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들 덕에 나는야 공주 엄마라네.. 생생육아
2015.05.31 17:22 세 아이와 세상 배우기 Edit
아들을 먼저 낳아 기르다가 차례로 딸 둘을 얻고 보니, 아들과 딸은
확실히 노는 모습이 달랐다.
아들이 어렸을때는 길죽하게 생긴 막대는 무조건 '칼'이 되는 바람에
나는 갖가지 종류의 칼에 대적해야 하는 악당 역할을 주로 맡아야 했다.
액션 히어로에 대한 관심도 당연히 커서 조잡한 히어로 가면을 쓴 아들 손에
맞고 쓰러지는 역을 수도 없이 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아들이 '레고'에 빠진 후로는 내 적성과 취미에는 절대 안 맞는 쬐끄만
레고 블럭을 맞추느라 설명서를 보며 몇 시간씩 벌을 서기도 했으니, 아.. 그 시절엔
'또봇'시리즈가 없던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지금도 생각한다.
몸으로 진을 뺏던 아들의 시대에 이은 딸들의 시대는 한결 편했다.
액션 히어로도, 칼과 방패를 든 기사도 수많은 악당들도 딸들의 관심을 끌지
못한 탓이다.
두 딸이 제일 좋아하는 놀이는 '옷 갈아입기'였다.
옷장을 몽땅 뒤져 이옷, 저옷 입어가며 온갖 역할놀이를 하며 노는데
덕분에 늘 사악한 악당을 맡았던 나는 드디어 '왕자'가 되는 벅찬 시간을 맞이하기도 했다.
물론 '시녀'를 맡아야 할 때도 많지만 아들 시대에 비하면 아주 가뿐한 역할이다.
큰 딸이 어렸을때는 내가 상대역할을 해야해서 밥 하다 말고 왕자역할을 하거나
빨래 해 가면서 시녀역할도 해야 했지만 막내딸이 태어나 언니 말을 제법 알아들을
만큼 자라자 내게 왔던 역할은 고스란히 여동생에게 가 버렸다.
두 딸들이 내 치마나 여름 이불, 혹은 보자기 서너개로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드레스를
만들어 입고 집안을 돌아다니며 노는 모습은 보는 것 만으로도 참으로 황홀하고 이뻤다.
벼룩시장에서 건진 케릭터 드레스와 이웃들이 물려준 드레스가 여러벌 생기면서
딸들의 옷 갈아입기 놀이는 더욱더 탄력이 붙었다.
여섯살 막내 친구들은 물론이고 아홉살 큰 딸의 친구들도 우리집에 놀러오면
옷갈아입기 놀이를 제일 좋아한다.
발레를 배우는 동안 한벌 두벌 늘었던 발레복도 나오고, 진짜 발레를 전공하는
이웃집 언니에게 물려받은 긴 드레스는 늘 최고 인기다.
방문을 닫아 걸고 깔깔 거리며 한바탕 요란하게 옷을 갈아입고 나면 한명씩 드레스자락을 들고
나오는데 다들 어찌나 이쁘고 화려한지 감탄이 절로 나온다.
드레스 자락을 손으로 잡고 2층 계단을 올라가는 모습을 보노라면 먼지가 수북히
쌓인 2층이 미안해질 정도다. 멋진 왕자님이 기다리는 무도회장이라도 있어야
할 것 같아서다.
어려서부터 보는 디즈니 공주 케릭터 만화에 익숙한 아이들은 나폴거리는 치마
하나로도 '엘사'가 되고, '라푼젤'이 되고 '소피 공주'가 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정해져 있는 케릭터보다 자기들끼리 만들어낸 주인공 역할들을 더 재미있어 한다.
'예린'공주와 '나연'공주 처럼 자기들 생각에 이쁜 이름을 붙인 공주 놀이에
시간 가는 줄 모르는 것이다.
토요일엔 이룸이가 오래전부터 초대하고 싶어했던 이쁘장한 친구 한명이 놀러왔다.
윤정이까지 세 여자아이는 우리집에 있는 드레스같이 생긴 모든 옷들을
다 늘어놓고 이옷 저옷 갈아입어 가며 신나게 놀았다.
그 모습이 너무 이뻐서 마당에서 사진을 찍어 주려고 했더니 윤정이는 드레스에
어울리는 구두까지 찾아 신고 나와서 두 손을 단정히 하고 한껏 품위있는
포즈를 취하는 것이다. 늘 어려보였는데 갑자기 너무 의젓해보여서 깜짝 놀랐다.
봄 햇살에 얼굴이 까맣게 그을린 이룸이는 좋아하는 친구랑 같이 드레스놀이를
하는 것이 좋아서 웃음을 참지 못했다.
긴 치마자락을 잡고 완두콩이 익었나 안 익었나 살펴보러 텃밭을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얘들아.. 너희들은 어느 나라에서 온 요정들이니...'
싶어진다.
어제는 백설공주 옷을 입고 텃밭을 돌아다니던 이룸이는, 오늘은
이웃집 언니가 물려준 긴 발레드레스를 입고 우아하게 감꽃을 줍고 있다.
아아... 막내는 그냥 있어도 이쁜데 널 어쩌면 좋으니..
한번씩 공주놀이를 할때마다 옷 내어주고, 다시 정리해서 걸어놓는 일이
꽤 번거롭기는 하지만 이렇게 이쁘게 노는 시절도 잠깐이란걸 알기에
기꺼이 시중을 들어준다.
열살만 되도 이런 놀이엔 시들해지더라.
윤정이 또래 중엔 진작에 공주놀이 졸업하고 큰 언니들처럼 아이돌에
관심을 두는 친구들도 있으니 말이다.
저희들끼리 방문을 걸어 잠그고 킥킥거리며 옷을 갈아입고는
설거지 하는 내 뒤로 와서 "엄마" 하고 불러 돌아보면
우아하게 옷자락을 들어 공주 인사를 하는 딸들의 귀여운 모습은 나 혼자 간직하기엔
너무나 이쁘고 깜찍하다.
그래, 그래... 내가 이렇게 이쁜 공주를 낳은 엄마지... 싶은것이
지루한 일상이 단숨에 싱싱해지기도 하는 것이다.
먼저 크는 다른 집 딸들을 보니 하늘하늘한 원피스며 핑크색 치마도 딱 아홉살 까지더라.
빠른 아이들은 2학년만 되어도 분홍이며 원피스를 마다하고 핫팬츠에 헐렁한 티셔츠같은
중성적인 옷차림을 선호한다.
일찍 어린 시절을 끝낸 딸들을 지켜보는 엄마들은 아직 그 세계에 있는 딸들을 키우는 내게
더 많이 즐기라고, 그 시절이 정말 귀엽고 이쁘다고 입을 모은다.
아침마다 이쁜옷을 부르짖고 원피스에 어울리는 리본을 고르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는
막내딸을 볼때마다 '그래... 어쩜 지금이 가장 이쁜고 귀여운 시간들일지도 몰라...'생각하게된다.
'엘사'나 '라푼젤'보다 '엑소'나 '엠블렉' 왕자님들이 더 중요해지는 시절도 금방 오겠지.
엄마한테는 뚱한 표정을 보이다가도 '엑소'왕자님 사진을 볼때는 더없이 환한 표정을
지을 날들도 머지 않았겠지.
그러니까 지금 어떤 옷으로도 금방 공주가 되는 이 이쁜 날들을 더 많이 즐겨야지.
딸들이 공주인 이상, 나 역시 공주 엄마일테니
이쁘고 고운 날들아 부디 천천히 천천히 가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