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 조금만 아파.. 생생육아
2018.10.07 23:57 세 아이와 세상 배우기 Edit
태풍의 영향으로 금요일 밤 부터 많은 비가 내렸다.
바람도 어찌나 거세게 불던지 나무들은 미친듯이 우우 거렸고 마당에서는 뭔가 날려가는
소리가 이따금 들려왔다. 왠지 심란해서 뒤척거리느라 늦잠을 자고 일어난 토요일..
거실에 나와보니 남편이 안 보였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는데 어디 나갔나? 했는데
뒷 마당에서 물길을 내고 있는 남편이 보였다.
산과 이어져 있는 언덕에 있는 우리집은 큰 비만 오면 산에서 흘러 내리는 물로 주위가 온통
실개천이 된다. 그래서 물이 빠져나갈 수 있게 곳곳에 길을 내줘야 한다.
배수구에 낙옆이 쌓여있는지도 잘 살펴야 하는데 몇 해전 폭우가 내렸을때 막힌 배수구 때문에
집에 물이 차서 큰 낭패를 겪기도 했다. 큰 비 한 번 내릴때마다 집 안팎을 돌며 챙겨야 할 일들이 많다.
아침부터 고생이 많네... 생각하며 바라보다가 남편 발을 보고 깜짝 놀랐다.
맨발에 슬리퍼만 신고 찬 비속에서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장화를 신어야지, 왜 맨발이야... 양말을 신고 있어도 실내 공기도 서늘하구만..
옷도 방수잠바 안 입고 저렇게 얇은 거 하나 걸쳤네.. 아이고, 참.....
추운데 물 속에서 그런 차림으로 일 하면 어떻해.. 나는 유리창 너머로 들리지도 않을 잔소리를
늘어 놓았다.
남편은 잠시 후 온 몸이 젖어서 들어오더니 바로 칫과에 다녀오겠다며 차를 몰고 나가 버렸다.
잠시 후 늦은 아침을 차리고 있을때 남편이 돌아왔다.
치료는 잘 받았어? 물어보며 다가가는데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남편 얼굴이 심상치 않았다.
남편은 새파래진 입술로 온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추워.. 너무 추워..."
"어머, 여보, 왜 그래!" 나는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남편은 바로 거실 바닥에 누웠다.
"추워.. 이불 좀... 두꺼운 이불 좀...."
이어서 으으으 하는 남편의 신음소리가 들렸다. 남편의 큰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있었다.
서둘러 이불을 내오면서 폴라폴리스 잠바와 수면양말을 꺼냈다.
제일 먼저 찬 면양말을 벗기고 수면양말을 신겨 주었다. 잠바도 입혀 주었다.
남편 손, 발이 너무 차가왔다.
"그러게 왜 비오는데 맨발로 철벅거리며 일을 해. 가만히 있어도 으슬으슬 추운데..."
속상해서 이런 소리를 늘어 놓으면서 남편을 누이고 이불을 덮어 주었다.
잠바에 털 조끼를 입히고 그 위에 이불을 덮어 주었는데도 남편은 계속 춥다면서 덜덜 떨었다.
보일러가 틀어져 있어도 미지근한 바닥으로는 도저히 안될것같아 내가 의자로 쓰는
온열매트위에 눕히고 온도를 올렸다. 찜질팩을 데워 배에 대어주고, 이불을 하나 더 덮어 주었다.
으으으.... 으으으....
남편은 온 집안에 울릴만큼 큰 신음소리를 내며 끙끙 앓았다.
아침부터 얇은 옷에 맨발로 빗속을 다니면서 일 하는 동안 자기 몸이 얼마나 차가워졌는지
잘 몰랐을 것이다. 제대로 갖춰 입고 나와서 일 할 생각도 못 하고 그냥 여기 조금, 저기 조금
살피는 사이에 그 상태로 꽤 긴 시간을 찬 비속에서 일 했던 것이다. 한기라는게 그렇다.
어느새 스며들어 나중에는 뼛속까지 시려온다. 그 지경까지 가면 안되는데, 그 전에 체온에
신경을 썼어야 했는데 남편은 그냥 무시하고 계속 일을 했고 마침내 온 몸에 퍼진 한기가
칫과 진료하는 중에 닥친 모양이다.
