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락치기 독서를 하는 이유, 그것을 알려주마!! 생생육아
2015.09.10 10:36 세 아이와 세상 배우기 Edit
배추, 무 밭에 물도 줘야 하고, 풀도 뽑아야 하고, 여름 이불도 빨아서 넣어야 하고
가을옷도 꺼내야 하는데, 내일 소풍가는 막내 도시락 재료와 간식도 사러 가야 하는데
꼼짝 못하고 책만 붙들고 있다. 그것도 공책에 메모까지 하면서 읽고 있다.
바로 내일, 우리 동네 주민자치센터에서 주관하는 '독서 골든벨'에 나가기 때문이다.
올 초에 둘째와 막내가 다니고 있는 학교의 학부모 동아리 중 '책 사랑회'에 가입했다.
한 학기에 두 세 번, 아침 공부 전에 2학년 반에 들어가 그림책을 읽어주는 활동을
하는 모임이었다. 그 정도면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닐 듯 해서 기꺼이 가입했는데
갑자기 마을에서 열리는 '독서 골든벨'에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책 읽는 도시'를 표방하고 있는 군포시에 살다보니 도서 관련 행사가 다양하게 열린다.
주로 시 차원에서 큰 행사들이 열리는데 올해에는 마을 단위로 주민자치센터와
도서관이 주관해서 지역 주민들이 참여하는 '독서 골든벨' 행사가 열린다는 것이다.
일반 시민들의 참여는 저조해서 우리 마을에 두개 있는 초등학교 학부모들이
주 참가 대상이 되었다.
일반 학부모들의 관심도 별로 없다보니 책 관련 동아리 회원들의 참여가 절실한
모양이었다. 처음에는 안 하려고 했는데 사방에서 나는 꼭 나가야 한다는
분위기였다.
파워 블로거인데, 글 쓰는 사람인데 언니가 안 나가면 어떻게 하냐고 추어올리기에
덜컥 그러마하고 대답해 놓은것이 지난 학기였다.
세 권의 선정도서를 읽고 50개의 문제를 맞추는 형식으로 진행된다면서 슬슬
책을 구해 읽으려는 차에 '메르스'가 터졌다.
모든 일정은 다 취소되고 '독서 골든벨'도 취소 되었다.
그래서 맘 편히 잊고 있었는데 여름방학이 끝나고, 개학을 맞았더니 다시
일정이 잡혀 9월 11일 오후로 결정되었다는 것이다.
그 사이 적지않은 학부모들이 포기를 한 모양이었다.
이런 저런 일들로 나도 바빠서 빠지려고 했더니 이미 너무 많은 엄마들이 포기해서
나까지 빠지면 안될 분위기였다. 게다가 교장 선생님도 참여해서 지켜보신다는데
골든벨은 못 울리더라도 끝까지 남아서 최선을 다 하는 모습은 보여야 겠다는
책임감마저 들었다.
아이들한테 이 이야기를 했더니 셋 다 흥분해서 난리였다.
"엄마, 엄마가 꼭 골든벨, 울리는거죠?"
막내는 내 손을 잡고 진지하게 이렇게까지 말하는 것이다.
아아아.
내가 이 나이에 애들을 위해 운동회에서 릴레이경주까지 나가 달렸는데
이젠 골든벨까지 울려야 하나... 도대체 엄마의 역할은 어디까지인거니..ㅠㅠ
이렇게된이상 골든벨은 못 울려도 초반에 탈락하는 일은 없어야겠다는
비장한 각오가 생겼다. 아이들은 물론 대회가 열리는 이웃학교 체육관으로
달려와 엄마를 응원하기로 했다.
교장선생님과 동료 엄마들과 세 아이들까지 지켜보게 되었으니 어떻게 해서든
결승 언저리까지는 살아남아야 하는데....
사정이 이렇게 급해도 매일 매일 해야할 일들에 치여서 정작 책은 충분히
못 읽고 있다가 결국 하루 앞둔 오늘 벼락치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세 권의 책은 다 읽었다.
두 권은 소설이고 한 권은 인문학 도서다. 한 소설은 두 번이나 읽었다.
최소 두번씩은 읽어야 세부적인 내용들이 기억날 듯 했다.
의무감으로 시작한 독서였지만 군포시의 올해의 도서에 선정되었던 책인 만큼
책들은 모두 좋았다. 더구나 소설은 오랜만에 읽은 터라 더욱 마음에 남았다.
'완득이'로 유명한 '김려령'작가는 확실히 청소년들의 심리 묘사에 탁월한 재주가 있다.
