해야 한다고 했지..그런데 두되 발달도 다 시기가 있다고 오히려 1학년때 가서 배우니까 속도가 늘더라고..것도 자기 흥미랑 맞아야 하지만 예전엔 아무리 시키려고 해도 영어라면 학을 띠더니..지금은 잘(내가 생각하기에) 하고 있어..소심한것도 3학년이 끝나가는 이 시점이 되니 친구랑 뭐 하나라도 같이 하려고 어찌나 애를 쓰는지..이녀석 곧 내 치마폭을 떠나겠구나..하는 생각이 들더구만..내가 그동안 조급하게 발을 동동 구르면서 애를 잡았지 싶더라고..이제 엄마도 기다리는 법을 배워야 할 것 같아. 더분에 둘째에게는 아들내미한테처럼 조급하게 굴지는 않지..
그러니까.. 아직 영어교육을 비롯한 학습과는 무관한 육아를 하고 있는 중인지라.. 이런 말씀을 드릴 자격이 되는 것인지는 모르겠어요. 지금 이렇게 얘기하지만 막상 우리 아이가 좀더 나이를 먹은 담에도 이 생각을 유지할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는 거니까요. 다만..
한겨레나 베이비트리가 제가 생각하는 만큼 대안적인 문화, 건강한 육아를 지향하는 것은 아닐 수도 있겠지만.. 그리고 각자가 생각하는 대안과 건강함의 의미가 조금씩 다른 것일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영어' '영재' 등의 이야기가 이 공간에서 이렇게 쉽게 나오리라는 생각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제가 기대하는 베이비트리라면.. 과도한 교육열에 휩싸인 이 시대 부모들에게 조금 다른 방향의 육아도 가능하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곳일 수 있지 않을까.. 스토리온의 그 영어 프로그램 같은 것에 대해 오히려 제대로 비판을 날려 주셔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한데 말이죠.
(글에서 언급하신 영어 프로그램을 초반에 잠깐 본 적이 있는데요.. 사실 그거 보면서 전 그 엄마들이 정말 '미친' 게 아닐까 생각했었거든요.)
편하게 쓰신 글을 제가 오독하고서 괜히 오버하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불쾌하지 않게 받아 주셨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