건강에 기본이 체온관리다. 요즘같이 일기 변화가 크고 일교차가 큰 환절기에는 무엇보다
체온관리가 중요하다. 그것을 무시하고 찬 곳에서 오래 일을 한 댓가로 남편은 마침내
온 몸이 얼음속에 갇힌 것처럼 한꺼번에 닥쳐온 한기로 쓰러져버린 것이다.
뭘 어떻게 해 줘도 춥기만 한 상태가 뭔지 안다. 겹겹이 입고 덮었는데도 도무지 추워서
견딜 수 없는 상태..나도 겪어 본 적 있다. 체력과 면역력이 바닥이 났을때 몸은 제일 먼저
추운 것으로 아우성을 낸다. 온 몸이 두들겨 맞은 것 처럼 다 아프고 지독하게 춥다.
뭘 어떻게 할 수 없이 추위와 고통에 무력해진다. 지금 남편이 그런 상태다.
일단 남편을 그 상태로 두고 생강청에 대추를 넉넉히 넣고 끓이기 시작했다.
따뜻하게 끓인 물을 계속 먹였다. 그래도 남편의 몸은 좀처럼 데워지지 않았다.
뜨끈한 매트위에 이불을 두개나 덮고 누웠어도 손발은 여전히 얼음장 같았다. 곁에 앉아 손을 주물렀다.
팔이며 다리를 열심히 주물렀다. 서둘러 다려낸 생강대추차를 마시게 하면서 계속 주물렀다.
남편은 아이처럼 요란하게 끙끙 거렸다.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추석이후 연휴가 이어지는 동안 남편은 제대로 쉬지를 못했다. 더 추워지기 전에 손 봐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았다. 두 마리 개들 집을 올려 둘 데크를 짓느라 이틀을 마당에서
나무와 공구를 가지고 씨름을 했고, 3톤이나 되는 참나무 장작의 대부분을 남편이 날랐다.
마당에 여름내내 이곳저곳 쌓여있던 물건들을 치우고, 쌓아놓고, 예초기로 풀을 베고,
어긋나고 헐거워진 곳들 고치느라 고단했었다. 몸을 그렇게 혹사했으니 탈이 나는게 당연하다.
마음 놓고 아플 수 있는 시간이 남편에게는 꼭 필요했을 것이다.
수시로 남편에게 가서 몸을 만져보고 따끈한 물 계속 가져다가 먹이고 찜질팩 식으면 다시 데워
몸에 대 주고, 이마를 짚어보고, 팔도 문질러주고, 다리도 주물러 주고, 얼굴도 쓸어주고, 그러면서
빨래를 해 널고, 집안을 정리하고, 애들 셋과 밥을 챙겨 먹었다.
조금 쉬려고 tv 앞에 앉으면 이내 남편이 부른다.
"응, 여보, 뭐 해줄까.. 물?"
물을 먹여주고 다시 소파에 앉았더니 바로 또 부른다.
"나 여기 있어. 뭐가 필요해?"
팔이 계속 저리단다. 한참 옆에 서서 팔을 주물렀다.
행주를 삶고 있어서 주방에 들어갔더니 다시 나를 찾는 남편 소리가 들린다.
"왜, 여보, 어디가 불편해?"
"... 그냥 옆에 좀 있어...."
"..... 하아.... 내가 당신 옆에만 있으면 밥은 저절로 되나.... 하하"
하면서도 그냥 옆에 앉았다. 남편은 저리다는 팔을 들어 내 허리에 두른다.
나는 엄마처럼 누이처럼 남편의 머리칼과 얼굴을 쓸어 주었다. 온 몸이 뜨끈하다.
그래... 응석 부리고 싶구나.
마냥 아프다고 떼쓰고, 자기만 봐 달라고 조르고, 그리고 그냥 한없는 보살핌과 손길을
받고 싶구나.. 그래서 아프게 됬구나...
그래.. 그래...
혼자 벌면서 다섯 식구 가장 노릇 하느라 힘들지..
텃밭에, 마당에, 넓고 낡은 집엔 늘 당신 손이 가야하는 일거리들이 넘치지..
보란듯이 손 놓을 수 도, 맘 놓고 미뤄둘 수 도 없는 책임들 때문에 항상 어깨가 무겁겠지.
자주 전화 드리지도 못했으면서 그래도 생각하면 마음이 든든했던 어머님도 몇 해전에
세상을 뜨셨고, 지난해엔 아버님도 가셨으니 이제 당신에겐 마누라와 애들 뿐인데..
