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없이 애도 없이 나 혼자라 좋구나! 생생육아
2013.10.15 10:25 세 아이와 세상 배우기 Edit
토요일 오전 아홉시 넘어 혼자 집을 나섰다.
목적지는 온수에 있는 한 공동육아 어린이집이다. 한겨레 교육부
김청연 기자와 함께 '아이와 책'이란 주제로 강의를 부탁받았던 것이다.
주말이라 온 가족이 함께 있는 날이어서 맘만 먹으면 온 가족이 같이
갈 수 도 있었다. 실제로 주말에 강의가 있을때는 늘 그렇게 해 왔다.
그러나 이번엔 나 혼자 나왔다. 작년 겨울에 젖을 떼면서 막내 이룸이도
나와 잘 떨어지는데다가 이제 강의에 아이들을 달고 다니는 일은
그만하고 싶기도 했다. 무엇보다 남편이 아이들을 챙길테니 혼자
다녀오라고 응원도 해 주었다.
일찍 일어나 아이들 아침거리를 장만해 놓고 배웅을 받으며 집을 나서는데
마음이 어찌나 흥분되고 설레던지..
주최측에서는 가족과 함께 보내는 주말 오전에 강의를 부탁한것을 퍽이나
미안해 하는 눈치였지만 나를 잘 몰라서 하는 말이다. 이런 기회는
정말이지 내겐 선물같은 여행과도 같기 때문이다.
대야미역 근처에 차를 대 놓고 날듯이 개찰구를 빠져나가 계단을 올랐다.
아아아.. 아이들없이 나 혼자 다니니 정말 옆구리에 날개가 돋은 것 같다.
이렇게 홀가분할 수 가 없다. 유모차 안 밀어도 되고, 엘레베이터나
에스컬레이서 찾느라 동동거릴 필요도 없고, 애들 걸음에 맞추어
내 보폭을 늦출 필요도 없이 내 리듬대로, 내 기분대로 맘 놓고
걸을 수 있는 자유란 얼마나 근사한 것인가.
전철이 붐벼도 자리가 없어도 상관없다. 챙겨온 시사잡지에 눈을 주면서
가끔씩 창밖을 보며 마음껏 생각에도 잠겨보고,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수다떠는 이야기에도 귀를 기울이면서 아무런 말 할 필요 없이 전철을
타고 갈 수 있는 것도 이렇게 좋은 줄 몰랐다. 아이 셋을 데리고 전철을
타면 쉼없는 요구에 귀 기울여야 하고, 대답해주어야 하고, 장난치려는
아이들 단속하며 지루하지 않게 온갖 재주를 다 동원해야 한다. 게다가
갑자기 막내가 오줌이라도 마렵다고 하면 머리속이 다 하애져서 아무
역이나 내려 화장실을 찾느라 정신없이 달려야 할 때도 있다.
그런것에 비하면 혼자 전철을 타는 일은 하루 종일이라해도 신나게
즐길 수 있겠다.
스므명 남짓 모여있는 부모들 앞에서 수다처럼 재미나게 이야기를 했다.
애들 달고와서 강의할때는 강의하면서도 애들 신경쓰여서 늘 초긴장이었다.
가끔은 강의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문을 열고 들어오는 애들때문에 기겁을
하기도 했다. 그런 신경 쓸 일 없이 혼자 맘 놓고 얘기할 수 있다니
말 하기 좋아하는 나로서는 한 시간이 아니라 몇 시간이라도 즐겁게
떠들 수 있다. 일이 아니라 정말이지 내겐 휴식같은 시간이었다.
강의를 끝내고 김기자와 둘이서 밥을 먹고 태어나 처음으로 '캬라멜마끼아또'를
주문해 마시면서 (만화 '다이어터'의 주인공 '신수지'가 제일 좋아하는 이 메뉴를
나는 지금껏 한번도 먹어본 일이 없다.ㅠㅠ) 신나는 수다를 떨었다.
아이들 책 이야기부터 결혼전 연애와 결혼 후 부부생활, 세 아이를 키우면서 겪은
갖가지 일들, 그리고 요즘 고민하고 느끼는 일들까지 맘 통하고 말 통하는 두 여자의
수다는 때론 깔깔거리며 웃고, 때론 서로 눈물 글썽거리며 쉼 없이 이어졌다.
아이들이 계속 내게 전화를 걸어와 언제 오냐고 성화를 부리느 바람에
아쉽게 오후 2시 반쯤 헤어졌지만 반 나절을 혼자서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좋아하는 사람을 만난 것 만으로도 나는 맛좋은 음식을 배불리 먹은 사람처럼
행복하고 뿌듯했던 것이다.
대야미 역에 도착하자마자 아이들이 부탁한 치킨 사러 뛰어 갔다가 집에 와보니
그때까지 아무도 점심을 먹은 사람이 없다. 생라면 세 개를 먹고 있었단다.
아이고머니...
점심을 안 먹이면 어떻하냐고 남편에게 한 마디 했더니 아무도 배고프다고
'하지 않았다며 남편은 내게 버럭 화를 냈다. 반 나절을 애들 챙기느라
애썼는데 오자마자 잔소리를 하는게 못 마땅했으리라. 흥.. 제대로 먹이지도
않았으면서 큰 소리는... 그래도 아무말 하지 않았다. 나는 부지런히 애들을
챙겨 먹이고 그때까지 고스란히 빨래바구니에 담겨 있던 빨래를 세탁기에
해 널고 집 정리를 했다. 반 나절 휴가 얻은 것 처럼 집을 나가 있더라도
돌아오면 내 몫의 일은 그대로지만 그래도 그 반나절은 꿀 같이 달콤했다.
생각해보니 결혼하고 애 키워온 11년간 단 하루도 나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본 적이
없다. 친구들과 카페에서 맘 놓고 수다를 떨어 본 일도 없고 혼자 영화 한 편 본 일이
없다. 늘 아이들과 함께였다. 어린 애가 있으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살아왔다.
막내가 아직 네살이지만 이젠 한달에 한 번쯤은 종일 나 만을 위해 보내고 싶다.
좋아하는 영화도 보고, 그냥 좋아하는 거리를 맘 놓고 쏘다니고, 느긋하게
찜질방에서 굴러도 보고, 아니 하루 종일 말 하지 않고 지내기만 해도 휴식이
될 것 같다. 그래, 그래.. 이젠 이 정도는 누리고 살아도 되는데...
남편이여..
이제 나에게도 안식일을 달라.
나 혼자 영화를 보고, 나 혼자 밥을 먹고, 나 혼자 울고 웃는 시간이 필요하단 말이다!!!!
응답하라, 응답하라, 응답하라!!!!!!
아니지, 이건 남편에게 응답받을 일이 아니구나. 내가 선언하면 되는구나.
마누라는 이제부터 한 달에 하루씩 안식일을 쓰겠으니 그날은 당신이 애들을 책임져라.
생라면을 먹든, 생고기를 먹든, 생쌀을 먹든 알아서 하라.
그날 하루 나는 신나게 집을 나가겠노라. 으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