'가시 고백' 역시 청소년들 주인공들을 중심으로 그 무렵의 불안감, 분노, 희망과 우정
가족간의 갈등과 화해가 제법 마음 짠하게 묘사되어 있다.
심리 분석에 대한 탁월한 묘사를 보여온 '김형경'작가의 '꽃피는 고래'는 이번 독서에서
건진 보석이었다.
열일곱 살 된 주인공이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부모를 모두 잃고 아버지의 고향 마을에
머물면서 마을을 지켜온 어른들과 전설들을 이해하면서 삶에 대한 새로운 희망을
찾아가는 과정은 뭉클하면서도 감동적이었다.
- 나는 이제 어른이 된다는 것의 핵심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것 같았다.
나이를 먹고 몸이 커지고, 고래배를 타거나 시집을 가는 것 말고, 엄살, 변명, 핑계,
원망하지 않는 것 말고 중요한 것이 그것 같았다.
자기 삶에 대한 밑그림이나 이미지를 갖는 것, 그것이 쨍쨍한 황톳길을 땀 흘리며
걷는 일이든, 미끄러지는 바위를 한사코 굴려올리는 일이든, 푸른 하늘에 닿기 위해'
발돋움하는 영상이든, 갑자기 눈앞이 환해지는 느낌이었다.-
이 구절을 눈으로, 마음으로 밑줄 그어가며 읽었다.
이 다음에 내 아이들이 열일곱살이 되었을때 함께 읽고 싶은 대목이었다.
그렇구나.. 어른이 된다는 것은 이런거구나.
그 시절, 내 마음에 있던 밑그림이나 이미지는 어떤 것이었을까.
지금 나는 그때 품었던 영상에게로 얼마나 가까이 가고 있는 것일까.
남은 삶을 살고싶은 밑그림은 무엇일까.
이런 생각을 하며 읽다보니 내 눈앞도 문득 환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고미숙'선생님의 ' 몸과 인문학'은 중년의 나에게 딱 맞는 책이었다.
이런 저런 유혹들에 헷갈리는 중년들에게 명쾌하고 분명한 지혜를 전달하고 있는데
고전을 읽으며 오랜 시간 닦아온 저자의 철학과 비전이 아주 시원시원하게 펼쳐져 있었다.
늘 내 성에 안 차는 큰 아이를 지켜보며 이리 저리 재고 있던 내 옹졸한 마음에 단비같은
통찰들이 가득했다.
역시 책 읽기는 참 좋다.
그런데 이렇게 뿌듯한 독서를 통해 내가 맞춰야 하는 문제들이란 것이
하나같이 실망스럽다.
책에 나오는 온갖 사소하고 헷갈리기 쉬운 내용들을 뽑아서 문제를 만들다보니
이런것도 다 외워야 하나... 하는 자괴감이 드는 것이다.
특히 문장 중 한 단어를 괄호 안에 넣고 그 안에 들어가야 하는 낱말을 적으라는
것들은 정말이지 다시 수험 공부를 하는 학생이 된 듯한 기분이 들게 한다.
내가 이 세권의 책 읽기를 통해 얻은 마음의 양식이 무엇이든 간에 골든벨 문제는
책 전체를 샅샅이 훑어 세부적인 것들까지 기억해 내는 사람에게 유리할 것이다.
도리없이 한 번 읽은 책을 다시 읽어가며 중요한 숫자나, 단어들을 적고 있다.
주인공이 담임 선생님의 별명을 뭐라고 지었는지, 주인공의 친구 이름은 무슨 뜻인지
책에 나오는 고래 종류는 어떤 것들이지, 이런것들을 외우고 있다.
과연 나는 어느 단계까지 살아 남으려나.
이렇게 문제를 맞추기 위해 읽고 또 읽는 독서는 정말 다시 하기 싫지만
덕분에 알게된 좋은 책들과, 덕분에 마음에 새기게 된 좋은 구절이 있으니 참기로 한다.
이번 기회에 '고미숙'선생님의 책에 소개된 좋은 고전들도 차례로 읽어봐야지.. 결심하게
되었으니 내일까지만 오랜만의 벼락치기 공부에 열과 성을 다해보자.
이렇게 열심히 하고 있는데 아주 어처구니 없는 문제때문에 떨어지면 어쩌나.
아...
스믈 스믈 솟아오르는 명예욕에 또 마음이 흐려진다.
도대체 '불혹'이란 나이에 안 흔들리는게 뭔지 궁금할 뿐이다.
아아아..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