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누라 삭발 미수 사건 생생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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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물일곱 쯤의 나)

 

그러니까.....

내게는 오래전부터 '삭발'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삭발 말이다. 머리를 완전히 밀어 버리는...

 

중학교때인가, 버스를 타고 어디를 가는데 앞자리에 앉아있던, 척 보기에도

매우 범상치 않았던 할아버지가 내 얼굴을 골똘히 한참 바라보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두상이 참 잘 생겼어. 이런 두상은 흔치 않은데..."

 

앞, 뒤짱구로 태어난 나는 어렸을때부터 머리통이 이쁘다는 말은 꽤 들었다.

그것이 얼굴이 이쁘다는 말은 아니라는 것쯤이야 일치감치 알아챘지만

그래도 머리통이나마 미운것 보다는 이쁘다는 게 좋은거지.. 하며 속으로

소심한 자부심을 느끼곤 했다.

그런데 중학교 때 낮선 사람에게서 이런 소리를 듣고보니 정말 내 두상이

아주 특별하게 훌륭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두상이 비범한데 설마 그 안에 들어있는 것들도 분명 비범한것이 있지 않을까..

아마도 이런 기대까지 했었는지 모른다.

 

대학교 다닐때 잠깐동안 별명이 '시고니 위버'였던 적이 있다.

영화 '에이리언 3'가 엄청난 화제가 되었을 무렵이었다. 그 영화에서

시고니 위버는 검은 탱크탑에 민머리를 하고 에이리언을 죽이기 위해

우주 감옥을 누비는 강렬한 전사로 열연했다.

나도 한창 검은색 탱크탑을 즐겨 입곤 했는데, 가는 팔이지만 나름 근육질

이었던 몸매 덕에 (얼굴과는 전혀 상관없이) 시고니 위버라는 별명이 붙은 것이다.

얼마전에 '에이리언 3'를 다시 보다가 대학때 내 병명이 떠 올랐고, 그녀의 민머리가

영화속에서 얼마나 강렬한 감각을 일으켰는지를 다시 생각해냈고, 민머리임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얼마나 멋진가를 깨달으면서 슬금 슬금 내 두상에 대해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도 한 번 시원하게 싹 밀어 버릴까?

 

최근에 읽었던 '사는게 뭐라고'에서 주인공인 사노 요코 할머니는 일흔이 넘은

나이에 유방암 치료를 위해 머리를 밀고 나서는 삭발이야말로 자신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머리 스타일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고백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대목을 읽다가 나도 그럴지 모른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그래.. 어려서부터 두상이 이쁘다는 말을 들었는데, 어쩌면 삭발이야 말로

나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스타일이 아닐까..

머리카락이 없다면 얼마나 자유로울까. 매일 머리 모양 신경쓸 필요도 없고

그야말로 홀가분하게 외출할 수 도 있을텐데..

이런 생각이 들다보니 당장이라도 달려가 머리카락을 박박 깎아주세요 라고

부탁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도 식구들에게 말을 하는게 먼저라는 생각이 들어서 학교에서 돌아온 아들에게

내 뜻을 알렸더니

"안돼요, 엄마!! 삭발은 절대 안되요" 정색을 하며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었다.

"야.. 니 허락을 받으려는 것이 아니고 단지 니 생각을 들으려는 거야. 엄마 머린데

왜 니가 반대를 해"

"그래도 안되요. 엄마.. 지금도 짧은데, 삭발이라니요. 제발 정신차리세요"

 

농담반 가벼운 마음으로 던졌던 질문인데 아들 말을 듣는 동안 기분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누가 제 머리 밀자고 했나? 내 머리 좀 밀어보겠다는데 왜 지가 나서서 반대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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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혼 초의 나와 남편)

 

아들은 남편이 퇴근하자마자 현관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아빠, 엄마가 삭발을 하고 싶대요. 말려주세요"

남편은 신발을 벗고 마루로 들어오면서 나를 힐끗 쳐다보더니

"맘대로 하라고 해. 대신 그리고 산으로 가라고 해"

"여보... 머리를 밀든 말든, 설령 밀었다고 해서 산으로 가라니, 그런 말이 어딨어?"

"아 글쎄, 맘대로 하라고.. 그리고 산으로 가라고.."