아프니까 마누라가 엄마같고 누나 같지..
그냥 마누라한테만큼은 맘 놓고 칭얼거리고 보채고 싶은 마음.. 다시 아이가 되어
저를 좀 봐 달라고, 저를 좀 챙겨 달라고 조르게 되는 마음... 알 수 있다.
남편 마음... 알 수 있다. 이 정도로 아파야 비로소 어린아이같이 자신의 가장 약한 모습을
보일 수 있는 게 이 나라의 가장이지, 남편들이고 남자들이잖아..
괜찮아.. 아파도 괜찮아. 내가 있으니까, 내가 보살펴 줄 수 있을 만큼은 얼마든지
아파도 돼..
바쁜 일 다 미뤄두고 남편 곁에 앉고 누워서 얼굴도 보듬어 주고 만져주고 많이 안아주었다.
온 몸을 계속 주무르고 쓰다듬고 만져 주었다. 질리도록 따스한 손길, 살펴주는 손길
받고 싶은 그 마음을 조금이라도 채워주고 싶어 오래 오래 나를 기울여 주었다.
여보...
이 다음에 만약 내가 이번에 당신처럼 이렇게 아프면
내가 당신에게 해 준 것 처럼 해 줘..
부르면 바로 와 주고, 계속 만져주고 주물러주고, 많이 안아주고 들여다봐주고..
그냥 옆에 계속 있어주고......
남편은 희미한 목소리로
..응...
이라고 대답했지만
당신은 나처럼 못 할거야.. 생각했다. 결혼 생활 17년 동안 당신과 애들 아픈 곁을
지켜온 사람이 나니까... 아플때 어떻게 돌봐야 하는지 당신은 잘 몰라..
오래 해 본 사람이 아니니까...
그러니까 당신은 아파도 되지만 나는 아프면 안돼. 그래서 내가 그렇게 기를 쓰고
몸 관리를 하는거야. 당신은 마누라가 있지만, 나는 없으니까..
늘 바쁜 당신과, 아직 어려서 자기들 크는 일 만으로도 하루가 벅찬 아이들이 있는데
나는 아플 수 가 없네. 내가 아프면 당신도 아이들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거야.
그 시간 내내 아픈 나를 돌봐 온 사람이 바로 나 인걸..
그러니까 조금만 아파. 내가 보살펴 줄 수 있을 만큼만 아파..
종일 앓았던 남편은 저녁 밥상에 앉아 밥을 조금 먹고 기운을 약간 차렸다.
하루 사이에 얼굴이 푹 꺼졌다.
새 날은 눈부시게 밝았다.
남편은 늦게 일어나 콩나물 국에 말은 밥을 반 공기쯤 먹었다.
다시 잠이 들었고 김지볶음밥으로 차려낸 점심밥을 한 공기 먹었다.
"좀 괜찮아?"
"온 몸이 다 아파.."
"그래.. 몸살이 제대로 와서 그래.."
"당신 생일 선물은 그냥 '나'로 퉁 치자. 다른 건 없어" 남편은 내 무릎에 누우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일은 내 생일이고 가족이 다 있는 일요일 저녁에 생일상을 차리기로 했었다.
올 초 큰 딸 생일에 감동적인 장문의 편지를 써 준 남편에게 내 생일에도 그런 편지
써 달라고 했는데 아마도 받기 어려울 모양이다.
나는 그냥 웃었다.
"그럼... 당신이 가장 큰 선물이지. 이 만큼 몸 추스린게 선물이지. 다른 선물이 뭐가 필요해"
큰 딸과 해태를 데리고 언덕길을 내려가는 남편 뒷 모습이 애잔했다.
몸살이 내게도 오려고 계속 틈을 보고 있다.
난 아프지 않을거야. 아플 새도 없고..
마음을 다시 단단하게 조였다.
아이들은 9일까지 단기 방학이고 10일엔 내 책이 나온다.
그 다음엔 여러가지 많은 일들이 한꺼번에 닥치겠지.
아프면 안돼.. 몸도 마음도 다시 꼭 여미고 숨을 크게 들이 쉬었다.
오늘까지 잘 쉬어야 남편은 내일 다시 출근을 하겠지.
내가 돌 볼 수 있을때, 마침 주말에, 내가 살펴 줄 수 있는 만큼만 아파줘서
고마워 여보..
많이 아프지만 말자, 우리..