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이젠 돌잔치는 그만 생생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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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내 이룸이는 2010년 1월 31일에 태어났다.

이틀 후부터가 설 연휴였으므로 돌잔치는 강릉 시댁에서 치르기로 했다.

설 다음날 돌 상을 차리기로 한 것이다.



시부모님은 아이들의 백일과 돌을 몹시 중하게 여기셨다.

그런 것을 잘 몰랐던 나는 결혼 이듬해에 낳은 첫 아들 백일 때 “힘드시면 오지 않으셔도 된다”고

시어머님께 한마디 했다가 두고 두고 야단을 맞았었다. 어린 아이 백일을 보시자고 강릉에서

올라오는 것이 너무 힘드실 것 같아 여쭌 것인데 알고보니 손주들 백일을 한 번도 거르신 적이

없었고 첫 돌엔 시댁 식구들 모두가 모이는 것이 가풍이었다.

백일과 돌 상에는 전을 세가지 부치고, 과일은 홀수로 다섯가지 이상 차리는 것이 기본이라 했다.

첫 아이 낳고 서툰 엄마 노릇하느라 쩔쩔매던 시절이었으니 백일상 준비는 친정엄마 몫이 되었다.

둘째 때에는 첫 아이 돌보며 상을 차리느라 또 친정엄마 도움을 받았고, 셋째 백일 땐 널뛰듯

장난치고 매달리는 두 아이가 있어 역시 친정엄마를 불러야 했으니, 딸 가진 죄로 우리 엄마는

결혼 9년간 띄엄 띄엄 아이 셋을 낳아 매번 쩔쩔매며 차려야 했던 손주들의 백일상 음식을 내 대신

다 해주셔야 했다. 



돌 잔치는 조금 달랐다.

첫 아이야 늦게 결혼해서 귀하게 얻은 아들인 탓에 좋은 장소를 빌려 뷔페를 먹어가며 돌잔치를

했었다. 식당 직원이 판에 박힌 멘트로 돌잔치를 진행해주는 것이 싫었던 내가 직접 마이크를

잡고 사회를 봤었다. (전직이 사회단체 문화부 직원이었으므로 사실 행사 사회엔 상당한

이력이 있던 차였다) 남편은 아이의 탄생에서부터 돌까지의 사진을 모두 정리해서 음악을 입혀

영상으로 만들었다. 육아 일기 중의 몇 편을 뽑아서 간이 책자를 만들어 하객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했다. 돌잡이도 정성을 들였다. 마이크니 골프공이니 장난감 청진기 같은 것들 대신

평생 운동을 가까이 하는 삶을 살라고 하는 기원을 담아 내가 신던 마라톤화를 올렸고

나누는 삶을 살라고 해외결연을 맺어준 아프리카의 형제 사진을 올렸으며, 늘 글을 읽고

쓰는 삶을 살라고 책과 펜도 올렸었다. 이쁘고 화려한 잔치 대신 귀한 의미들을 많이 담으려고

애썼던 돌잔치였다.



둘째는 집에서 돌잔치를 했다.

돌잔치에 올라가는 음식 외에 시댁 식구 열댓 명이 하루 자면서 지내야 했기에 대식구

치를 음식 만드는 일이 더 힘들었었다. 처음으로 차려보는 돌상이라 서툴러서 형님과 동서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래도 내 힘으로 작은 떡 케잌을 만들어 돌상에 올리기도 했지만

돌상 차리고 손님 치루는 일에 지쳐 있어서 그럴 듯하게 꾸미고 근사한 사진 한 장 찍을

여유도 없었다.



이번 막내 돌상은 설 다음날 차렸다.

시댁의 설은 새벽 같이 일어나서 큰 댁으로 가서 제사를 드리고 서른 여명의 대식구가 함께

아침을 먹고 다시 두 세곳 친척 어르신 댁에 들러 세배를 드리고 인사를 하고서야 오후가 다 되어

돌아오는 만만치 않게 고단한 일정이다. 모두 파김치가 되도록 피곤한데 설을 쇠자마자 다시

돌상을 차리느라 어머님과 형님, 동서의 고생이 많았다.

통팥을 삶아 절구로 으깨어 고물을 만들고 쌀가루를 치대어 경단을 빚고 끓는 물에 익혀서

다시 고물을 묻혀야 하는 수수팥단지 하나에도 얼마나 많은 정성과 수고가 들어가는지

같이 하면서도 한숨이 절로 나왔다. 카스텔라 고물에 경단도 빚고, 큼직한 통밤을 넣고 송편도

빚었다. 세 며느리가 함께 했지만 나야 어린 이룸이 돌보느라 수시로 자리를 비우게 되어

일찌감치 아이들 다 키워 놓은 형님이 제일 수고를 많이 하셨다.

끈적한 진이 많이 나오는 강릉 미역은 국을 끓이려면 수없이 물에 씻어야 했고, 다섯가지

과일 씻어서 괴는 일에도 절차와 방법이 지극했다.

열 다섯명 대 식구 아침 차려 먹고 치우자마자 다시 돌상 차리는 일에 세 며느리와 어머님까지

매달려서 점심 때를 한참 지나서야 상이 차려졌으니 모든 식구들이 돌상을 먼저 하고 점심을 먹느라

배를 곯아가며 기다려야 했다.



병풍이 쳐지고 큰 교자상이 나오고 둘째 윤정이가 입었던 돌 한복을 입은 셋째 이룸이 몸에

오래 살라고 실 타래가 걸렸다. 할머니와 큰 엄마, 작은 엄마의 정성이 가득 깃든 돌 음식을

받았으니 이룸이가 복이 참 많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다행히 이룸이는 방글 방글 웃으며 돌상에 앉았고 여러 식구들과 웃으며 사진을 찍었다.

제일 늦게 태어났지만 아마도 이것이 모두에겐 마지막 돌상이었기에 더 정성을 들였을 것이었다.



아이 셋 데리고 강릉 시댁에 내려가 설 쇠고 돌 상 차리고 집으로 올라와서 근 일주일을

멍한 상태로 보냈다. 정작 제일 힘든 일은 형님과 동서가 다 했음에도 이렇게 힘이 드니

나이 들어 애 낳은 탓이거니 스스로 위로했다.

세 아이 낳아 세 번 돌잔치 치루는 일이 쉽지 않게 지나갔지만 그래도 손주들을 이다지도

귀하게 여겨주시는 시부모님의 마음엔 진심으로 고개가 숙여진다.

모쪼록 많은 정성 받으며 크고 있는 세 아이들이 이런 정성의 의미를 소중하고 귀하게 여기는

사람들로 커 주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내 삶에 더 이상의 돌잔치가 있을까.

그런 일은 없을거라고 믿고 있다. 아니, 그래야 한다.



이제 돌잔치는 그만!!

세 번으로 나는 너무나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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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집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경험이 주는 가치, 병원과 예방접종에 의존하지 않고 건강하게 아이를 키우는 일, 사교육에 의존하기보다는 아이와 더불어 세상을 배워가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고 있다. don312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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