"여보, 당신 내가 머리카락이 있으면 나를 사랑하고 없으면 나를 안 사랑하는거 아니잖아."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맘대로 하라고. 그리고 집에 들어오지마!"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우리의 대화는 이렇게 끝났고, 나는 뭔가 더 쏘아 붙이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피곤한 몸으로 퇴근해서 처음 듣는 말이 마누라가 삭발하겠다는 선언이라면

어떤 회사원이 나긋나긋하게 그래, 멋진 생각인데? 해 줄리 있으려나.

어이없고 황당하고 도대체 뭐하자는 건가 기가 막히겠지.

나는 사실 이런 선언을 하면, 도대체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됬는지, 마누라의

속 마음에 관심을 가져주길 기대했지만 그거야 순전히 낭만적인 내 기대

였을 뿐이고, 남편은 뜬금없는 짓을 곧잘 하는 마누라의 객기쯤으로

여겼을 지도 모른다.

 

두 딸들도 내 삭발 선언에 안되요.. 를 외치며 매달렸다.

"엄마.. 엄마는 지금이 제일 예뻐요. 머리 다 깎으면 안되요. 네? 제발요"

막내는 눈물까지 글썽이며 내게 이렇게 부탁하는 것이었다.

그 이쁜 얼굴을 보고 있자니 쓸데없는 내 객기로 가족 모두의 마음만

흔든것일까... 조금 미안해졌다.

 

그렇구나.

내 머리카락이지만 나는 또 나 혼자가 아니지. 남편과 아들과 두 딸과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과 다 연결되어 존재하는 사람이지.

나 좋자고 하는 행동이 나와 맺어져 있는 많은 사람들을 곤란하게 하고

속상하게 한다면 나 역시 혼자 좋아할 수 있을라나.

곰곰 생각해보니 난 그정도로 대범한 사람도 못 된다.

이리하여... 마누라의 뜬금없는 삭발 선언은 결국 미수로 끝나고 말았다.

 

아들은 풀 죽어 보이는 내게 와서 살며시 속삭였다.

"엄마... 오십살 되면, 그때 맘대로 하세요. 그때가되면 이룸이도 열살인데

엄마 삭발쯤 이해할지도 몰라요. 네?"

"흥, 지금이나 오십이나 무슨 차이가 있다고..."

"엄마.. 마음 푸세요. 엄마 머리카락을 모두가 이렇게나 사랑하고 있다구요"

마음속으로는 치치 거리면서도 아들의 말에 나는 마음이 풀렸다.

 

주변 사람들에게 이 사건을 이야기해주었더니 모두 내 편이 아니고 남편 편이다.

"언니.. 정말이지 언니 신랑이라서 언니하고 살아주는거야.. 아저씨가

정말 힘들겠어.." 이러면서 말이다.

 

그런가?

가끔 엉뚱한 생각을 하긴 하지만 그렇게나 특이한 사람일라고 내가... 싶었는데

어쩌면 남편이라서, 남편같은 사람이라서 나와 이만큼 조화를 이루며 살고 있는지도

몰라... 끄덕거리게 된다.

나는 다시 소심하고 간이 작은 여인네가 되어서 흰머리칼이 늘어나긴 하지만

그래도 부피감 있는 지금의 짧은 머리도 나름 멋진 스타일이라고 생각하기로 한다.

 

그래... 오십때까지 기다리지 뭐.

그래봤자 4년 남았는 걸.

오십이 되면 정말 남의 눈치 보지 말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조금씩 시도해보며

살아야지. 머리카락도 밀어보고, 타투도 해보고, 삭발해서 조금 머리를 길면

그때는 노랗게 염색도 해봐야지.

 

나는 완전히 맘이 풀어져서 버킷리스트를 다시 적기 시작했다.

조금의 일탈, 조금의 변화, 조금 다른 시도들이 내 삶을 또 얼마나

탄력있게 만들어 줄 수 있을지 기대하며서 오십을 기다리는 재미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어쨋든 기대가 있는 삶이지 않은가 말이다.

그게 삭발이든, 문신이든... ㅎㅎ

 

삭발은 미수로 끝났지만 뜬금없는 마누라는 또 다시 다른 음모를

궁리하고 있다. 나와 같이 사는 사람이 참 힘들겠다는 생각을 하며...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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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집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경험이 주는 가치, 병원과 예방접종에 의존하지 않고 건강하게 아이를 키우는 일, 사교육에 의존하기보다는 아이와 더불어 세상을 배워가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고 있다. don312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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