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후 처음으로 남편이 차려준 생일상 생생육아
2015.10.15 13:56 세 아이와 세상 배우기 Edit
내가 미역국 끓여줄께.... 내가 밥 차려줄께...
당신은 그냥 앉아만 있어....
며칠전 이런 말을 들은 후 부터 마음이 붕 뜬 것처럼 들떠서 생일을 기다렸다.
내 생일은 10월 11일 일요일이었는데 드믈게 휴일과 겹친 생일에 남편은
마누라 생일상을 차려주겠노라고 장담을 한 것이다.
막상 생일날 아침엔 여느 일요일처럼 모두가 늦잠을 자고 일어났고
남편은 마을조합에 급한 회의가 있어 나간 후 였다.
애들과 간소하게 아침을 차려 먹고 있는데 남편이 들어왔다.
장을 봐 왔다며 케익과 고기를 부려 놓는 것이다.
아침은 그냥 지나갔지만 점심엔 근사한 생일상을 차려주겠다고 주방으로 들어가더니
잠시후 덜거덕 거리는 소리가 났다.
가보니 미역국을 끓인다던 남편은 부엌창문을 떼네어 솔로 닦고 있었다.
"야.. 이 먼지 좀 봐라.."
먼지와 기름때로 얼룩이 심했던 부엌창이 맘에 걸렸던 모양이다. 말끔히 씻어
걸레로 닦고 뒷마당으로 나가 먼지가 많이 껴 바람도 잘 통하지 않던
방충망까지 떼 내어 말끔히 닦아 주었다.
깨끗해진 방충망과 유리창을 다시 달아놓으니 주방에 새로운 창문이 생긴것처럼
환하고 좋다. 와아... 이것만으로도 벌써 생일선물을 받은 것 같은데
남편은 나를 밀어낸다. 음식은 자기한테 맡기고 기다리란다.
국 끓이는거 한번도 본 적 없는데 정말 할 줄 아는건가?
미심쩍고, 걱정도 되어서 기웃거렸지만 그때마다 남편은 자신만만했다.
아들도 불러 돕게 했다.
두 남자가 나를 위한 음식을 만드는 모습을 다 보게 되다니.. 이거 정말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언제쯤 볼 수 있을까.. 상상만 하던 풍경이었는데 13년 만에 마흔 다섯번째
생일날 보게 되다니 정말 감개무량했던 것이다.
잠시후 참기름에 소고기 볶는 냄새가 근사하게 퍼졌다.
딸들은 맛있는 냄새가 난다며 펄쩍펄쩍 뛰었다.
마침내 내 앞에 놓인 미역국 한 그릇...
조심 조심 떠 먹었는데.... 아!! 맛있다. 맛있다. 내가 한 것 보다 더 맛있다.
큰 애 낳고 시어머님이 미역에 조선간장만 넣고 끓여주신 미역국을 삼키지 못했던
나는 그 후로 미역국을 잘 안 먹게 되어서 끓이는 솜씨도 별로였는데
내 국보다 남편것이 더 맛있다. 이사람.. 정말 재주 좋은데?
아이들도 맛있다며 좋아한다. 비로소 남편 얼굴에 미소가 퍼진다.
국을 먼저 내놓고 남편은 한우 안심을 구워 주었다. 마늘을 편으로 썰어 향을 입힌
안심 구이도 살살 녹듯이 맛있었다.
남편이 준비한 음식은 미역국과 고기 뿐이었지만 나도 아이들도 정말 맛있게
행복하게 먹었다.
제일 늦게 식탁에 앉은 남편과 맥주 한잔으로 건배를 했다.
도무지 표현에 서툴고 여자 마음을 몰라준다고 결혼초에 무척이나 싸웠던 우리다.
그런 불평을 할 틈도 별로 없이 줄줄이 아이 낳고 기르는 동안 육아가 너무 힘들고
바빠서 서로를 보살피고 아껴줄 여유도 없이 그저 세 아이들 돌보느라
허덕이며 지내온 날들이다.
그렇게 애쓴 세월들도 지나고 이제 막내까지 제법 제 앞가림을 할 수 있게 되서야
비로소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우리 부부.. 생각해보면 참 짠하다.
남편도 나도 어느덧 희끗희끗 흰머리가 내려앉게 되서야 서로를 제대로
들여다 볼 수 있게 되었으니... 참 애쓰며 살았구나 싶었던 것이다.
세 아이들 모두 직접 만든 편지지에 사랑 가득 담긴 편지를 적어 내게 주었다.
'엄마가 없었다면 저는 존재하지 않았을 거예요' 라고 쓴 윤정이의 편지나
'엄마 조아요, 사랑해요. 대박, 짱, 최고 조아'를 쓴 이룸이나
'자주 다투고 삐지고 티격태격해도 엄마를 사랑해요'라고 쓴 열세살 필규나
하나같이 어찌나 고맙고 이쁜지 난 편지를 읽다가 울고 말았다.
눈물 글썽이는 나를 가운데 두고 아이들은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주고
촛불을 대신 꺼 주었다.
힘들다, 힘들다, 이젠 엄마좀 그만 불러, 너희들끼리 좀 해.. 하며
신경질부리고 불평해대며 무던히 원망하던 날들도 많았는데
그래도 이렇게 이쁘게 자라서 여전히 엄마를 너무나 사랑해주고 있다는 것이
새삼 너무 고맙고 사무쳐서 눈물이 솟고 말았다.
남편도 나이를 든 것인지 요즘 나에게 정말 참 잘한다. 사랑한다는 말도
그 어느때보다도 많이 듣고 있다.
짧은 연애, 거의 없다시피 했던 신혼, 그리고 육아, 육아, 육아의 날들동안
우린 변변한 애정표현도 못 하며 애들만 보고 살아왔다.
그래도 참 잘 커준 아이들이 있고, 이젠 서로를 보듬으며 지난 세월들을
돌아볼 수 있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아서, 그냥 너무 감사해서
눈물이 좀처럼 마르지 않았다.
나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 애쓰는 남편과 엄마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을
표현해 주는 아이들이 있는데 세상에 더 부러운 것이 없다.
이건 너무 근사하고 행복한 생일이 아닌가..
잘 지나가준 세월이 고맙고, 잘 커준 아이들이 고맙고, 잘 견뎌준
우리 두 사람이 고맙고, 다 고마와서 가슴이 뻐근할정도로 행복했다.
남편은 생일상을 말끔히 치우고 설거지를 해 주었다.
저녁 차리는 것도 도와주었고 하루 종일 이런 저런 집안일을 쉴새 없이
해서 나를 감동시켰다.
마음은 늘 있었을텐데 상황이 안 되고 여유가 없어 표현하지 못했던
애정을 남편은 요즘 제대로 나에게 쏟고 있는 중이다.
고맙다. 이 사람..
일찍 결혼해서 일찍 아이를 키운 부부라면 오히려 갱년기네 하며 서로에게
시들해질 중년이 나이에 우린 비로소 서로 살피고 아끼고 있으니
늦게 결혼해서 늦은 육아를 한 보람이 있구나... 싶을 정도다.
행복하게 행복하게 생일이 지나갔다.
이번 생일은 한 10년 쯤 뿌듯하게 추억할 만 하겠다.
왠지 앞으로의 날들이 더 기대되는 기분이랄까.
오래 애써왔던 많은 것들이 한꺼번에 내게 와르르 굴러오는 것 같다.
아... 참 좋구나.
행복하다.
지났지만 생일 축하드립니다~ 가족 모두모두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